00642 그래서 그는 헬스장에 갔다 =========================================================================
“그 남자, 통 안 보이네.”
“그러게. 쳇, 괜히 등록했어.”
여자 둘은 땀에 젖은 채 서로 투덜거리며 대화를 나눴다. 롤스로이스를 발로 차서 문을 닫는 그 남자의 모습이 이상하게 도통 안 보인다. 설마 하루만 나오고 더 이상 안 나올 리는 없을 텐데.
벌써 일주일째다. 혹시나 해서 프론트에 알아봤는데 반년짜리 코스를 끊었다고 한다. 설마 반년 끊고 하루만 나오지는 않을 테니, 혹 무슨 바쁜 일이 있는 건 아닐까 싶어 여자들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열심히 나오고 있었다.
“엇! 저기, 설마?”
“와, 왔다!”
여자 둘은 기겁을 하고 놀랐다. 눈을 비비고 확인했다. 틀림없이 전의 그 남자였다. 롤스로이스를 발로 쾅 하고 차서 문을 닫았던 그 남자!
운동복 차림의 유지웅이 들어서자 헬스장은 대번 보이지 않게 술렁거렸다. 여자들은 그를 의식하며 운동에 집중했다. 한창 여자들에게 작업 중이던 다른 남자 회원들은 갑작스럽게 냉담해진 반응에 뻘쭘해졌다.
‘그가 들어서는 순간, 모든 의사들은 샐러리맨이 되었다.’
평준화의 마법이라고 해야 할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후광이 비쳐 보이던 의사 회원들이 다른 남성 회원들과 크게 다를 바 없이 보였다.
유지웅은 주변을 살피다가 비어 있는 운동 기구에 앉았다. 그는 숨을 고르고 운동을 할 준비를 했다.
‘나도 자기 배에 왕 자 있었으면 좋겠다.’
‘저런 거 다 실속 없어. 남자가 몸 좋아서 뭐 해? 돈만 잘 벌고 성실하기만 하면 그만이지.’
‘돈 잘 벌고 성실하고 몸까지 좋음 더 좋지 않아?’
운동을 그만둔 지 어언 일주일. 유지웅은 영화를 보던 중 효주가 남자 배우의 몸매를 보고 좋다는 듯이 감탄하자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헬스장에 나왔다. 딱 일주일 만이다.
“두고 봐라. 내가 몸 만든다.”
대한민국에서 남편, 아니 남자 노릇하기 너무 힘들다고 그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어머, 되게 오랜만에 나오셨네요?”
한 세트를 마치고 비명을 지르는 팔을 주무르며 잠시 쉬고 있는데 웬 여자들이 다가왔다.
“……누구시더라?”
“기억 안 나세요? 일주일 전에 지하 주차장에서 뵜었는데.”
“그랬던가요?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하네요.”
“같이 운동하는 사이인데 인사나 하고 친하게 지내요.”
“그러죠, 뭐.”
여자들은 살살 웃으며 친밀하게 굴었다. 유지웅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끄덕였다.
그는 세계적인 유명 인물이지만 의외로 거리에서 알아보는 사람은 적다. 매스컴 등 일반 매체에 공개된 사진은 전부 각도도 이상하고 메이크업을 분장 수준으로 해서 찍기 때문이다. 그다지 특출하게 잘생긴 편도 아니라 생얼로 다니면 생면부지의 사람들은 잘 못 알아본다. 어쩌다가 감이 좋은 사람들도 ‘좀 많이 닮았네.’하고 넘어간다.
“저는 김지은이라고 해요.”
“저는 최원희요. 그쪽은 성함이……?”
“이진석이요.”
유지웅은 가명을 댔다. 헬스장에 등록할 때에 사용한 이름이었다. 여자들은 눈빛을 빛내며 서로 무언의 시선을 교환했다.
‘이 씨?’
‘이 씨 집안이면……설마?’
국내 최대의 재벌 가문은 일성그룹(유씨 일가는 애초에 모든 순위에서 논외)이고, 일성그룹은 이 씨 성을 가지고 있다. 두 여자는 유지웅이 그쪽 집안사람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별꼴이야.”
“꼬리치는 꼬라지 한 번 재빠르게. 흥.”
“어디 얼마나 잘 되나 두고 보자.”
다른 여자들은 보이지 않게 시샘을 드러냈다. 한 박자 늦은 바람에 유지웅에게 접근하지 못했지만, 기회란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올 것이다.
“지은 씨, 일찍 나왔네요. 오늘도 이어서 계속 하죠.”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혼자 할 수 있어요.”
“지은 씨?”
“저리 비켜 주세요.”
남자 회원, 서정석은 냉담한 반응에 황당했다.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다. 저 여자 때문에 병원 당직 일정도 일부러 조정하고 헬스장에 나왔는데, 왜 저래?
‘아우, 저 몸매만 아니면 그냥!’
서정석은 보이지 않게 입맛을 다셨다. 김지은은 하얀 피부에 늘씬하게 잘 빠진 몸매를 가졌다. 몸매로만 치면 이 헬스장 여성 회원 중에서 원톱일 것이다. 이제 거의 다 넘어왔는데.
‘이 놈 때문인가?’
서정석은 힐끔 유지웅을 내려다봤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헬스장에 다니는 의사 회원들끼리는 서로 같은 병원에 근무하는 동료다 보니 얼굴도 알고 친하다. 상호 간에 정보 교환을 하기도 한다. 누가 자기에게 꼬리를 쳤다느니, 누구는 애인 삼기 좋다느니, 누구는 하룻밤 데리고 놀기 좋다느니, 뭐 그런 거.
‘학부생?’
처음 서정석은 그 가능성을 떠올렸다. 이 근처에는 주택가가 없다. 회원들은 전부 근처에서 직장을 다니는 직장인들이다.
‘쯧쯧, 같은 의사라면 젊은 쪽이 더 좋다 이거지?’
서정석은 혀를 찼다. 나이를 고려했을 때 눈앞의 청년은 아무리 봐도 학부생 이상은 아닌 것 같다. 의사 면허 시험이야 무난히 합격한다 치더라도, 앞으로 군의관, 인턴, 레지던트 등 지옥 같은 코스를 밟아야 겨우 전문의를 바라볼 텐데. 저 여자들은 그런 것도 모르는 모양이다. 한심했다.
“오늘 헬스장 분위기가 왜 이래?”
“뭔가 술렁이는 거 같은데?”
“여자들 왜 저러냐?”
남자 회원들도 비로소 이상한 기류를 느꼈다. 남자 회원들은 롤스로이스 사건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런 걸 여자 회원들이 남자들과 공유할 리가 없으니까.
뭐라고 할까. 여자들이 잔뜩 들떠 있다고 해야 할까.
눈치 빠른 남자들은 그 중심에 유지웅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움직이는 대로 여자들의 시선이, 관심이, 몸짓이 함께 따라가고 있었으니까. 항상 그런 시선을 받아왔던 의사 회원들만 눈치 채지 못했을 뿐이다.
“저기, 저 남자 말이야. 여자들이 저 남자만 따라다니는 거 같지 않냐?”
“맞네. 뭐지, 쟤도 의사야?”
“무슨 성형외과라도 되나?”
“그런 거 치고는 너무 어린데?”
도무지 조합이 안 되니 이상할 노릇이었다. 여자들이 왜 저 남자만 졸졸 따라다니지? 그렇게 목을 매달던 의사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저 남자도 의사인가 하고 생각해봤지만, 일단 너무 나이가 어리다. 잘 봐줘야 학부생이다.
“그렇게 하시면 다쳐요.”
“뭐가 잘못 됐어요?”
“여기가 하체를 꽉 조이게 해서 하셔야 해요. 운동기구는 올바르게 사용하셔야 효과도 높고 또 안 다쳐요.”
“아, 그래요? 지금까지 잘못 알았네.”
새로 끼어 든 젊은 여자, 한주희를 보고 김지은은 가볍게 이마를 찌푸렸다. 운동을 좋아해서 따로 전문적으로 배웠다는 회원이었다. 건강미로 치면 이 헬스장 여성 회원 중에서 최고였다. 강력한 적수의 등장이었다.
유지웅은 한주희에게 올바른 운동 기구 사용법을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친구 최원희와 함께 한 발짝 물러선 김지은은 못마땅한 듯이 혀를 찼다. 아, 물론 유지웅이 아니라 한주희가 못마땅하다는 뜻이다.
“몸매 좀 자신 있다고 꼬리치는 꼬라지 좀 봐.”
“재수 없어.”
둘은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 막 세트를 마치고 쉬고 있는 틈에 사근사근하게 다가갔다.
“근데 진석 씨, 오늘 끝나고 시간 있어요?”
“시간요?”
“네. 이것도 인연인데 커피나 잠깐 해요.”
“오늘 바쁜데. 끝나고 바로 스위스 가야 돼서요.”
“……스위스는 왜요?”
“있다가 스타칼리버 시리즈 신상품 나와서요. 파텍필립이요.”
“그, 그래요?”
여자들은 순간 당황했다. 파텍필립? 그게 뭐지 싶었던 것이다. 샤넬이나 에르메스 같은 건 잘 알겠는데, 발음하기도 힘든 요상한 그런 이름은 잘 모르겠다.
‘어머, 우리 보는 눈이 왜 저래?’
‘뭐, 뭐가 잘못된 거야?’
유지웅은 조금 이상하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시계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세계 최고의 시계 브랜드도 모르는 것에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유지웅은 그날 운동을 마치고 돌아갔다. 여자들은 일부러 그가 가는 시간에 맞춰 헬스장을 나섰다. 그리고.
“……롤스로이스가 아닌데?”
“벤틀리잖아. 세상에, 저거 20억인가 하는 건데.”
김지은은 또 한 번 가슴이 가빠왔다. 집에 대체 저런 고급차가 몇 대나 있는 거지?
놀랄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음날 헬스장을 찾은 김지은은 주차장에서 유지웅과 마주치고 기겁을 했다. 차가 또 바뀌었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차가 또 바뀌셨네요?”
“오늘은 왠지 이 녀석이 타고 싶더라고요.”
유지웅은 히죽 웃으며 앞범퍼를 발로 툭툭 찼다. 김지은은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저런 차를 막 저렇게 발로 차도 돼?
“되게 능력 있으시다. 도대체 차가 몇 대예요?”
“몰라요. 세 봐야 돼요.”
세어 봐야 안다는 말에 김지은은 잠시 침묵했다.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는 억지로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면서 말했다.
“그 차, 페라리 맞죠? 차는 잘 모르지만 그건 딱 봐도 알겠다.”
“맞아요.”
“페라리면 보통 몇 억씩 할 텐데, 그렇게 발로 차도 돼요? 차가 신발한테 밀렸다고 서운해 하겠네요.”
“네?”
유지웅은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신발을 보라는 듯이 발을 살짝 들어올렸다. 평범한 축구화였다. 왜 그러는지 몰라 김지은은 어리둥절했다.
“이 신발이 차보다 더 비싸요.”
“네? 설마요. 농담이겠죠.”
“이거 에버튼이 작년 챔프 결승전에서 우승할 때 메시가 신었던 축구화예요. 경매에서 천만 달러인가 주고 산 건데.”
“처, 천만 달러……!”
김지은은 게거품을 물 뻔했다. 뭐? 저 신발이 얼마라고?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지?
호흡이 막힐 뻔했지만 김지은은 겨우 다스렸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겨우 웃어 보였다. 돈 많고 순진한 청년 같아서 한 번 팔자 좀 피어보려고 했는데, 이건 한 마디 한 마디가 상상을 초월하다 보니 겁까지 나기 시작했다.
‘괘, 괜찮을까?’
그녀는 질린 가슴을 억누르며 물었다.
“스위스 여행 가신다는 건요? 오늘 또 나오신 거 보니 여행 취소됐나 봐요?”
“아, 갔다 왔어요. 이거 사느라고요.”
유지웅은 회중시계를 꺼내 보이며 자랑스러워했다. 처음 김지은은 촌스럽게 웬 회중시계인가 했다. 하지만 한 번 보고는 곧 생각을 바꿨다. 시계를 잘 모르는 자신이 보기에도 엄청 고급스러워 보였다.
‘어제 공부도 했지!’
어제 집에 간 그녀는 파텍필립이 뭔지 인터넷에 알아봤다. 세계 최고급 브랜드 중 하나이며, 웬만한 제품들이 다 억을 넘어간다는 소리에는 기함을 했다.
“와, 엄청 예뻐요.”
“이거 계절, 달모양, 항성시, 별자리표까지 다 나오는 거예요. 영구 캘린더 기능도 있고요. 만드는데 4년 걸렸대요.”
“대, 대단하네요…….”
자세히 시계를 살펴본 김지은은 무슨 하나의 예술품을 보는 듯한 정교한 디자인에 숨을 삼켰다. 그리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이며 농담처럼 말했다.
“이런 건 엄청 비싸겠어요. 저 같은 사람은 평생 일해도 못 만져 보겠죠?”
“그래도 이 신발보단 싸요.”
유지웅은 신발로 바닥을 툭툭 차며 말했다. 그래, 메시가 신고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는 저 신발. 그런데 저 비싼 걸 저리 아무렇지 않게 신고 다녀도 돼?
그날 이후 헬스장 분위기는 미묘하게 바뀌었다.
“지은이 너, 요즘 이상하다?”
“난 포기했어.”
“……왜?”
“도저히 우리가 어찌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냐. 그냥 적당한 의사 하나나 잘 꼬셔 볼래.”
유지웅한테 달아올랐던 여자들은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두 분류로 나뉘었다. 깔끔하게 그를 포기하고 편안하게 대하는 한편 타켓을 다시 의사층으로 바꾼 그룹, 그리고 여전히 그의 관심을 얻으려 매달리는 그룹으로. 김지은은 전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허억!”
“저, 저 여자 뭐야!”
“우와, 완전 여신이네.”
한 소녀가 헬스장에 들어서자 남자들은 대번에 술렁거렸다.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정도로 대단한 미인이었다. 어깨에 닿을락 말락한 은발, 새하얗고 깨끗한 피부, 그리고 푸른 눈동자까지. 여기에 몸매는 얼마나 날렵하게 잘 빠졌는지, 감히 말도 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한 미인, 아니 여신이었다.
“시설은 적당히 쓸 만하게 되어 있군요.”
“그쵸? 여기가 그나마 젤 낫다니까요.”
“그럼 바로 시작할까요?”
“나 옷 좀 갈아입고요.”
남자들은 숨을 삼켰다. 저 근사한 여신은 아무래도 그 재수 없는 신입 회원이 데려온 모양이었다. 그래, 매일같이 고급차를 바꿔가면서 타고 다닌다는 그 놈 말이다. 남자들도 이제는 대강 전후사정을 알고 있었다.
뒤따라 탈의실에 들어온 서정석은 못마땅한 감정을 감추고 슬쩍 물어 보았다.
“같이 온 여자 누구예요? 엄청 근사하던데. 혹시 애인?”
재수 없지만 납득이 간다. 롤스로이스를 타고 다닌다던데, 이런 곳에서 만난 여자들은 눈에 차지도 않겠지. 왜 그리 스캔들 한 번 없나 하고 안 그래도 이상하게 여기던 참이었다.
“아뇨, 부하 직원이에요.”
“……부하 직원?”
매칭이 안 되는 대답에 서정석은 순간 당황했다. 도무지 상상이 안 가는 궁합이었다.
“저 운동하는 거 보더니 기초부터 잘못 되었다고 제대로 잡아준다고 하루 나온 거예요.”
“그, 그렇군요.”
대체 뭐 하는 놈이지? 서정석은 머릿속이 헝클어졌다.
============================ 작품 후기 ============================
본편 파트 구상이 덜 돼서 한 편만 더 쉬어갈게요.
그리고 사실 신발이 가장 비싸요. 그래서 발로 차서 문 닫아도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