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80 흔들리는 대국? =========================================================================
효웅산업은 제니스 연구단지에 중앙 연구원을 두고 있다. 연구단지 시설 중 가장 최첨단 설비를 자랑한다. 최윤은 연구단지 총책임자이면서, 효웅산업의 CEO이기도 했다. 그는 주로 효웅산업 중앙 연구원에서 시간을 보낸다.
연구단지에 근무하는 과학자와 일반 직원들 숫자만 어느덧 15만 명을 돌파했다. 연구단지가 차지하는 면적만 해도 세종시 전체의 1/3 가량 된다. 이쯤 되면 연구 도시라고 불러도 무방한 수준이다.
직원들의 가족까지 고려하면 근 40만여 명이 연구단지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 중 약 25만여 명이 가족 단위로 서울에서 이주를 왔다. 해서 연구단지는 서울의 인구 포화 현상을 어느 정도 해소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뿐만 아니라 그 40만여 명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상인들 및 그 가족을 고려하면, 세종시 경제의 90% 이상을 연구단지가 책임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WCO본부도 연구단지 안에 본부를 두고 있고, 세계에서 제일 거대한 은행인 세현저축은행 역시 연구단지 안에 본사를 두고 있었다.
세종시는 몇 년 전 주민세 15조 원을 징수하며, 12조 원을 기록한 서울을 넘어섰다. 바야흐로 자타가 공인하는 가장 부유한 도시가 된 셈이다. 이에 일부 서울 시민들은 대한민국 제1의 도시라는 지위를 빼앗기는 건 아닌지 위기감을 느끼기도 했다.
“주민세? 그거 유지웅 회장은 면세라서 그래. 유지웅 회장이 소득세만 냈어도 세종시는 발끝에도 못 따라온다.”
“그럼 세금 내게 하면 되지 않아?”
“미쳤냐? 누가 유지웅 회장한테 세금 물릴 수 있겠어?”
옐로 몹이 극단적으로 줄어들면서, 힐러 면세 혜택은 사실상 사라졌다. 이제 국내 레이더들은 공평하게 세금을 부담한다. 이것은 세계적으로 거스를 수 없는 변화의 흐름이었다.
그러나 홀로, 아니 단둘이서 그 시대적 흐름을 역행하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흑석동 저택에 살고 있는 유지웅 커플이다. 둘에게 부여된 ‘직접세 완전 면제’ 혜택은 시대적 변화에도 끄덕 않고 굳건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소득세, 재산세, 주민세 따위를 일절 내지 않으니 국세청과 서울시는 애가 탄다. 만약 직접세가 부과된다면 서울시는 매년 어마어마한 세수를 거둬들일 것이다.
실제로 일부 시민 단체에서 유지웅에게 너무 과한 혜택을 준 게 아니냐는 시민운동이 번지기도 했다. 유지웅을 위한 직접세 완전 면제 혜택을 없애거나, 축소하자는 것이다.
―그러다가 다른 나라 가면 어쩌려고?
―내가 유지웅 회장이라면 어디 적당한 땅 하나 사서 나라 세우고 왕 노릇하면서 산다. 돈 있어, 힘 있어, 국제적으로도 영향력 엄청나, 뭐가 모자라냐?
―일본에 돈 주고 섬 대륙 하나 영구할양 받으면 되겠네. 아니면 중국 쪽에서 할양 받든가. 갈 데는 많다.
유지웅에게 세금을 부과하자는 시민운동은 오히려 거센 국내 여론에 밀려 쏙 들어갔다.
많은 국민들도 안다. 유지웅이 한국에 살아주기만 해도 엄청나게 고마운 일이라는 것을. 그는 단독으로 능히 한 국가를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지녔다. 달리 말하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울타리를 벗어나 자기만의 나라를 세울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가 국내에 존재함으로써 얻는 사회적 이익은 엄청나다. 헌데 겨우 세금 몇 푼이 아까워서 그의 심기를 거스른다면, 그래서 그가 훌쩍 떠나버린다면 역사상 전무후무한 손실이 될 것이다.
“핵물질과 융합했는데도 방사선 반응은 전혀 잡히지 않는군요.”
“3차원 모듈 스캔 결과는 어때요?”
“아직 흐릿해요. 폐쇄 모듈로도 정밀 스캔에 애로사항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다시 해봐요.”
최윤은 요즘 북극곰 괴수를 잡고 얻은 레드 결정체 분석에 한창이었다. 효웅산업 제1연구팀의 우수한 두뇌들이 다른 연구를 내팽개치고 이 작업에 매달렸다. 레지나도 약혼자를 위해 기꺼이 한 손을 보탰다.
그녀는 가볍게 농담처럼 말했다.
“힘을 내봐요. 그리 쉽게 해부된다면 열쇠라고 할 수도 없겠죠.”
농담이지만 의미심장한 단어에 최윤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는 모니터에서 잠시 눈을 떼고, 직경 5미터의 투명한 구체 안에 들어 있는 레드 결정체를 응시했다.
레드 결정체는 아무런 지지대도 없는, 텅 빈 폐쇄 모듈의 중심에 둥둥 떠 있었다. 마치 구체 내부에는 중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구체와 연결된 수많은 전자 센서는 내부에서 일어나는 물리 변화를 감지해서 수퍼 컴퓨터에 전달했고, 수퍼 컴퓨터의 연산 회로는 그 결과를 판독하여 정리하는데 과열돼 있었다.
폐쇄 결정체는 블루 결정체를 병렬로 연결해, 가상의 레드 결정체를 재현한 에너지를 주동력으로 사용한다. 따라서 어떤 결정체도 그 물리 구조 스캐닝이 가능하다. 하지만 ‘북극곰 결정체’ 분석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 북극곰 결정체는 단순한 레드 결정체가 아니라, 핵물질과 융합하여 전혀 새로운 성질을 가지게 된, 지구에서 단 하나만 존재하는 희귀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최윤은 눈이 아픈지 잠시 눈을 감고 뒷목을 주물렀다. 레지나가 살며시 다가와 그의 목을 만져 주고, 어깨를 주물렀다. 그는 픽 웃으며 뒤로 손을 돌려 그녀의 손을 만졌다.
그때 총무부에서 호출이 왔다.
「소장님. 흑석동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지금 바로 전화달라고 하십니다.」
일을 할 때에는 전화기를 꺼둔다. 그래서 총무부를 통해 연락이 온 모양이다. 최윤은 조금 불안해졌다.
“회장님이요?”
「예. 급하다고 하십니다.」
“알았습니다.”
연결을 끊고, 최윤은 레지나를 돌아봤다. 그녀의 얼굴에도 살짝 불안한 기색이 떠올랐다.
“회장님이 직접, 그것도 급하다고 하시면…….”
“……이번엔 또 무슨 일일지 겁나요.”
그렇다고 상사의 지시를 거스를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최윤은 불안한 마음을 누르고 전화기를 켰다.
* * *
유지웅 커플은 정기적으로 제니스 종합병원을 방문한다. 주치의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건강 문제로 방문하는 일은 드물다. 주치의는 주로 최윤 등 결정체학자들과 협력하여 유지웅 커플의 몸에 일어나는 변화를 정기적으로 진단하거나 조사한다.
그렇다 해도, 의학 수준이 아직 따라가질 못하고 있어 둘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제대로 규명하지는 못했다. 무슨 능력을 쓸 수 있고 그 한계는 어느 정도인가를 측정하는 것에 그친다. 비유하자면 소총이 몇 발을 쏠 수 있고 살상거리가 어디까지인가를 측정할 순 있지만, 어떤 구조 원리인가는 규명이 힘든 상황인 것이다.
“특별한 이상은 없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도 수고하셨어요.”
유지웅은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정효주도 검사를 마치고 나왔다. 그녀는 자연스레 옆에 서며 팔짱을 끼었다.
“세종시 온 김에 뭐 맛있는 거 좀 먹고 가자.”
“여기 뭐 먹을 게 있으려나?”
“먹자 골목 많이 생겼대. 연구소 직원들 엄청 많이 근무하고 있잖니.”
“효주 너, 미리 봐둔 가게 있구나?”
“에헤헤…….”
그녀는 혀를 살짝 내밀고 웃었다. 유지웅은 이마에 가볍게 뽀뽀를 해줬다.
“그래. 가자.”
“경호원은 빼고, 우리 둘이서만 오붓하게.”
“좀 소란스러워질 텐데……. 우리 변장도 안 했고, 세종시에서는 죄다 알아볼 걸.”
“괜찮아. 우리 안마당인데 그렇게 귀찮게 굴진 않을 거야.”
“그래. 가자.”
둘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복도를 걸었다. 잡담을 시시덕거리며 걷는데 문득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부탁드립니다! 제발 집사람 좀 살려주세요! 저 이 사람 고생만 너무 시켰다고요!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유감입니다. 그래도…….”
“제발! 제발 부탁드려요, 선생님!”
둘은 걸음을 멈췄다. 더러운 작업복을 입은 삼십대 중반의 남자가 의사 가운을 붙들고 늘어지다시피 매달렸다. 일터에서 바로 병원으로 달려온 모양이었다. 의료진은 난처한 표정이었으나 그를 뿌리치진 못했다.
호기심이 생긴 유지웅은 의료진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시죠?”
“회, 회장님!”
유지웅을 알아본 의사는 당황해서 말을 멈췄다. 의료진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장병 앞에 5성장군이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남자는 얼굴에 눈물이 가득했다. 그는 곧 유지웅을 알아보고는 손을 덥석 잡고 고개를 숙였다. 정효주는 반사적으로 제지하려다가 멈췄다.
“아이고, 회장님! 제발, 제발 우리 집사람 좀 살려주세요!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집사람 한 번만 살려주시면 평생 은인으로 모시겠습니다! 회장님은 돈도 많으시잖아요! 사람 한 번만 살려주세요! 부탁드립니다! 회장님! 제발!”
기름이 잔뜩 묻은 더러운 작업복이었지만 유지웅은 미처 불쾌한 느낌도 받지 못했다. 울먹이는 남자가 너무 안 되어 보였기 때문이다.
“와이프 되시는 분이 아프신가 보군요. 병명이 뭐죠?”
의사가 옆에서 얼른 대신 대답했다.
“다발성 암입니다.”
“겨우 암이요? 근데 뭐가 문제라는 거…… 아! 혹시 이 분, 1급 대상자가 아닌가요?”
제니스 종합병원에서는 치료비 청구에서 환자를 몇 단계로 나누어 분류한다. 1급은 제니스 관련 회사에서 근무하는 직원이다. 이들은 본인은 물론 직계가족까지 제니스 종합병원에서 무료로 치료받을 수 있다.
심각한 말기 암이라 해도 블루 결정체를 이용해 만든 차세대 항암제가 개발되어 있기 때문에, 돈만 있으면 쉽게 완치된다. 문제는 이 차세대 항암제가 매우 비싸다는 것에 있다. 1급 대상자라면 무료로 치료받을 수 있지만, 보통 환자라면 어마어마한 치료비를 부담해야 한다.
“아닙니다. 1급 대상자이십니다.”
“그런데 왜요?”
그렇다면 자신의 손을 거칠 것도 없이, 병원에서 무료로 치료를 하면 그만이다. 근데 왜 남자는 울먹이고, 의사는 저리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갔다.
의사가 쉽게 설명을 했다.
“블루 결정체로 만든 최신 항암제는 정상 세포를 거의 공격하지 않고 암세포만 죽이는 탁월한 성능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머리가 빠지거나 생식 세포가 파괴되는 등의 부작용이 일절 없습니다. 이 항암제는 면역 체계를 극대화시켜 신체가 스스로 암세포를 죽이도록 해줍니다.”
“원리는 대강 알아요. 그럼 뭐가 문제죠?”
“단 신체의 자연적인 자생력을 적극 이용하기 때문에, 치료 과정에서 막대한 체력을 소모합니다. 물론 심하게 허약한 사람이 아닌 경우에는 문제가 거의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환자분의 경우, 부작용이 심한 일반 항암제의 장기적인 투여와 방사선 치료로 인해 체력이 심하게 고갈되었습니다. 때문에 신형 항암제를 처방해도 환자의 체력이 버텨내지를 못합니다.”
유지웅은 문득 이상한 말을 알아차렸다. 일반 항암제? 장기적인 투여?
“왜 1급 대상자한테 일반 항암제를 썼나요?”
“……이 분이 1급 대상자가 되신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 전에는 다른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제야 유지웅은 이해가 갔다. 이 남자, 제니스에 근무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다. 그전에는 비싼 치료비를 감당하면서 다른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을 것이고.
힘이 빠졌는지 남자는 주저앉은 채 흐느꼈다.
“여기만, 여기만 오면 나을 수 있대서 죽을힘을 다해 시설정비반에 취직했는데……. 크흑!”
“…….”
고개를 숙인 남자는 억지로 흐느낌을 죽였다. 의료진은 아무 말도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만능이라는 별명을 가진 블루 결정체 신약도 못하는 것은 있었다.
유지웅은 입맛이 싹 달아났다. 그는 무심코 정효주를 돌아봤다. 만약 효주가 죽을병에 걸려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면, 어찌 살아갈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남자의 슬픔과 절망이 절절하게 다가왔다.
“방법이 전혀 없나요?”
“……죄송합니다.”
최고의 신약을 펑펑 쓸 수 있는 최고의 의료진마저 방법이 없다면 없는 것이다. 그래도 유지웅은 남자가 너무 안타까웠다.
그는 반지를 만졌다. 반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초소형 통신장치였다. 핸드폰을 중계장치로 연결하여 오리나와 24시간 대화할 수 있는 장치였다.
“오리나, 방법이 없을까? 도와주고 싶은데.”
「가능성은 있습니다.」
“뭐? 정말? 방법이 있다고!”
누군가와 통화하던 유지웅이 놀라서 외치자 의료진은 물론이고 남자도 크게 놀랐다. 남자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얼굴에 실낱같은 희망이 어렸다.
“회, 회장님!”
“잠시만요. 나도 아직 방법 못 들었어요. 듣고 말해줄게요. 기다려 봐요. 오리나. 계속 말해봐.”
「폐쇄 모듈을 이용하면 치유가 가능할 수 있습니다.」
“……폐쇄 모듈?”
유지웅은 얼이 빠졌다. 아니, 그게 왜 여기서 튀어나와? 그건 결정체 연구설비이지 의학설비가 아니다. 근데 무슨 재주로 치료한다는 거야? 아무리 전문가가 아니어도 그건 알겠다.
「폐쇄 모듈은 입자 에너지 조절을 위해 내부에서 다양한 전자기파를 생성합니다. 그 중 CY선과 LT선을 이용하면 됩니다.」
“그게 뭔데?”
「이 두 광선은 어떤 매질에도 일절 영향을 끼치거나, 영향을 받지 않고 통과합니다. 납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두 선이 서로 중첩될 때, 중첩 부위에서 발생한 에너지가 해당 부위를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데?”
「개별 암세포에 일일이 CY선과 LT선이 중첩되도록 조사하면 정상 세포는 아무 영향을 주지 않고 암세포만 파괴할 수 있습니다. 체력 부담도 BP-1 항암제보다 훨씬 적습니다.」
“정말?”
유지웅은 기뻐하며 자신이 들은 것을 의료진과 남자에게도 설명해주었다. 남자의 얼굴에 어린 희망이 더욱 커졌다.
그러나 기초 원리를 들은 의료진은 쉽게 수긍하지 못했다.
“확실히 그런 원리라면 시도해볼 수 있겠습니다만, 문제는 현재 의학설비 기술 수준으로는 그렇게 극도로 정밀한 조준과 조사가 가능할지 의문입니다. 암세포가 몇 개인데, 어떻게 일일이 세포 하나하나를 파괴할 수 있을까요? 제가 공학 전문가는 아닙니다만, 그런 식으로 치료하려면 RPX-1 수퍼 컴퓨터보다 천 배 이상은 빠른 수퍼 컴퓨터를 동원해야 할 겁니다.”
“괜찮아요. 지금 저와 이야기한 놈이 그 수퍼 컴퓨터예요.”
“……예?”
의료진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유지웅은 눈길도 주지 않고 핸드폰을 꺼냈다. 신호음이 가지 않자 그는 투덜거렸다.
“최 소장님, 왜 전화 안 받아.”
============================ 작품 후기 ============================
양성자 치료기는 그렇게 구형품, 아니 골동품이 되었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