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04 그래도 강국 =========================================================================
“메인 탱커! 어그로 확보!”
“폭딜! 폭딜!”
“근접 딜러, 물러나요! 원거리 딜러진만 극딜!”
“힐러, 탱커에게 힐 집중요!”
휘황찬란한 섬광이 번쩍거렸다. 굉음이 울리고 바위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몰아치는 후폭풍이 거대한 먼지를 피워 올리며 땅을 뒤흔들었다.
그 중심에서 거대한 코뿔소가 괴로운 듯이 분노의 일갈을 터트리고 있었다. 코뿔소 괴수는 자신을 괴롭히는 탱커를 향해 앞굽을 있는 힘껏 내리 찍었다.
“크윽!”
충격이 장난 아니었다. 탱커는 입에서 피를 한 모금 뿜으며 최대한 버티려 애썼다. 방어장비를 입었음에도 온몸을 찢는 통증이 엄청났다.
‘역시 오백짜리는 달라.’
탱커는 이를 악물었다. 매번 25, 30짜리만 사냥하다가 500짜리를 사냥하려니 난이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한 방, 한 방에서 나오는 파괴력의 차원이 달랐다. 그나마 공격 패턴이 30짜리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본래 공격대는 40인을 넘지 않게 구성한다. 아군 딜러의 파괴력이 탱커에게도 튀게 되는데, 40인을 넘어가면 탱커가 아군의 딜을 버티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지금 공격대는 100인, 그것도 원거리 딜러를 중심으로 딜러진을 보강했다. 여기에 결정도 500짜리답게 파괴력도 30짜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탱커가 버틸 수 있는 건 그가 특출한 방어능력을 지녀서가 아니다. 바로 A급 방어장비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 지독하게 온몸이 아프긴 하지만 그래도 버틸 수 있는 수준은 된다.
“잡았다!”
“만세!”
마침내 쿵 하고 괴수가 쓰러졌다. 완전히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탱커는 숨을 헐떡이며 장비를 내려놓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비거를 완전 소모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신적인 피로도가 상당했다. 마음이 지쳐서인지 몸은 멀쩡한데도 호흡이 자꾸만 거칠어진다.
헐떡이면서 고개를 돌리니 결정체 취급업체에서 나온 사람들이 다가와서 조사를 했다. 이미 결정도 500으로 판명난 놈이지만 다시 한 번 결정도 스캔을 했다. 그들은 서로 끄덕이며 교신기로 운송팀을 불렀다.
곧 거대한 크레인이 달린 중장비 차량이 왔다. 결정체 업체 직원들은 괴수 사체를 대형 트럭에 실었다.
“대금은 원화로 드릴까요? 아니면 결정체권으로 드릴까요?”
“원화…… 아니, 결정체권으로 주세요.”
“알겠습니다.”
이게 현실이다. 미국 공격대가 미국 땅에서 사냥한 괴수의 대금을 원화 혹은 결정체권으로 지급한다. 더 이상 달러는 기축화폐가 아니다. 아직까지 세계적으로 많이 쓰이는 주요 화폐이긴 하지만, 레이드계에서는 원화나 결정체권을 선호한다.
결정체권은 세현저축은행이 발행하는 일종의 자기앞수표 같은 것이다.
크게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그린 결정체권이고 다른 하나는 블루 결정체권이다. 간단히 줄여서 그린 결정체권은 GCB(Green Crystal Bond), 블루 결정체권은 BCB(Blue Crystal Bond)라고 부른다.
1GCB는 그린 결정체 1의 가치를 뜻한다. 예를 들어 30GCB를 가져오면 그린 결정체 30짜리를 지급한다는 의미다. 이른바 세현저축은행이 택한 결정체본위제다. 혹자는 금본위제가 형태를 바꿔 부활한 것이라고도 한다.
물론 세현저축은행은 그린 결정체를 거의 보유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린 결정체 이상 가는 블루 결정체를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으며, 유지웅의 블루 결정체 획득 능력이 지급을 보증한다.
결정체본위제이면서도 신용화폐 성격이 반반 섞인, 다소 특이한 화폐라 볼 수 있다. 물론 법적으로는 화폐가 아닌 유가증권에 지나지 않지만, 세상사람 모두가 화폐로 본다.
“500GCB입니다. 확인해 보시죠.”
GCB와 BCB는 크게 1, 5, 10 세 종류가 있다. 블루 결정체의 경우 1BCB 화폐는 필요 없을 것 같지만, 가치 교환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일부러 1단위 CB도 만든 것이다.
“왜 이거 밖에 안 됩니까?”
“세금을 제한 액수입니다. 스팟 필드에서 획득하는 결정체는 일괄적으로 50%의 세금을 매기기로 결정되었거든요.”
“일괄적 50%면 너무 많은데…….”
“과세의 편의를 위해서이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얼마 전에 그에 관한 법안이 통과되었는데, 아직 못 들으신 모양이군요.”
레이더의 최고 소득세율은 50%지만, 100억을 벌었다고 해서 50억을 세금으로 내는 게 아니다. 장비를 구매하거나 지원분석팀을 고용하는데 들어가는 비용 등 필요 경비를 제외하고, 나머지 소득금액에서 구간에 따라 세분화된 세율을 매기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스팟 필드, 즉 서부 지역 사냥터에 관해서는 일괄적으로 50%를 과세하기로 결정했다. 그나마도 미국 시민에 한해서 50%다. 외국 국적 공격대는 일괄적으로 80%의 세금을 원천징수한다.
원래 그린 결정체 500짜리면 500GCB를 지급하는 게 수치상으로는 맞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결정체가 보통 두 배 이상으로 거래된다.
결정체 원석가가 그대로인 한국과는 다르다. 대신 한국은 유통이익에서 그만큼 추가 배분하기에, 한국 레이더나 미국 레이더나 실질적으로 차이는 없다.
때문에 미국 공격대가 결정도 500짜리를 스팟 필드에서 잡은 뒤, 세금 떼고 500GCB를 지급받는 게 맞다. 타국 공격대는 세금 떼고 100GCB를 지급받는다. 그리고 한국 공격대는?
“이야, 여기 진짜 좋다. 두당 떨어지는 것도 떨어지는 거지만 세금도 안 떼니까 진짜 짭짤하네.”
“근데 유지웅 공대장이 떼어 가지 않을까? 제니스 면세 특권은 일정 부분 떼어가잖아?”
“말 들어보니까 안 떼어 갈 모양이더라. 그 사람 입장에선 얼마 안 된다나?”
“하긴, 푼돈이나 탐내는 그런 사람은 아니지.”
머나먼 미국 땅, 스팟 필드로 온 한국 레이더들은 오랜만에 살판이 났다. 비과세도 좋지만, 미국이 한국 레이더를 위해 설정해준 50만 평방킬로미터를 독점할 수 있다는 점이 매우 컸다.
100인이 모여서 500짜리를 잡으면 두 당 5억이 떨어진다. 그것도 실수령 5억이다. 예전에는 두당 1억, 그것도 세금 떼고 나면 오천이 겨우 넘을까 말까 했다. 그나마도 옐로 몹이 전멸 상태라 거의 공치는 날이 많았다.
딜러들, 특히 원거리 딜러들은 만족했다. 그냥 만족도 아니고 매우 만족했다.
“앞으로 누가 감히 우리를 천민이라 부를텐가? 응?”
“우리도 이제 더 이상 천민이 아니라고!”
옐로 몹은 어그로 잡기가 쉽다. 결정도 500이라 해서 어그로 난이도가 크게 다르지는 않다. 탱커만 잘 버틸 수 있으면 30짜리와 별다를 바 없는데, 그 점은 방어장비로 충분히 커버된다.
예전에는 3탱 7힐 15딜러 체제로 운영하는 게 보편적이었다. 공격대 사정에 따라서 힐러나 탱커를 한 명 정도 빼기도 했다.
전체 딜러는 힐러보다 약 16배 정도 많은데(보조 힐러 포함), 공격대 TO는 2배 정도이니, 약 8명의 딜러가 놀게 되는 셈이었다. 옐로 몹이 극단적으로 감소하면서 힐러들도 레이드 참여 경쟁을 해야 했지만, 그래도 딜러의 참여 경쟁은 여전히 피가 말렸다.
단순 계산으로 옐로 몹 감소 시절에도, 딜러는 힐러보다 레이드 가기가 8배는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은…….
“이젠 사정이 다르다고, 암.”
“어디 귀족 소리 떵떵 쳐보시지?”
“힐러들 진짜 고소하다. 세금도 내고, TO도 줄어들고, 아주 고소해 죽겠네.”
스팟 필드에서는 100인 공격대가 대세다. 그런데 탱커와 힐러는 거의 변화가 없는데, 딜러의 비중만 대폭 늘었다. 내구도가 높은 괴수를 빨리 잡기 위해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힐러가 더 늘어난다고 달라질 건 없으니까.
지금 스팟 필드에서는 2탱커 6힐러, 그리고 92 딜러 체제가 바야흐로 스팟 필드의 대세로 자리 잡힌 상태다.
과거에는 힐러와 딜러가 1:8의 경쟁률이었다. 헌데 지금은 1:1까지 줄어들었다. 실로 엄청난 변화다.
더 이상 힐러는 딜러에 비해 경쟁력 있는 직종이 아니다. 공격대 TO를 놓고 벌어지는 비율은 이제 거의 동일하다. 동급 수준이 된 것이다.
“이만석 씨, 늦으시면 어떡합니까. 다들 제 시간에 왔는데 이만석 씨 한 분이 늦으시면 나머지 99명이 기다려야 하잖아요.”
“죄, 죄송합니다.”
“힐러라고 늦었다고 봐주는 거 이제 없어요. 잘 아시잖아요? 똑바로 합시다.”
“네, 정말 죄송합니다. 공대장님.”
가장 늦게 도착한 이만석 힐러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몇 몇 딜러들이 고소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예전 같으면 감히 눈도 못 마주쳤을 것들이 저리 쳐다보자, 이만석 힐러는 그만 속으로 울컥했다.
동료 힐러가 와서 조그맣게 달랬다.
“참아. 탱커진 심기 잘못 건드리면 좆된다.”
“아오, 씨발.”
“참으라니까.”
“무슨 세상이 이렇게 좆같이 변했냐? 그래도 한국에 있을 땐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딜러한테까지 이런 취급 받아야 하다니…….”
딜러와 힐러의 수요는 동일하다. 그러므로 힐러는 더 이상 딜러 앞에서 거들먹거릴 수 없다. 당연히 힐러를 위해 제한적으로 남아 있던 혜택도 모두 폐지되었다. 적어도 스팟 필드에서는 그렇게 변했다.
재미있게도 과거 평민 취급을 받았던 탱커가 신흥 귀족층으로 떠올랐다.
단순히 계산해서, 1명의 탱커가 놀면 3명의 힐러와 46명의 딜러가 놀아야 한다. 그러니 탱커를 신주단지 받들어 모시듯이 떠받을 수밖에 없다.
특히 탱커들은 힐러들에게 원한이 좀 많았다. 보통 딜러가 힐러한테 더 이를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 통상 공격대를 모으고 운영하는 것은 탱커지, 딜러가 아니니까.
딜러들은 입 다물고 구석에 조용히 찌그러져 있으면 그만이지만, 탱커들은 살랑거리면서 힐러들 비위를 맞춰야 한다. 말만 평민이지 레이드 TO 차지하기 편하다는 것 말고는 딜러보다 나을 게 없었다.
그랬던 탱커들이 살판이 났는데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뭐 만 하면 힐러들을 물고 늘어졌다.
“장규성 씨, 제대로 힐 안 하세요? 하마터면 저 죽을 뻔했잖아요.”
“죄, 죄송합니다.”
“힐량 체크 단단히 해서 분배 제한 한 번 걸어볼까요? 다들 목숨 걸고 돈 벌자고 하는 건데 이런 식이면 곤란해요. 지각도 자주 하시는 분이 레이드까지 왜 이러십니까. 너무 불성실하잖아요, 이건. 아니, 실력 문제인가요?”
“정말 미안합니다. 공대장님. 더 노력할게요.”
“쯧. 다음부터는 주의해주세요.”
원래 귀족의 억압에 가장 큰 불만을 품는 계층은 노예가 아니라 평민 계층이다. 그런 구도가 뒤집어졌는데 가만히 있을 성인군자는 없다. 탱커들은 틈만 나면 힐러들을 닦달하면서 못 살게 굴었다.
딜러들은 직접 힐러와 부딪치진 않았지만 그 모습을 보면서 고소하게 여겼다. 탱커들이 힐러를 갈구는 모습을 보면, 아주 그냥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이 속이 후련했다.
“그러게 잘 나갈 때 좀 잘하든가.”
“다 자업자득이지, 뭐.”
힐러가 귀족이라고?
적어도 스팟 필드에서는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탱커가 귀족이다.
============================ 작품 후기 ============================
하지만 유지웅이 나서면 어떨까?
유!
지!
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