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21 황제의 마실 =========================================================================
“으아아아아!”
리비아에서 칼을 갈고 복귀한 아슛카드함 혈맹이 연합을 무너뜨리고 본거지를 탈환했다는 소식에 바츠는 절규했다. 어떻게 몰아낸 녀석들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당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빌어먹을 놈들!”
바츠는 충혈 된 눈으로 증오를 뱉었다. 따지고 보면 책임은 연합 수뇌부들에게 있다. 이권 다툼에 눈이 멀어 타락한 그들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아슛카드함 혈맹은 연합 수뇌부를 모두 처형하고, 일반 연합원들은 갈게 찢어 혈맹원으로 흡수했습니다. 아슛카드함은 이제 단일 조직으로서는 아프리카 최대 규모가 됐습니다.”
“연합원들이 순순히 응했단 말인가?”
“다른 수가 없었겠지요. 혈맹원이 되면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도 한몫 했을 겁니다.”
바츠는 이를 악물었다. 말단 연합원들에게 비난을 날려서 무엇한단 말인가. 원죄는 그들을 올바르게 이끌지 못한, 타락한 수뇌부에게 있는데. 그리고 그 수뇌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자신에게 있는데.
“서둘러 내복단과 합류해야 합니다.”
이제는 이유가 달라졌다. 전에는 내복단을 연합에 끌어들이기 위해 본거지를 나왔지만, 이제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합류해야 했다. 내복단을 끌어들이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받아달라고 애걸을 해야 할 판이다.
그러나 내복단의 행적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간신히 찾아내고 보면 진짜 내복단이 아니라, 그들을 흉내 내는 일반 군소 공격대일 뿐이었다.
바츠는 그들을 설득해서 힘을 합쳤다. 다행히 아슛카드함을 한 번 몰아낸 적 있는 바츠의 명성은 아프리카 군소 공격대 사이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권 다툼에 눈이 먼 다른 수뇌부와 달리 마지막까지 연합의 목적을 잊지 않았다는 점에서, 바츠는 수많은 군소 공격대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내복단을 찾아 바츠는 끝없이 아프리카를 이동했다. 알제리에서 리비아로, 니제르로, 말리로, 모리타니로, 다시 알제리로. 그렇게 끝없는 여행과 싸움을 계속했다.
거대 혈맹들은 잠시 다툼을 멈추고, 자신들을 몰아내려고 봉기한 군소 공격대를 진압하기 위해 힘을 합쳤다. 그들의 가장 큰 표적은 내복단과 신(新) 바츠 연합이었다.
신 바츠 연합은 때론 습격을 당하기도 하고, 때론 몰래 기습을 하기도 하면서, 거대 혈맹과 기약 없는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외로운 싸움은 아니었다. 아프리카 전역에 흩어져 있는 군소 공격대들이 내복단과 신 바츠 연합에 감명 받아 함께 일어났기 때문이다.
강인한 힘, 알 수 없는 정체, 그리고 신출귀몰한 내복단.
두 주먹 하나만으로, 해방을 외치며 다시 한 번 일어선 신 바츠 연합.
대조적인 두 저항 세력의 구도는 거대 혈맹에 반감을 품은 군소 공격대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내복단과 신 바츠 연합이 합치면 혈맹 전부 무너뜨리는 것도 불가능할 것 같진 않은데.”
“그 날이 과연 오긴 올까?”
“언젠간 오겠지. 앗! 저기 신 바츠 연합이다! 드디어 찾았다!”
“우리를 받아줄까? 레이더도 아니고 그냥 일용직 노동자일 뿐인데…….”
“받아줄 거야. 혈맹에 반발하는 사람이라면 가리지 않고 누구나 받아주고 있잖아.”
신 바츠 연합은 군소 공격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혈맹에 저항하는 이들이라면 나이, 성별, 직업, 국적 등 어느 것도 가리지 않고 받아들였다. 무서운 속도로 증가하는 규모에 혈맹들은 예전보다 더욱 바짝 긴장했다.
내복단이라는 이름은 어느덧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오리지널 내복단을 따라, 그들과 같은 색의 옷을 입고 혈맹과 싸우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내복단이었다.
수많은 저항 세력들은 오리지널 내복단을 따로 구별하기 위해 차츰 그들을 ‘안티 블러드(줄여서 AB)’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내복단은 더 이상 안티 블러드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 자발적으로 봉기한 수많은 이들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근데 AB말인데, 보면 활동하는 패턴이 있지 않아?”
“그런 거 같아. 일주일은 열심히 활동하고, 또 일주일은 잠잠하네. 계속 반복이야.”
“AB도 사람인데 좀 쉬어야지. 보급도 받고 그래야 하잖아.”
“보급을 받아?”
“AB 정도면 지원 세력이 있지 않을까? 아냐, 어쩌면 외국 첩보 기관의 공작일지도 몰라.”
“그럴 리가. AB 전원이 같은 흑인인데.”
“못 들었어? AB 중에 동양인이 한 명 끼어 있대. 나도 처음에는 헛소문인 줄 알았는데, 목격자가 한두 명이 아니더라. 아무래도 사실 같아.”
* * *
유럽 국제변화분석위원회.
프랑스에 본부를 두고 있는 비공식적인 사설 조직이다. 일종의 NGO에 가깝지만 그 규모는 상상 이상이다. 100여 명이 넘는 국제 문제 전문가를 상시 두고 있으며, 사외 자문 위원도 수백여 명이 넘게 존재한다. 그 전부가 내로라하는 대학, 연구소의 교수와 학자들이다.
국제변화분석을 주업무로 하는 사회단체이지만, 실상은 제니스와 한국의 행보를 분석하는 일을 주로 하고 있는 곳이다.
왜냐하면 위원회의 가장 큰 후원자가 바로 유럽으로 피신해온 유대계열 자본가들이기 때문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대계 자본가들은 로스차일드 몰락 이후 대부분 그 힘을 잃었다. 더 이상 유대 자본가들은 석년만큼 강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나 부자는 망해도 삼년을 간다고, 유지웅의 눈을 피해 유럽으로 도망친 유대계 부호들은 남은 자산을 최대한 안정적으로 운용하며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다.
그들의 철칙은 간단했다. 절대 유지웅 눈에 띄지 말고, 그의 심기를 거슬리지 말 것이며, 지금의 태풍을 피해 안전하게 살아남자는 것이다.
많은 돈을 투자한 유럽 국제변화분석위원회도 바로 그런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유지웅의 행보를 분석하여 그의 칼날이 떨어질 것을 미리 피하기 위해서다.
최근 위원회의 핫 이슈는 스팟 필드를 둘러싼 갈등에 관련된 유지웅의 행보였다.
“유지웅 회장이 직접 아프리카를 통제하려고 나설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이상한 점은 왜 굳이 미국과 손을 잡으면서까지 민중의 봉기를 유도하는 건지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차라리 일부 거대 혈맹에 본보기를 보여주고 직속으로 삼으면 더 많은 이익을 얻어낼 수 있는데 말입니다.”
“저는 그 점은 회의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프리카는 미개한 지역입니다. 혈맹들은 제니스의 힘을 인정하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자기들을 어찌하지 못할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지웅 회장의 협박이 쉬이 먹히지 않을 겁니다.”
“아니지요. 아프리카 혈맹 전체를 상대로 협박하면 먹히지 않지만, 소수 거대 혈맹을 상대로 한 협박은 분명히 먹힙니다. 동시에 다른 혈맹과는 차별화된 대우를 약속하면, 대상 혈맹은 분명히 유지웅 회장과 손을 잡을 겁니다.”
“그렇지만…….”
유럽에서 2번째로 거대한 통신업체를 경영하는 유대인, 로암 필츠버그는 분석 회의에 직접 참석하여 전문가들의 토론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있었다.
유지웅의 눈을 피해 살아남기 위해 만든 위원회이자,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토론이다 보니, 그는 조금도 정신을 팔지 않고 토론에 집중했다.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어떤 점에서요?”
“분명 이익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유지웅 회장은 거대 혈맹 몇 개만 복속하면 끝입니다. 그러나 유지웅 회장은 물질적인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무슨 뜻인가?”
로암 필츠버그는 저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원래는 토론에 개입하지 않고 경청만 하는 쪽인데,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지금까지의 행보를 보면 유지웅 회장은 명예를 가장 큰 이익으로 여기고, 그에 부수적으로 물질적인 이익이 따르는 정치적 결정을 해왔습니다.”
“음.”
로암 필츠버그는 인정한다는 듯이 끄덕였다. 듣고 보니 확실히 그랬다. 유지웅은 항상 돈보다는 올바른 정의 질서를 위한 결정을 선택했다. 신기하게도 그의 결정에는 정의를 구현했다는 칭송 외에 무시무시한 부가 부수적으로 따라붙곤 했다.
“그렇다고 유지웅 회장이 이익보다 명예를 더 중요시한다고 보진 않습니다.”
“그렇지.”
“유지웅 회장은 이익이 따르는 명예를 추구한다고 보는 게 가장 합리적일 것입니다.”
“옳은 판단이야.”
로암은 가볍게 감탄했다. 이렇게 간단하게 유지웅의 정체성을 정의할 수 있을 줄이야. 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눈앞의 젊은 학자를 바라봤다.
“그에 따라 그의 행보를 분석해본 결과, 그는 민중 봉기를 자극하여 아프리카 전역의 해방을 이뤄낼 것입니다. 부정부패가 아예 싹도 트지 못하도록 토질 그 자체를 뒤집어버리겠죠. 그리고 해방의 주인공이자 영웅으로서 자신을 드러낼 것이 분명합니다.”
“그 후 민중의 열광과 지지를 얻고, 합법적으로 스팟 필드의 이권을 챙긴다?”
“그렇습니다.”
로암은 재빠르게 생각했다. 일부 혈맹을 복속시키는 것보다 단기 이익은 적지만, 장기적으로는 더 많은 이익을 가져갈 수 있는 방법이다. 더군다나 민중의 칭찬까지 한 몸에 받으면서.
그는 과연 유지웅답게 교활하고 야비한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 * *
일성그룹 전략기획본부.
“……이상입니다. 따라서 그에 따라 우리 일성그룹의 행보를 맞출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나도 그리 생각하네. 유지웅 회장은 언제나 명예와 이익을 함께 추구해왔지.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거야.”
어느덧 회의를 끝낼 시간이 되었다. 나름대로 유지웅의 행보에 관한 결론을 내렸고, 그룹의 방향성도 어느 정도 정해졌다.
회의 주관자, 황 실장은 마지막으로 참석자들을 둘러보며 질문을 던졌다.
“또 다른 의견은 없나? 아무 거나 좋네.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정말 실없다는 것도 상관없네. 무엇이든 좋으니 말해보게.”
“…….”
“…….”
“그럼 이것으로 오늘 회의는…….”
“저어…….”
“말해보게.”
“내복단, 아니 안티 블러드가 일주일만 활약하고 일주일은 잠잠하다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황 실장은 눈을 빛내며 발언자를 재촉했다.
“계속하게.”
“제가 따로 조사를 해봤는데 A3가 일주일에 한 번씩 김포 공항을 떠났다가 돌아온다고 합니다. 이상하게 시기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습니까?”
“흠.”
“최근에 유지웅 회장을 목격했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아이템 경매에서 현찰 2억 원을 지르고 아이템을 얻었다고 하더군요. 분명히 유지웅 회장이 틀림없습니다. 그 분의 것으로 추정되는 후보 계정 중의 하나였고요.”
“일주일 동안 잠잠한 건, 설마 쉬려고 한국에 와서라고?”
발언자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감이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았다. 황 실장은 좋지 않은 예감에 손끝이 촉촉하게 젖어오기 시작했다.
발언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계속했다.
“스팟 필드 조성으로 가장 큰 이권을 합법적이고 떳떳하게 손에 넣기 위해 아프리카를 해방하려고 한다는 가설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만……. 저는 유지웅 회장의 냉혹함과 게임을 즐기는 점에서 이상하게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계속 하게.”
“어쩌면, 유지웅 회장은 지금 아프리카라는 무대를 통해 거대한 실제 정치 및 전투 시뮬레이션 게임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한참 후 황 실장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에게는 이 모든 것이 게임이다?”
“…….”
“엄청난 수의 사람이 싸우고, 또 그만큼 죽어나가는 이 모든 것이 게임?”
황 실장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순식간에 고요한 침묵이 회의장에 내려앉았다.
곧바로 반박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 사실은 유지웅의 냉혹함을 모두가 인지한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그의 결정 때문에 죽어나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나.
매스컴에서 말하는 대로 유지웅을 어진 성인이라고 믿는 이는, 적어도 이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만약 그 가설이 사실이라면, 스팟 필드라는 카드를 아프리카에 제시한 것부터가 게임 무대를 마련하기 위한 장치였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게임이었다고?”
“그러고도 남을 분이십니다.”
황 실장은 저도 모르게 회의실 내부를 둘러봤다. 방청 장치는 확실하게 했지만, 혹시라도 누가 도청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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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도중에 순간 저도 그렇게 믿을 뻔함.
너무 그럴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