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41 공허의 습격 =========================================================================
―내 진짜 이름은 니트로 체임버 주니어가 아니야. 니트로 체임버지.
―나중에 찾아 봐. MIT 핵물리학과 니트로 체임버 교수가 어떤 사람인지. 그게 빨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거야.
―우린 나이 차이가 너무 많아서 안 돼.
손에 힘이 풀리던 그 순간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했다.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난 정혜주는 온몸이 땀에 젖은 채 숨을 헐떡였다. 창밖을 보니 아직 한밤중이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뺨을 감쌌다. 몸을 웅크리듯이 앞으로 숙인 채 그러다가 이불을 뻥 하고 걷어찼다. 위로 솟구친 이불이 펄럭이며 땅에 떨어졌다.
“아아아! 아아아아! 쪽팔려!”
눈물 작전이면 그 앙큼한 어린 놈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겠거니 했다. 지도 남자니까 눈물 좀 흘려주면 넘어올 수밖에 없겠다고 여겼다.
그래서 벌을 받는 모양이다. 매일 밤 그 순간의 쪽팔림이 악몽으로 나타나는 걸 보면.
“아아! 아아아!”
미칠 듯한 부끄러움이 마치 부스럼처럼 온몸을 뒤덮는다. 잠에서 일어날 때면 이불을 지붕까지 하이킥 날리는 건 예사다. 한 번은 언니가 악몽 꿨냐고 놀라서 묻는데, 창피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창피할 수밖에 없지. 그간 니트로한테 날린 멘트가 있는데.
―그래요. 나, 나이 많아요.
―칠 년이나 먼저 태어나서 미안해요. 근데 그건 내 잘못이 아니잖아? 안 그래?
―내가 너 어리다구 좋아한 줄 아니? 웃기지 마. 나도 나 좋다는 어린애들 엄청 널렸거든? 나 좋다는 동갑들, 오빠들 엄청 많거든? 근데 내가 왜 너 좋아하는 줄 알아? 응?
―그냥 니가 좋아서 좋은 거야. 아, 뭐야. 말이 진짜 이상해지는데, 그냥 니가 좋으니까 좋은 거라고. 근데 뭐? 나이가 너무 많아서 싫다고? 그래, 미안하다. 칠 년이나 일찍 태어나서 미안하다. 내 탓도 아닌데 좀 봐주면 안 돼?
“아아악! 딱 여기까지만 할 걸!
―칠 년 일찍 태어났으니까 십 년 더 어려질게. 팩도 매일 하구 동안 마사지도 꾸준히 받을게. 미백도 하고 스킨 케어도 안 빼먹고 할게. 트리플토닝도 받구 영양 공급 마사지도 할 거야. IPL도 하고 스킨 필링이랑 리프팅도 할게…….
―그래도 안 돼? 내가 이만큼 노력하겠다는 데도? 너 진짜 못 됐다. 늦게 태어난 게 그리 잘났니? 어리다고 지금 유세 떠는 거야?
팡! 팡! 팡! 팡!
“아아아아! 진짜 내가 저 말을 왜 했지? 미쳤어! 미쳤어, 정말!”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것도 정도껏이지, 116세나 드신 할아버지 앞에서 ‘늦게 태어난 게 그리 잘났니 어리다고 지금 유세 떠는 거니’를 해댔으니,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다가 거침없이 이불킥으로 눈을 뜨는 것은 당연지사다.
정혜주는 뺨에서 손을 떼고 머리를 북북 긁어댔다. 머리카락이 형편없이 흐트러졌지만 이렇게도 안 하면 쪽팔림을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휴우…….”
겨우 숨을 고른 정혜주는 멍한 눈빛으로 천장을 바라봤다. 어두운 천장에 그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 건방진 미소를 삐딱하게 물고 있는 잘생긴 얼굴, 하얀 가운을 걸친 비행 청소년 같은 그 아슬아슬한 자태가 지워도, 지워도 떠오른다.
“미쳤나 봐, 나…….”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 그의 진짜 나이, 진짜 정체를 알았는데도 왜 미련을 떨칠 수가 없는지 몰랐다.
“엄마, 아빠가 싫어하실 텐데…….”
문득 그렇게 뇌까렸다가 깜짝 놀랐다. 세상에, 아직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단 말이야? 미쳤어, 미쳤어! 정혜주!
“나이가 뭐 어때서? 나이는 숫자일 뿐이잖아?”
누군가를 설득하듯이 그녀는 열심히 중얼거렸다.
결론은 이미 오래 전에 나 있었다. 그 결론을 확신하는데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정혜주는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 정리했다.
그녀는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전화번호부 즐겨찾기 탭을 열었다. 가장 위에 있는 이름을 꾹 눌렀다.
「울애기♡」
* * *
「지금 보고 싶어요.」
“……왜죠.”
「나 할 말 있어요. 지금 봐요.」
“……알겠습니다. 제가 그쪽으로 가죠.”
「그러실 필요 없어요. 지금 학교죠? 제가 학교로 갈게요.」
“시간이 늦었습니다. 제가…….”
「지금 갈게요.」
그리고 뚝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니트로는 끊어진 전화기를 들고 잠시 멍하니 있었다. 쓴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나도 참 주책이군.’
하필 그녀가 딱 생각나는 순간에 전화가 걸려왔다. 이런 우연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게 우스웠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었다. 그리고 거울을 봤다. 자신이 지금 어떤 표정으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지 궁금했다.
거울 속의 자신은 삐딱한 표정이 어울리는 소년이었다. 하얀 수염도, 거친 주름도 없었다. 세월의 야박함 따위는 전혀 모르는 아이였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은 그렇지 않다. 정혜주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시간을 살아왔다. 그녀의 부모조차 자신 앞에서는 손주뻘이지 않은가.
‘이게 맞다.’
이미 정한 마음을 그렇게 다잡으며, 그는 문을 열었다.
* * *
“참 인연이 이렇게도 이어지네요.”
레지나의 말에 최윤은 쓴웃음을 지었다.
유지웅은 니트로의 정체를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둘은 니트로가 이미 사망한 MIT 핵물리학 교수의 손자라고만 알고 있었다.
설마 죽은 니트로가 휘버와 동문이었을 줄이야. 그리고 그 손자가 유지웅 밑에서 일하고 있다니. 전혀 몰랐던 사실에 최윤은 세상이 참 좁다고 여겼다.
“당신은 몰랐어요? 두 분이 동문이었다는 걸?”
“대강은 알고 있었지만…… 전 니트로 박사님을 한 번도 뵌 적이 없어요. 그래서 잊고 있었어요.”
“그러고 보니 나도 기억이 나요. 두 분이 프랭클린 박사 밑에서 수학했다는 기사를 봤어요. 그런데 함께 뭔가를 한 행보는 본 기억이 전혀 없네요.”
“저도요.”
니트로와 휘버는 약 70여 년 전, 균열 개방을 목적으로 한 중수소 융합 실험을 마지막으로 갈라섰다. 레지나와 최윤이 그렇게 알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건 두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었으니까.
“레마시아 연구소였다니…….”
“그러게요. 전혀 생각도 못했어요.”
레마시아 연구소는 폭탄 테러로 오래 전에 붕괴했다. 해당 지역은 결정체 오염으로 폐허가 되어 수십 년 간 출입금지 구역으로 남아 있었다.
물론 폭탄 테러는 일반에 공개된 위장일 뿐, 실제로는 군수자본가의 사주를 받은 CIA 수뇌부가 휘버를 협박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고였다.
“할아버지는 균열을 지하에 만드신 후 그 위에 레마시아 연구소를 세우신 거군요.”
“그럴 가능성이 높아요. 고 니트로 박사님께서 실험에 직접 참가하셨으니, 아마 사실일 거예요.”
“니트로 교수가 그 분의 일기장을 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던 게 다행이네요.”
“천운이었죠.”
둘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니트로의 정체를 밝힐 수 없는 터라 유지웅이 그렇게 둘러댔기 때문이다. 니트로 박사의 손자인 니트로 주니어가 할아버지의 유품을 간직하고 있었고, 거기에 실험에 참가했던 내용이 적혀 있었다고.
“균열이 정말 레마시아 연구소 지하에 있다면…….”
“막아야겠죠.”
“가능할까요?”
레지나가 불안한 듯이 물었다. 최윤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쓰디쓴 미소가 조용히 입가에 떠올랐다.
“알 수 없어요. 그래도 막아야죠.”
“…….”
“막지 않으면 인류는 희망이 없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균열은 계속해서 커지고 있어요.”
레지나는 묵묵히 그의 눈을 바라봤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가…… 만약 균열을 만들지 않았으면 이 모든 불행도 없었겠죠?”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그 분은 단지 인류를 위해서 그랬을 뿐이잖아요. 나쁜 건 그 분을 이용하려고 한 CIA 같은 자들이에요.”
“하지만 균열이 지구에 위험을 불러오는 건 맞잖아요.”
“막으면 돼요. 나, 아니 우리가.”
최윤은 레지나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가느다란 그녀의 손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최윤은 손에 굳게 힘을 주었다.
* * *
“뭐라 불러야 돼죠? 교수님? 아니면, 할아버지?”
“…….”
니트로의 표정이 가볍게 굳어졌다. 정혜주는 그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수척한 표정과 어울리지 않는 밝은 미소였다.
“그래도 할아버지 소리 듣기는 싫은가 보네요. 이거 그린라이트인가요?”
“그린라이트? 그게 뭐죠?”
“모르는 거 보니 할아버지 맞네요.”
“…….”
니트로는 이마를 가볍게 구겼다. 무언가 잔뜩 진지한 공기를 기대하고 나왔는데, 그녀는 시작부터 엇박자를 놓고 있었다.
그녀는 빈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 니트로는 자신의 잔도 비었음을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보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그세 커피가 비었다.
“나 어떻게 생각해요?”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는 나이 차이가…….”
“어차피 아는 사람 아무도 없잖아. 그게 무슨 상관인데?”
그녀는 대뜸 반말을 했다. 니트로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자기 나이를 다 알고 있으면서도 하는 반말이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이런 자신이 어색했다.
그녀가 똑바로 주시하고 있었다. 커다란 눈망울은 금방이라도 울음기가 맺힐 것만 같다.
“나 어떻게 생각하냐고.”
“…….”
“나이, 숫자, 생년월일, 그런 거 일절 생각하지 말고, 그냥 순수하게 나란 여자 어떻게 생각하냐고. 내가 지금 그거 묻고 있잖아.”
니트로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 침묵이 그녀에게는 어떤 대답이었나 보다. 그녀는 한결 마음이 편안한 듯 작은 웃음을 지었다.
“미국 간다면서요?”
“어떻게 알았습니까?”
“언니한테 들었어요. 중요한 일 때문에 미국 가셔야 되니까 심란하게 만들지 말라고. 나 때문에 심란해요?”
“…….”
정혜주는 만지작거리던 빈 잔을 내려놓았다. 칠흑 같은 두 눈동자가 빤히 바라본다.
“심란하긴 한가 보네요. 이것도 그린라이트 맞죠?”
“정 이사님. 저는…….”
“무슨 말 하려는지 알아요. 하지만 지금 안 들을래요. 오늘은 나 하고 싶은 말만 할 거야. 그러니 듣기만 해요.”
“…….”
“저 결심했어요. 되게 큰 결심이에요. 나도 이 결심하는데 엄청 힘들었어요. 그러니까 교수님도 진지하게 들어줘요. 그게 당신을 좋아했던 여자에 대한 배려예요.”
무슨 말을 꺼내려는지, 정혜주는 그러고도 한참이나 망설였다. 니트로는 조용히 기다렸다.
“나이, 과거 다 버려요. 모든 거 다 내려놓고 열여섯으로 평생 살아요. 몽땅 다 영영 비밀로 해요. 난 그거 하나면 돼요.”
그녀가 손을 잡아왔다. 니트로는 손등에 닿는 보드라운 감촉을 말없이 느꼈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이제부터 내가 누나 할게. 죽을 때까지 평생.”
니트로는 말문이 막혔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이건 그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가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손가락을 세워 입술을 막았다.
“대답은 다녀와서 해줘. 알았지?”
“…….”
“누나, 기다릴 수 있어.”
============================ 작품 후기 ============================
악어의 눈물에 속지 마, 니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