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42 공허의 습격 =========================================================================
그녀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이상했다. 어째서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것일까.
촉촉하고 말랑말랑한 감촉이 입술을 덮었다. 그녀의 입술은 얼음사탕 같은 맛이 났다. 차갑지 않고 따뜻한, 그런 이상한 얼음사탕 같은.
짧은 입맞춤을 마치고 그녀가 얼굴을 뗄 때까지, 니트로는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이럴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그는 전혀 몰랐다. 어느 과학 서적에도 그런 것은 적혀 있지 않았으니까.
한참이 지났다. 그 동안에도 정혜주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니트로는 그제야 그녀가 자신에게 키스했음을 깨닫고 얼굴이 확 붉어졌다.
“정 이사님. 저는…….”
“기다릴게.”
“저는…….”
“네가 과거 이름 다 버리고, 지금 그 모습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게.”
또다시 말문이 막힌다.
자신을 향한 그녀의 마음이 이 정도로 절절할 줄 몰랐다.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화상을 입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두려웠다. 그녀의 마음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표백제로 머릿속에 담긴 모든 것을 씻어내 버린 듯한 기분이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니트로는 갑자기 그녀의 손을 덥석 쥐었다. 그녀가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상관없습니까?”
“없다니까.”
“나는 당신…… 아니, 당신의 부모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데도요?”
“무슨 말을 하는 건데? 너, 열여섯이잖아. 어린 나이에 MIT 교수까지 된 천재 꼬맹이잖아.”
니트로는 크게 심호흡했다. 그녀의 거듭된 부정이 가진 의사는 확고하다.
자신이 과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신분으로 영원히 살아줄 것을 원한다. 116세의 니트로 체임버 교수를 완전히 죽여 버리고, 니트로 체임버 주니어로서 살아가기를 바란다. 철저하게 열여섯의 천재 소년으로 남은 인생을 수놓기를 요구하고 있다.
“정 이사님. 제 대답은…….”
“미국 다녀와서.”
“……알겠습니다.”
대답은 지금 막 정해졌다. 그리고 그녀가 가장 바라던 대답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녀도 벌써 알아차리고 있지 않을까. 눈치가 빠른 여자이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지금 당장 듣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를 짐작하기에 아직 니트로는 모든 게 서툴렀다.
“대답은 다녀와서 하겠습니다.”
* * *
유지웅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방미 일정을 잡았지만 어떻게 된 건지 매스컴에 소문이 나오고 말았다. 덕분에 A3가 착륙하기로 되어 있는 공항에는 CNN 등 대형 매스컴에서 나온 기자들로 바글거리고 있었다. 발 디딜 틈조차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대체 어디서 샌 거야?”
유지웅은 화면에 비친 공항 풍경을 보고 투덜거렸다. 정말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려 있었다. 취재진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얼굴 한 번 보겠답시고 몰려 나와 있었다.
“진짜 지겹네, 이놈의 인기.”
자뻑에 취한 신랑의 모습을 보며 정효주는 가볍게 피식거렸다. 비행 내내 안고 있던 긴장감이 적당히 풀어졌다.
“한가하게 싸인회나 하고 있을 시간 없는데, 어쩌지? 잠깐 나서서 얼굴이라도 비쳐 줄까?”
“글쎄.”
“저 많은 사람들 싸인 해주려면 내 팔이 남아나지 않겠네. 안 그래도 요즘 펜글씨 쓰는 거 힘들어 죽겠는데.”
정효주는 또다시 피식거렸다.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신랑이 일부러 쾌활하게 이야기하는 게 눈에 보였다.
이번 미국행은 휴양이 아니다. 스팟 필드의 위험 가능성을 제거하고, 나아가 균열을 저지하기 위해서다.
심지어 균열의 존재, 균열이 가진 위험성을 아는 이는 한 손으로 꼽을 정도다. 미국 정부도 균열은 전혀 알지 못한다.
지구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위험을 오로지 자신들만 알고 있다. 그 짐을 짊어질 수 있는 것도 자신들뿐이다. 유지웅은 혹시라도 그런 부담감에 그녀가 짓눌릴까 봐 애써 풀어주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 마음이 고마워서 그녀는 가만히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가 조용히 손을 잡아왔다.
“너무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그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위로한다. 그 밝은 태도에 담긴 마음이 참 갸륵했다. 그래서 물어봤다.
“자기는 전혀 겁 안 나나 봐?”
“뭐가 겁나야 하는데? 너, 혹시 겁나?”
“최 박사님이 그랬잖아. 균열이 커지는 걸 못 막으면 지구가 엉망이 될 수 있다고. 우리가 그걸 막아야 하는데 자기는 진짜 겁이 하나도 안 나?”
“그럼 안 나지. 왜 겁이 나는데?”
“정말로? 진짜 겁 하나도 안 나?”
“…….”
진지한 척 목소리를 깔고 추궁하자 유지웅은 말문이 막혔는지 머뭇거렸다. 그런 모습이 귀엽고, 또 재미있어서 정효주는 계속 진지한 체 하며 물었다.
“겁나지? 겁나잖아? 그치?”
“아……. 사실 겁 쪼금 나긴 해.”
“그럼 안 하면 안 돼? 꼭 우리가 막아야 돼?”
“……너, 갑자기 왜 그래?”
“그렇잖아. 우리가 막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구, 위험한 일에 뭐 하러 나서. 이제 우리 길러야 할 애도 셋이나 되고 밑에 딸린 부하 직원들도 많은데.”
유지웅은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그녀는 진지한 척 눈빛을 무겁게 하고 마주 보았다. 한참 후 그가 무릎을 가볍게 치며 말했다.
“알겠다! 너 지금 나 떠보는 거지?”
“……어?”
정효주는 순간 당황했다. 이상하다? 표정 관리는 완벽했을 텐데? 어떻게 알았지?
“그럼 못 써. 남편 떠보기나 하고 말이야.”
“아, 아닌데? 안 떠봤거든?”
“에이, 떠본 거 맞잖아? 내가 너랑 산 게 몇 년인데 그런 것도 못 알아볼까 봐?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는 눈빛만 봐도 딱 알 수 있거든?”
착각도 이 정도면 병이다. 정효주는 무슨 표정을 지으면 좋을지 당황스러웠다. 이걸 좋아해야 해, 말아야 해? 맞장구를 쳐야 해, 찬물을 끼얹어야 해?
유지웅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후후, 넌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는 척 보면 딱이거든? 그러니까 앞으로는 나 떠볼 생각은 꿈에도 꾸지 마. 알았지?”
“…….”
정효주는 입을 다물었다. 역시 이런 분위기에서는 져주는 게 이기는 거겠지?
그가 다정하게 두 손을 잡았다. 그의 체온에서 굳은 신뢰와 애정이 느껴졌다. 그 포근한 느낌이 좋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효주야, 우리가 옛날에 약속한 거 기억해?”
“어떤 약속?”
“우리가 돈 아무리 많이 벌고 잘 나가더라도, 아이들 앞에서 부끄러운 부모는 되지 말자고. 아이들 앞에서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부모가 되고,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보여주자고 한 거.”
“그럼. 기억하지.”
어떻게 그 약속을 잊을 수 있을까. 반은 장난스럽게, 반은 진지하게 한 약속이었지만, 두 사람이 마음을 나누면서 정한 인생의 조타수였다.
“그래서 난 겁이 별로 안 나. 균열이 위험한 게 뭐 어때서? 이게 다 우리 아이들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세상 물려주려고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난 하나도 겁 안 나.”
“피. 아까는 겁 조금 난다고 했으면서.”
“겁 쪼금 나긴 하는데 겁 하나도 안 나.”
“그게 뭐야. 말이 안 되잖아.”
“말이 좀 안 되면 어때. 다 그렇게 사는 거야.”
유지웅은 킬킬거리면서 웃었다. 장난스러운 태도가 그녀의 눈에는 참 듬직하게 보였다. 알고 있다. 그가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어떤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사실 나도 그래.”
“뭐가?”
“자기랑 같아.”
작고 여린 손이 그의 가슴팍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애정이 듬뿍 녹아 있는 손길이다. 그런 쓰다듦이 기분 좋아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우리가 안 하면 우리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없어질 수도 있잖아. 나도 그거 싫어. 자기처럼.”
“응.”
지금까지 둘은 숱한 위험을 넘어 왔다. 돌이켜 보면 죽을 뻔한 위기를 한두 번 겪은 게 아니었다. 화이트 몹 레이드, 블랙 몹 레이드, 레드 몹 레이드……. 그리고 이제는 까마득한 옛날, 처음으로 레이드에 참여했던 그 날까지.
“자기, 기억나? 처음 레이드 갔을 때 자기가 황금매 눈을 치는 바람에 죽을 뻔한 거.”
“야……. 그 이야기는 왜 하고 그래. 진짜 지워버리고 싶은 흑역사인데.”
“히히, 창피하긴 한가 보구나?”
“말하지 마. 내 앞에서 황금매 이야기는 금기인 거 몰라?”
“왜애. 그래도 그 황금매 덕분에 지금 우리가 있는 건데.”
“아무튼 난 싫어! 쪽팔리니까 그 이야기는 앞으로 절대로 꺼내지 마. 알았지?”
딜러로 참가한 레이드 초행 시절, 유지웅은 황금매 괴수의 눈을 치는 바람에 공격대를 전멸 위기에 몰아넣었다. 뭐 그 덕분에 새로운 능력을 각성했고, 지금에 이를 수 있었으니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할까.
그렇다 해도 레이드의 기본 중의 기본인 ‘괴수의 눈을 치지 말 것.’을 지키지 못한 셈이니, 지금도 자다가 그 생각만 나면 이불을 천장까지 하이킥하곤 한다.
그 일을 가지고 한참을 킥킥거리며 장난을 치고 있는데 드디어 전용기가 공항에 착륙했다. 기내 창문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게 보였다.
유지웅은 그녀의 어깨를 안고 속삭였다.
“이번에도 잘 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말자.”
“응.”
젊은 나이에 또 다시 위험한 일을 떠맡게 되었다. 하지만 유지웅은 단순하게 생각했다.
어차피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해낼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아무도 하지 않으면 모두가 죽거나 위험해진다. 사랑하는 아이와 아내, 그리고 부모님과 친구들. 그리고 자기 자신도 그 안에 포함된다.
그러니 자신이 해야 하는 게 합리적이다. 그는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했다. 겁이 나고 불안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별개로 다뤄야 할 이야기다.
‘뭐…… 균열 덕분에 잘 먹고 잘 살고 있으니까 균열 때문에 생긴 위험도 막아줘야지. 이런 게 노블리스 오블리제 아니겠어?’
유지웅은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리했다.
둘이 전용기를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취재 인파가 밀려들었다.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지며, 백인과 흑인 기자들이 한국어로 질문을 해댔다.
“이번 비공식 방미 일정이 실은 미국이 매우 커다란 위험에 처해서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스팟 필드에 문제가 생겼다고 하던데요, 이게 사실입니까?”
“한 말씀만 해주세요!”
거인의 행보에는 수많은 시선이 따라붙게 된다. 유지웅이 남몰래, 그것도 레이드 전력을 갖추고 입국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수많은 미국 시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었다. 미국에 매우 위험한 괴수가 출현한 게 아니고서야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지웅은 취재 인파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지고 있었다. 그는 목청을 가다듬고 말했다. 불안에 떨고 있는 군중을 안심시켜주는 것도 사회주도층의 고귀한 책무겠지?
“제가 조용히 미국을 방문한 것은 드라마 ‘더 제니스’ 시즌4 1화 까메오 출현을 부탁받았기 때문입니다.”
“네? 뭐라고요?”
“원래는 본편 방영 때 깜짝 놀라게 해드리려고 했지만, 강력한 괴수가 등장한 것 아닌가 하고 수많은 미국 시민 여러분께서 불안해하고 계셔서 부득이하게 밝히게 되었습니다.”
============================ 작품 후기 ============================
-저, 드라마 총감독인데요. 저는 까메오 출현을 부탁드린 적이 없...
"이왕 이리 된 거 제니스 공격대 전원 까메오 출현이다! 열외는 없다! 브라우니 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