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76 %3C프리시즌 딜러편%3E 내가 천민? =========================================================================
“예?”
김기영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한눈에 보기에도 유지웅은 몹시 화가 난 듯이 보였다. 마치 세상에서 다시없는 치욕을 당한 사람처럼, 목 아래까지 힘줄이 돋아 있었다.
“아니, 그렇잖아요?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하면서 그렇게 당당하실 수 있는 거죠?”
“마, 말도 안 되는 제안이라니요…….”
“김기영 팀장님이라고 하셨죠? 연봉 10원 줄 테니 같이 일하자고 누가 진지하게 권유하면 어떤 기분일 것 같습니까?”
“…….”
“제가 지금 딱 그 심정입니다.”
김기영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이런 청년이었나? 그는 임원들이 완전히 잘못 짚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자신은 일개 팀장에 불과할 뿐이다. 접대에 있어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는 정중히 말했다.
“저는 별달리 큰 권한이 없습니다. 원하시는 조건을 말씀해 주십시오. 상부에 보고하고 최대한 결재를 받는 쪽으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이미 말하지 않았습니까?”
“설마 그럼 그게 진심이셨습니까?”
정말로 일성그룹에 하청을 준다는 마음가짐이었나? 하청을 따내고 싶으면 사업 제안서를 올리고 승인을 받으라고? 진심으로 일성을 그리 취급할 작정이었단 말인가?
“그럼 사업 이야기를 가지고 농담이나 하는 줄 아셨습니까? 저를 그렇게 보신 거군요.”
날이 서 있는 서늘한 말에 김기영은 찬물을 끼얹은 듯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명백한 실수였다. 거래 상대의 기분을 거슬리게 하다니.
“죄송합니다. 결코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부디 오해를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김기영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일성의 이름을 등에 업고 있다지만 자신은 회사측에서 보면 자그마한 부품에 불과하다. 어떻게든 유지웅과 제휴를 맺고 싶어하는 회사 입장에서는 큰 사업을 망친 부품을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다. 빼내고, 그 자리에는 다른 부품을 집어넣겠지.
‘휴우……. 그래, 내가 누군지 몰라서 저럴 수 있어. 이번은 내가 참자.’
유지웅은 크게 심호흡했다. 갑자기 김기영이 불쌍해 보였다.
그라고 뭘 알겠는가. 그냥 회사에서 시키니까 시킨 대로 할 뿐이지. 사업 제안서는 말도 안 되는 내용으로 점철돼 있지만 그것은 김기영의 뜻이 아니라 회사의 뜻이다. 그것을 가지고 이 사람에게 화를 내고, 이 사람 밥줄이 끊어지면 또 못할 짓이다. 이 사람 집에서는 이 사람만을 바라보고 사는 가족들이 있을 텐데.
“사업 제안서는 꼼꼼히 잘 봤습니다. 저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가서 그렇게 전하세요.”
차분히 가라앉은 어조였다. 갑자기 확 바뀐 분위기에 김기영은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는 차갑긴 하지만 더 이상 분노를 머금지 않고 있었다.
그 서늘한 눈빛에서 김기영은 깨달았다. 눈앞의 청년은 결코 일확천금으로 마음이 들떠 있는 애송이가 아니다. 자신의 가치를 분명하고, 그리고 냉정하게 재고 있는 사업가였다.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제야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것들이 보였다.
‘젠장……. 망할 노친네들.’
그는 속으로 임원들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리고 눈먼 자기 자신에게도 욕을 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현재 인류는 레드 몹의 상업용 레이드가 불가능하다. 레드 몹을 잡는 경우는 거주 구역이 침범당해 어쩔 수 없이 격퇴해야 하는 경우뿐이다.
그런데 레드 몹을 손쉽고 안전하게, 그것도 혼자서 한 방에 잡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전 세계에서 딱 한 명뿐이다.
김기영은 생각해보았다. 만약 자신이 유지웅과 같은 능력을 가졌다면, 이런 사업 제안을 받아들고 무슨 생각을 할까?
‘다 뒤집어버릴지도.’
회사 입장이 아닌 유지웅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니까 비로소 이 상황이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래서 역지사지가 중요하다고 했나 보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제가 너무 회사의 입장에서만 생각을 했습니다. 저도 아무래도 회사에 매여 있는 몸이다 보니까 그리 되더군요.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뭐, 알았다니 됐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상부에는 곡해 없이 최대한 사실 그대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일성그룹이 선생님과 함께 일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진심이니, 한 번의 착오 가지고 너무 가능성을 닫지는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김기영은 마지막에는 회사를 너그럽게 봐줄 것을 부탁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지웅이 의외의 말을 꺼냈다.
“애사심이 투철하시네요.”
“예? 감사합니다.”
“보통 애사심 높은 고액연봉자들은 생각이 회사 쪽으로만 굳어져 있는 경우가 있던데, 그런 것도 없는 거 같고요.”
유지웅은 대화 몇 분 만에 김기영이 자신의 입장을 받아들인 것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사업 제안서가 말도 안 되는 거지만, 이게 팀장님 뜻도 아니고 단순히 이사진이 결재한 것을 들고 온 것뿐이니 내가 팀장님한테 크게 거슬려야 할 것도 없고…….”
“예?”
김기영은 조금씩 불안해졌다. 이 청년,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거지?
유지웅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을 거듭했다. 그리고 말했다.
“저는 이런 터무니없는 제안을 해온 일성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건 제가 나이가 어리다고 우습게 본 이사진의 뜻이 분명하죠. 그리고 이사진의 뜻이 곧 회사의 뜻이고요.”
“선생님, 그건…….”
“지금 제가 이 사업 제안서 때문에 얼마나 어처구니없어 하는지, 그리고 제 입장이 어떤지 그래도 한국에서는 김기영 팀장님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군요. 마인드도 적당히 깨어 있는 거 같고요. 좋아요, 저를 위해서 일해보시겠습니까?”
“예엣?”
김기영은 뛸 듯이 놀랐다. 아니, 무슨 사업 제안을 하러 왔다가 면박을 먹고 마무리는 스카웃 제의야? 이런 건 드라마에서나 벌어지는 일 아니야?
처음에는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유지웅의 태도는 매우 진지했다.
“안 그래도 하나부터 열까지 제가 다 하자니 속이 터져 죽는 줄 알았습니다. 쓸 만한, 그리고 제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비서실장이 필요했는데 잘 됐습니다. 오늘부로 회사 관두시고 제 비서실장으로 일하시죠.”
“저를 좋게 봐주신 것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연봉은 지금 회사보다 백 배 올려드리죠. 할 일이 아주 많을 겁니다.”
“앞으로 회장님을 위해 신명을 바치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사업 제안서를 들고 온 죄로 몸 둘 바를 몰라 하던 김기영은 그 자리에서 배를 갈아탔다. 지금까지 몸담았던 회사를 찌를 가장 강력한 창으로.
“좋아요. 일단 첫 업무를 드리겠습니다.”
“예. 지시만 하십시오.”
“일단 김기영 씨한테는 비서실장을 맡기겠습니다. 쓸 만한 사람들을 채용해서 비서실을 갖추세요. 일단 인력을 갖춰야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딱히 회사나 법인을 세울 계획은 없지만 다른 기업들도 이런 식이면 맨땅에 헤딩하는 한이 있더라도 제가 직접 사업체를 차릴 겁니다. 아시겠죠?”
“예, 알겠습니다.”
“인력을 구성하면서 대외적인 협상도 위임하겠습니다. 협상의 큰 틀을 제가 잡아드리면 세부적인 것은 알아서 저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밀고 나가시면 됩니다.”
“예.”
원래 아랫사람이 알아서 자체 검열하는 것만큼 무섭고 깐깐한 것은 없다.
“일단 당분간 경비는 이 카드로 쓰시고요. 비밀번호는 378963입니다.”
유지웅은 카드 하나를 내밀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체크 카드였다. 김기영은 이어지는 설명에 경악했다.
“칠천억 원인가 들어있을 거예요.”
“예엣?”
그는 뛸 듯이 놀랐다. 칠천억이라면 유지웅이 현재 가진 전 재산이 아닌가. 전 재산을 자신에게 선뜻 맡기겠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전폭적인 신뢰란 말인가.
“놀랄 것 없어요. 칠천억은 앞으로 제가 벌어들일 재산에 비하면 돈도 아닙니다. 제가 레드 몹을 10초 만에 잡았다는 거, 알고 계신가요?”
“그, 그렇다는 것은…….”
“제게는 마음만 먹으면 10초 안에 벌 수 있는 돈이죠. 아시겠어요?”
김기영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확실히 그 말대로 유지웅에게는 별 거 아닌 돈이다. 그러나 겨우 연봉 이억 남짓하게 받는 자신에게는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그것을 선뜻 맡기다니.
“자, 그럼 바로 업무 시작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유지웅은 자리를 비켜 주었다. 멍하니 지켜보던 정효주의 손을 잡아끌고 상층 침실로 올라갔다.
그제야 숨을 돌린 팀원 둘이 다그치듯이 물었다.
“팀장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맞습니다! 이렇게 즉흥적으로 회사를 그만두시다니요!”
“즉흥적이 아니야. 연봉을 백 배로 올려준다고 하시잖아. 백 배야, 백 배. 일 년에 이백 억이라고.”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칠천억의 현금을 경비로 선뜻 맡기시는 자산가잖아. 연봉 이백억을 못 믿을 건 뭐야?”
“…….”
“자네들도 잘 생각해. 레드 몹을 혼자서 한 방에 사냥하는 분이셔. 무엇보다 본인의 가치를 정확하게 책정하고, 자존감도 높으신 분이야. 그런 분 밑에서 일한다는 기회가 일생 다시 올 것 같아?”
두 팀원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분명히 이치에 들어맞는 말이다.
유지웅은 김기영의 연봉이 얼만지 물어보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백배를 준다고 했다. 레드 몹을 사냥하면서 벌어들일 막대한 이권은 그것을 무모함이 아니라 크고 큰 배포로 만들었다.
“지금 당장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으시지만 머지않아 세계로 뻗어나가 전 세계를 호령하실 분이야. 난 그런 분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실 기회를 잡은 거라고. 일성 따위야 당연히 때려 쳐야지.”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더없는 충성을 바치던 회사는 ‘따위’로 격하되었다. 백배의 연봉이 지닌 힘은 과연 무섭다.
잠시 생각을 하던 두 팀원은 이윽고 결심을 굳히고 말했다.
“팀장님, 아니 비서실장님. 방금 회장님께서 비서실 인력부터 먼저 채용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를 채용해주신다면 성심을 다해 일하겠습니다.”
“좋아. 자네는?”
“저 역시 성심을 다해서 일하겠습니다.”
“알았어. 지금부터 바로 출근하게.”
“예!”
“저, 그런데 회장님께 결재는 받지 않으셔도 되는지…….”
“이런 사소한 먼지 같은 업무로 일일이 회장님을 귀찮게 해서야 앞으로 어떻게 그 분을 보필할 수 있겠나?”
“죄, 죄송합니다.”
일성의 유능한 세 직원은 그렇게 일성을 찌르는 세 자루의 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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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묵자흑...
"회장님께 물드는 데는 3분이면 충분했습니다."
훗날 비서실장의 회고록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