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05 %3C프리시즌 딜러편%3E 내가 돌아왔다! =========================================================================
유럽 정상들은 처음 히카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깨닫지 못했다. 전혀 상상 밖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한 나라의 정상까지 올라간 이들, 때로 그릇된 판단을 할 수 있을지언정 어리석지는 않다. 바로 히카리의 말뜻이 무엇인지 파악해냈다. 동시에 경악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릴!”
“원하는 게 뭐냐?”
반응은 두 가지로 갈렸다. 불같이 흥분하는 쪽과 침착하게 뒷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 쪽으로. 영국은 전자, 독일은 후자였다.
“마르코 수상, 무슨 생각이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일단 들어는 보자는 겁니다.”
“괴수와 협상을 하겠다는 겁니까! 말을 한다고 하나 결국 인간에게 해로운 미물일 뿐이오!”
“그래서 해가 되는지 아닌지를 먼저 들어보고 판단하겠다는 거 아닙니까.”
“어차피 우리 선택지는 좁지 않습니까. 일단 이야기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하군요.”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독일 편을 들고 나섰다. 이탈리아와 그리스가 영국 쪽에 가세했다. 그들도 영국 수상 못지않게,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괴수는 타도의 대상일 뿐! 말을 조금 할 줄 안다 해서 이야기가 통할 거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그릇된 오산이자 오만이오!”
“그건 아직 모르는 일 아닙니까.”
반응이 팽팽하게 갈렸다. 히카리는 재미있다는 듯이 구경하다가 영국 수상을 향해 눈을 돌렸다. 세로로 빛나는 눈동자가 광폭한 살기를 드러냈다.
―이야기를 않겠다면 이 자리에 필요하지는 않겠군.
그 말뜻이 담고 있는 의미는 명백하다. 히카리는 앞발 하나를 높이 들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삐죽 길어졌다. 무려 50cm는 될 듯한 발톱의 예리함에 영국 수상은 물론이고, 그의 편을 들었던 정상들도 창백해졌다.
“자, 잠깐!”
―필요 없다.
히카리는 뒷발을 살짝 굽혔다. 금방이라도 앞으로 뛰쳐나갈 기세였다. 그 순간, 독일 수상이 빠르게 외쳤다.
“잠깐만! 멈춰!”
금방이라도 정상들을 찢어놓을 것 같았던 히카리가 거짓말처럼 정지했다. 히카리는 앞발을 슬그머니 내리며 몸을 돌려 독일 수상을 주시했다.
―말해라. 인간.
“그들을 해치면 우리도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
―…….
“지금 이 자리엔 너와 우리뿐이다. 우리를 해치는 건 언제든지 할 수 있다. 결정은 이야기가 끝난 뒤에 해도 늦지 않다.”
“마르코 수상!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가 이런 미물한테 통할 리가 없소!”
―좋다. 그리 하지.
“허억!”
뜻밖에도 히카리가 수락하자 영국 수상은 뒤로 넘어갈 듯이 놀랐다. 반면 독일 수상을 비롯하여 그에게 동조한 정상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친 김에 프랑스 대통령이 물었다.
“혹시 방금은 위협이었나?”
―왜 그리 생각하지?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한다. 고차원적인 사고 능력을 가진 개체라는 증거다. 괴수의 지능이 높다는 것은 인류에 있어 절대적으로 불리한 일, 그러나 프랑스 대통령은 그런 것은 상관치 않는다는 듯이 입가에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너 정도의 전투 능력이라면, 우리가 반응할 틈도 없이 찢어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크르르…….
“그리고 경호원들을 잠시 살폈다. 죽은 사람은 없는 듯하더군. 단순히 기절만 시킨 건가?”
그 말에 놀란 영국 수상도 얼른 쓰러진 경호원들을 살폈다. 과연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봐선 죽은 것 같지는 않았다.
―좋을 대로 생각해라.
대답을 회피한다. 그러나 대화를 선택한 이들의 미소는 오히려 짙어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감이 옳았음에 기뻐했다.
독일 수상이 신중한 눈으로 히카리를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너는 아까 유지웅 딜러와 우리가 사이가 좋지 않은 점을 들어 물었다. 우리가 반목할 필요가 있느냐고.”
―그랬지.
“정확한 의미, 아니 네가 우리에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다.”
―크우오와!
갑자기 히카리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정상들은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 그 소리가 마치 단말마의 신음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잠시 웃었다. 두려워할 것 없다.
그게 웃은 거라고? 정상들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미묘한 표정이 되었다.
―내가 너희들에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보다, 내가 너희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가 더 궁금한 것은 아닌가?
독일 수상의 미소가 짙어졌다. 프랑스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영국 수상도 불현듯 무언가를 깨달은 얼굴이 되었다. 이 대화가 어떤 분위기로 흘러가는지 감을 못 잡은 이는 이제 없었다.
―먼저 말하지. 그 강력한 자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순순히 죽어줄 마음이 없다. 그 자와의 투쟁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촤악!
히카리의 등에 접혀 있던 날개가 한순간 쫙 펴졌다. 날개가 황금빛 광채를 내뿜으며 위압적인 기세를 가했다. 순간적으로 눈이 부신 정상들은 얼굴을 찡그리며 팔을 들어 가렸다.
―나를 도와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를 모두 멸할 것이다!
유럽 정상들은 깨달았다. 히카리가 지금 말하는 ‘너희’는 이 자리에 있는 정상들에 국한된 게 아니었다.
자신들의 가족, 친지, 나아가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유럽 시민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 전부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는 것이다.
“시민들은 결코 투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네가 협박으로 우리 인류의 존엄을 파괴하고자 한다면, 우리 시민 모두는 마지막까지 투쟁하여 싸울 것이다. 인간의 존엄이 너의 야성보다 우위에 있음을 증명할 것이다.”
독일 수상은 의연하게 말했다. 영국 수상은 그게 진심이 아님을 어렴풋이 느꼈다. 동시에 그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도 알 것 같았다. 아마 그는 지금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히카리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앞발을 들어 위협하지도 않았고, 이빨을 드러내 으르렁거리지도 않았다.
그 차분하게 가라앉은 모습에서 정상들은 위협보다는 어떤 기대감을 느꼈다.
―우오오오!
그때였다. 히카리가 갑자기 고개를 높이 들더니, 하울링을 하듯이 고통스러운 포효를 토해냈다. 동시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황금색 날개가 몸의 경련에 맞춰 이리저리 비틀렸다.
느닷없는 광경에 정상들은 흠칫했다. 히카리의 고통은 오래 가지 않았다. 30여 초가 지날 쯤이었다. 녀석은 입을 쩍 벌리더니 뭔가를 토해냈다.
정상들은 그게 뭔가 하고 살피다가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이 되었다. 동시에 그들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서로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히카리가 살짝 지친 듯이 말했다.
―너희가 블루 결정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이건…….”
―너희도 동족의 시선이 있겠지. 나와 적대하는 척을 해도 상관없다. 그저 나를 도와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 모두를 멸할 것이고, 돕는다면 오늘 같은 보상이 따를 것이다!
정상들은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끄덕였다. 본래 국제회의에서는 명시적인 의사 확인이 필수였지만, 이 자리에서만큼은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독일 수상은 땅에 떨어진 블루 결정체를 주웠다.
“인류는, 유럽 연합은 너를 적대할 것이다. 그것은 철회할 수 없는 공식적인 입장이다.”
―오늘은 이만 가지.
앞으로도 적대할 것이다.
그것이 공식적인 입장이다.
그 안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는 자명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은 상당한 정치적 판단 능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히카리는 그 의미를 이해하고, 바로 물러났다.
* * *
“대부, 저 왔어요.”
“으, 으아아악!”
모처럼 오랜만에 편안한 기분이 되어 한가롭게 체스를 두고 있던 대부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랐다. 유지웅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제가 반가워요, 대부?”
“어, 어서 오십시오! 한국에 가셨던 일은 잘 되셨습니까?”
“네, 뭐. 그럭저럭요. 문제가 좀 있었는데, 대부 혹시 티비 안 보셨나 봐요?”
“하, 하하. 제가 요새 사업체 경영 때문에 여러 모로 바쁘다 보니 그럴 겨를이 없었습니다.”
“모르셨구나. 참 많은 일이 있었어요. 나중에 티비나 한 번 보세요. 아니다, 그냥 인터넷 검색하셔도 될 거예요.”
늙은 대부는 조마조마했다. 사실 그는 방송을 보고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드디어 유지웅이 미국을 떠나겠구나, 이제 안 들어오겠구나, 하고 말이다.
그런데 무슨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미국에 들어와 자신을 찾는단 말인가. 다시는 안 보길 바라는 심정으로, 티비 방송 SNS에 들어가서 좋아요까지 눌렀는데 그게 다 소용이 없다.
“대부. 혹시 어항 마련하셨어요?”
“죄송합니다! 아직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해서…….”
“잘 됐네요. 어항은 필요 없게 됐어요. 다행이다.”
“네? 정말입니까?”
늙은 대부는 희색을 띠었다. 드디어 이 대악마, 아니 대마왕이 자신의 숨통을 풀어줄 셈인가.
“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거든요.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대부.”
“벌써 돌아가신단 말입니까? 좀 더 머무르시지 않고요.”
늙은 대부는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술술 했다. 어차피 다신 안 볼 사람이니, 뭐 빈말 투하쯤이야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
“안 돼요. 빨리 가야 해요. 원래는 그대로 계속 있으려고 했는데, 모비딕을 데려와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왔어요. 그 녀석은 지금 잘 있나요?”
“염려 마십시오. 임시 어항이지만 그래도 불편함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행이군요. 시간이 없으니 이 길로 바로 모비딕 녀석을 데리고 돌아갈까 합니다.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대부.”
“별 말씀을요.”
유지웅은 정 들었던 대부에게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다가 퍼뜩 생각난 게 있어 멈췄다.
“아참, 대부.”
“예! 말씀하십시오!”
늙은 대부는 군기가 바짝 들어 대답했다. 대체 이 대마왕이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어서 지옥으로 다시 돌아갔으면 좋겠는데.
“사실 저는 마피아를 싫어해요. 마약, 매춘, 살인으로 돈 버는 조직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대부를 보고 마피아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깨달았어요. 건전하고 합법적인 사업을 하는 마피아도 있다는 걸 알게 됐죠. 마피아는 다 쳐죽여야 하는 애들인 줄 알았는데, 모두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돼서 참 다행이었어요.”
“하, 하, 감사합니다.”
늙은 대부는 식은땀을 흘렸다. 방금 말한 불법적인 사업 아직도 버젓이 잘만 하고 있는데? 대체 저 이야기를 왜 하는 거지? 혹시 마지막 태클?
“그동안 신세 진 것도 많고, 고맙기도 해서 제가 몇 가지 말씀 드릴 게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대부는 불안했다. 빨리 말하고 꺼져줬으면.
“하고 싶은 것이나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마음껏 하세요. 남은 인생을 보람 있게 즐긴다 생각하고, 후회 없는 시간을 보내세요.”
“네?”
“어쩌면 앞으로 그런 시간이 없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럼 수고하세요.”
대부는 멍해졌다. 지금 이거 협박이야? 그런 거야? 다음에 찾아올 때까지 실컷 여생을 즐기라는?
한편 유지웅은…….
‘히카리가 화이트 몹이 됐어. 역사가 바뀌었네. 어쩌면 로버는 더욱 강력할지도 몰라.’
돌아서는 그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내가 과연 로버를 이길 수 있을까?’
이미 히카리는 안중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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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 : 내가 과연 이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