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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귀족이다-964화 (964/1,550)

00964  %3C프리시즌 딜러편%3E 맷돌, 그리고 맷돌  =========================================================================

유지웅은 막 미국으로 출장을 떠나려던 칠드그린을 급히 불렀다. ‘공범’을 만들어줄 생각이라 하자 칠드그린은 모든 일을 내팽개치고 달려왔다.

이미 칠드그린과 휘버는 안면이 있는 사이였기에, 유지웅은 소개는 생략하고 바로 넘어갔다.

“칠드그린 의장님도 제가 미래에서 왔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유지웅은 여전히 믿지 못하는 휘버에게,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8년 후 자신이 미래에서 겪은, 인류의 생존을 수호하기 위한 최후의 싸움. 붕괴하는 균열. 그리고 장엄하게 몸을 던진 자신의 희생까지.

“저는 그 길만이 인류를 지키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제 목숨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죠. 인류를 지킬 수만 있다면, 균열을 막을 수만 있다면 제 한 목숨 따위,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했지요. 그 결과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마침내 유지웅이 말을 마쳤다. 휘버는 멍하니 그의 눈을 바라봤다. 한 치의 쑥스러움도 없이, 떳떳하고 당당함으로 가득 찬 눈이다.

휘버는 슬그머니 칠드그린을 바라봤다. 칠드그린이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이, 유지웅 몰래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니, 대체 무슨…….’

미래에서 왔다는 말을 못 믿어서? 그것보다는, 인류를 지키기 위해 희생한 자기 자신의 경험담을, 마치 다른 사람의 영웅담을 추앙하듯이 거창하게 설명한 것에 맥이 빠진 것이다.

“제가 아니었으면 인류는, 아니 지구는 진작 멸망했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사람들이 저의 숭고하고 장엄한 희생을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애초에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으니까요. 만약 제가 그런 성격이었다면, 그런 감동적인 자기희생은 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

이건 자화자찬인가, 아닌가.

어쨌거나 자화자찬이라면 극에 달한 것이요, 극에 달한 자화자찬은 본인이 아는 청자가 온몸에서 창피함이 돋아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다.

휘버는 칠드그린에게 눈을 돌렸다.

“그대는 회장의 저 말을 믿으시오?”

“저는 정보기관에서 수십 년간 일을 했습니다. 거짓말을 판별하기 위한 논증 대차 심문은 기본적인 기술이죠.”

“그래서, 그대의 결론은?”

“……믿기 어렵지만, 사실이라고 판별을 내렸습니다.”

칠드그린은 유지웅이 처음으로 충격적인 고백을 했을 때의 일을 상기하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저 역시 시간 이동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공상과학의 영역이죠. 하지만 회장님을 면밀히 심문한 결과, 미래에서 온 게 아니라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두 명제가 양립이 불가능하군.”

“어느 한쪽이 틀렸다는 말이겠죠. 박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휘버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시간여행, 본래는 불가능한 일이다. 자신이 아는 지식의 한도 내에서 그것을 가능케 하는 수단은 없다.

그러나 전대미문의 힘, 균열이 개입했다면 어쩌면 가능하지도 않을까?

“나는 모르겠소. 하지만.”

“…….”

“회장의 존재는 시간축이 어긋난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어쩌면 칠드그린, 그대의 말이 맞을지도…….”

“아, 참. 저 미래에서 온 거 맞다니까요. 이거 증거를 보여드려야 믿으시겠네. 기다려봐요. 내가 곧 증거를…….”

“그, 그만 두십시오! 믿습니다, 믿습니다, 회장님!”

칠드그린이 새하얗게 질려서 말리고 나섰다. 휘버는 의아해서 갸웃거렸다.

“왜 그러시나? 증거를 보여준다는데 굳이 말릴 것은 없지 않나?”

“박사님! 박사님 최후의 유언을 생각해 보십시오! 회장님의 말이 거짓이라면, 그 유언 녹취 파일이 있는 곳을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뭐, 뭐야?”

그제야 휘버도 새파랗게 질렸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어떻게 유지웅은 그 녹취 파일의 존재와 장소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을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유지웅은 지금 다른 증거를 보여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칠드그린의 표정은, 이미 한 번 비슷한 일을 겪은 것처럼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안 돼!”

휘버는 기겁을 해서 유지웅을 잡고 매달렸다. 또 다시 그런 창피함을 겪을 순 없어!

“믿소, 믿소! 회장! 그러니까 그만 두시오!”

“회장님, 믿습니다! 저는 예전부터 믿고 있었다고요! 믿지 못하는 건 휘버 박사님뿐입니다!”

“아니에요. 제가 보기에 두 분 다 아직 반신반의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미래인이 아니면 찾아낼 수 없는, 두 분이 꽁꽁 숨겨놓은 흑역사를 내가 지금 당장 찾아서 가져올게요. 그럼 믿어주실 테니까…….”

“믿겠소! 그만 두시오!”

“회장님! 믿습니다! 믿는다고요!”

실랑이는 한참이나 길었다.

*  *  *

다시 실내로 들어선 니트로와 가렌, 최윤은 뭔가 달라진 분위기를 느꼈다. 휘버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고, 칠드그린은 뭔가 십 년은 늙은 듯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니, 아닙니다.”

“휘버, 너 얼굴이 왜 그러냐?”

“정말 괜찮습니다, 교수님. 너무 놀라운 일을 들어서 이런 겁니다.”

뭔가 이상하지만, 그렇다니까 어쨌든 그냥 넘어갔다.

“회장이 과거 균열과 조우한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황을 들어보면, 아마도 균열이 어떠한 형태로 변이를 일으켜 회장님의 왼손에 깃들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그 점을 조사해보겠습니다.”

유지웅이 미래에서 왔다는 사실은 결국 휘버와 칠드그린만 아는 것으로 하기로 했다. 저 멀리서 유지웅이 웃으면서 몰래 눈을 찡긋 했다. 휘버는 왠지 몸이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

스카우터를 비롯한 첨단 측정 장비를 이용해, 바로 유지웅의 왼손 조사에 들어갔다. 그 안에 균열이 정말로 존재하는지를 밝혀내기 위한 검사였다.

그러나 시작부터 낭패를 겪었다.

“내부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진한 농도의 결정 에너지가 단단히 감싸고 있을 뿐입니다.”

“음, 짐작은 했지만…….”

“휘버, 무슨 좋은 방법이 없겠냐?”

“칼집은 칼의 예리함으로부터 소유주를 보호하기 위해 감싸고 있는 겁니다. 균열은 행성조차도 베어버릴 수 있는 대단한 공격력의 칼입니다. 당연히 그 칼집의 단단함도 그에 상응하는 수준이겠죠.”

“음……. 하긴 칼집의 결정도만 192억이니, 납득했다.”

칠드그린은, 지금 이 순간에도 192만으로 알고 있을 백악관 수뇌부가 걱정돼서 초조했다. 어서 빨리 가서 소식을 전해야 하는데, 본의 아니게 여기에 묶여 있었다.

그렇다고 이 자리를 뜰 수도 없었다. 유지웅의 왼손에 정말 균열이 존재한다면, 결정도가 192억이냐 192만이냐 하는 것은 대단치도 않은 정보로 전락할 테니.

균열 반응 조사는 휘버와 니트로가 맡았다. 그 동안에 가렌과 최윤은 본래 하던 업무, 인피니티 스톤 연구 조사에 다시 매달렸다.

“인피니티 스톤의 퍼플 부위 형성 속도가 느려서 고민이오. 이래서야 원 문제가 심해요.”

“처음에는 분명 급속도로 결정체가 자라났는데, 왜 이렇게 속도가 느려진 건지 모르겠군요.”

“대기권내 결정 에너지의 농도가 낮아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그럴 리가. 대기권내 결정 에너지는 어느 지역이든 거의 차이가 나지 않소.”

“변수 차이가 있다면, 음…….”

그 순간 가렌과 최윤의 생각이 정확히 일치했다. 둘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혔다. ‘너도?’, ‘어, 너도?’라는 감정이,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교류했다.

“잠깐! 가렌 박사님!”

“나도 지금 막 그 생각을 했소, 최윤 박사.”

가렌이 굳은 얼굴로 일어섰다. 최윤도 잔뜩 상기돼서 얼른 일어나 연구실을 나섰다. 둘은 곧바로 휘버와 니트로가 있는 연구실로 들어갔다.

연구실 중심에는 스카우터에 왼팔을 내놓고 있는 유지웅이 쿨쿨 자고 있었고, 그 주변에서 휘버와 니트로가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둘은 그제야 가렌과 최윤을 발견했다.

“무슨 일인가?”

“교수님들, 한 번 시험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시험?”

니트로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가렌이 잔뜩 흥분을 띠고 설명했다.

“교수님, 기억하십니까? 인피니티 스톤, 처음에는 단면에서 급속도로 퍼플 결정체가 자라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지금은 안 되고. 아마 대기권내 결정도 차이가 나는 것으로…… 허억! 자, 잠깐!”

말을 하다 말고 니트로도 깨달은 게 있는지, 탄성을 내질렀다. 셋의 마음이 하나로 통한 것이다. 오직 휘버만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했다.

‘인피니티 스톤?’

인피니티 스톤이 뭔지 모르는 휘버는, 다른 셋이 무엇으로 의사 일치를 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바로 시험해보자!”

“네! 안 그래도 여기 가져왔습니다!”

“회장님, 일어나세요! 일어나요, 어서!”

니트로가 허둥지둥 준비했고, 가렌이 인피니티 스톤을 건넸으며, 최윤은 유지웅을 흔들어서 깨웠다.

“무슨 일이세요? 오늘 실험 조사는 다 끝났나요?”

“회장님, 인피니티 스톤이 처음에는 단면에서 퍼플 결정체가 급속도로 자라났던 거 기억하십니까?”

“네. 그 뒤로 속도가 둔화됐잖아요.”

“생각해보니 그때는 회장님이 인피니티 스톤을 왼손에 쥐고 있었단 말입니다.”

“네, 그런데요?”

“…….”

니트로는 인상을 잔뜩 쓰고, 가렌과 최윤을 돌아보며 외쳤다.

“그냥 왼손에 처! 쥐어주고, 스카우터로 바로 결정도 측정해! 칼집 결정도가 192억에서 얼마나 깎이는지, 눈곱만큼의 수치도 놓치지 말고!”

“알겠습니다!”

“뭐, 뭐하는 거예요?”

“회장님, 아무 소리 마시고 이거 그냥 꽉 쥐고 있으세요.”

최윤은 유지웅의 왼손에 인피니티 스톤을 쥐어주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돋아나다 멈춘 듯한 퍼플 결정체가 급속도로 자라나서, 빠른 시간 안에 구체의 형태를 갖춘 것이다.

“가렌, 칼집 수치는?”

“192억 그대로입니다! 앗, 잠깐! 휘버 교수님, 이 반응을 보십시오! 그래프가 요동을 칩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해서 보고 있던 휘버는 부리나케 달려들어 모니터를 확인했다. 그리고 외쳤다. 유레카!

“칼, 아니 균열이다!”

============================ 작품 후기 ============================

다른 기회가 생겨 신작을 다른 데서 하긴 했는데 제가 조아라 뜨는 건 아닙니다. 나귀족 프리시즌은 틈틈이 할 거구요, 신신작은 조아라에서 연재할 예정입니다.

신신작은... 아직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내년에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일정에 관해서 너무 기대는 너무 마시구여...

양치기 소년이 되는 건 싫어서 제가 일정에 관해 말씀드리는 건 매번 조심스럽네여. 올 한해 입 꾹 다물고 있던 것도 그런 이유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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