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6 < -- <프리시즌 헬조선편> 금을 너무나 사랑한 -- >
지모는 조국으로부터 특명을 받고 있었다. 유지웅의 근처에 머물면서 최대한 그의 환심을 살 것, 그리고 미국과 그의 관계를 부드럽게 이끌어나갈 것.
어찌 보면 유지웅 전용 대사관이나 다름없다. 소위 말하는 걸어 다니는 대사관.
그는 오늘도 유지웅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듣는다. 감시하는 게 아니다.
짓지도 않은 백화점에 5조 원부터 선입금해버린 걸 보고 얼마나 기함을 했는지 모른다.
자신과 다니엘에게 제시한 종신고용 계약서 내용을 봤을 때부터 돈 씀씀이에 범상치 않은 건 알아봤지만, 아무리 그래도 백화점 물품 구매로 5조 원이라니…… 그것도 선납이라니…… 짓지도 않았다니…….
그래서인지 첫 영업일에 백화점을 방문해서 유일하게 들어선 명품관 에르메스 지점의 모든 재고를 말 한 마디로 사버린 것은 놀랍지도 않았다.
“음, 좋네요. 지금 이 매장에 있는 모든 상품을 제가 사죠.”
“네? 하지만 의류나 슈즈 같은 것은 치수가…….”
“주변에 치수 맞는 사람들한테 나눠주면 됩니다.”
그리고 유지웅은 김주원을 돌아보며 물었다.
“지금 제가 샀습니다. 아시겠죠, 사장님?”
“물론입니다. 따로 정산을 해서 자세한 구매 내역은 톡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이제 김주원은 척하면 척, 아주 유지웅과 궁합이 맞아서 제대로 짝짜꿍하고 있었다.
명품 매장은 에르메스 한 곳뿐이지만, 중저가 브랜드는 비교적 다양하게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물론 그 브랜드들은 유지웅을 타깃으로 삼아서 입점한 매장이 아니었다. 제니스 타운에 유지웅만 있는 게 아니지 않는가? 그의 밑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도 있고, 그들도 하나하나가 전부 소중한 고객들이다.
“정식 오픈은 내일인가요, 사장님?”
“예, 당장 매출에 큰 기대는 안 하고 있습니다. 제니스 컴퍼니 도시계획부서에서 임시로 큰 길을 몇 개 내긴 했지만 아직 홍보가 덜 이뤄졌거든요. 입소문도 덜 탄 편입니다.”
하지만 김주원은 별로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애초에 유지웅 한 명만 보고 들어선 백화점이다. 일반 고객들이 많이 와주면 좋기야 하겠지만, 안 온다 하더라도 크게 타격은 없을 테니까.
그 부분은 천천히 시간을 들여 공략해 나갈 참이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유지웅의 불편함을 해소하는 것뿐이다.
“그래도 백화점이라는 게 사람들이 다양하게 출입해야 활기가 도는 법이죠. 일하는 직원들도 어느 정도는 활력이 돌아야 힘이 날 테고요.”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아, 그래서 제가 달리 도와드릴 방법이 없을까 하다가 좋은 생각을 했습니다. 들어보시겠어요?”
“경청하겠습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제니스 컴퍼니 직원이 지금 4,000명쯤 되는데요. 제가 개인마다 한 달에 200만 원씩 이 백화점에서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주기로 했습니다. 즉 백화점에서 구매한 월 금액의 200만 원까지는 제가 대신 내준다는 거죠. 한 달 내에 쓰지 않으면 없어지고 이월되지 않습니다. 대신 매달이 시작될 때마다 200만 원의 권리가 새로 생기는 거죠.”
“아! 그렇다면 저희 백화점 매출 증대에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고 한다.
하물며 200만 원 어치 백화점 상품권이라면, 그리고 매달 없어지고 새로 생기는 시스템이라면?
무조건 한 달에 한 번은 백화점을 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매달 200만 원 이상을 지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쇼핑을 하다 보면 꼭 200만 원에 딱 맞춰서 지르겠는가? 200만 원에 자기 돈을 보태서 더 좋은 것을 살 수도 있고, 쇼핑을 하다 보니 다른 물품에도 눈이 돌아가서 구매를 할 수도 있고, 그런 것 아니겠는가?
“괜찮은 생각인가요?”
“물론입니다. 저희 백화점이 자리를 잡는데 더할 나위 없는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이 험난한 오지에 저 하나만 보고 들어오셨는데 그 정도 편의야 해드려야죠.”
“감사합니다. 직원 월 포인트 구매도 저희가 알아서 시스템을 진행하겠습니다.”
“네, 그 돈에서 까세요.”
“한 가지 여쭐 것이…… 직원들의 물품 구매권리는 타인에게 양도가 가능하게 할까요? 본인만 사용 가능하거나 혹은 가족만 이용할 수 있게 할까요?”
“그냥 양도 가능하게 하세요. 그래야 백화점에 더 많은 활기가 돌 수 있겠죠.”
양도가 불가능하다면,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백화점을 이용 못하는 달에는 그 권리를 고스란히 날려 버린다.
하지만 양도가 가능하다면, 직원들에게 제공한 권리가 거의 소실 없이 이용될 수 있게 된다.
‘한 달만 이용할 수 있는 단기 상품권을 발매해서 직원들 인적사항을 파악해 개별 지급하면 되겠군.’
백화점 측의 수고가 많이 들겠지만, 매달 80억 원의 고정 매출이 추가 되는 일이다.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다. 아니, 팔을 걷어붙이고 시스템 구축에 나서야 한다.
‘도대체 둘이 뭐라는 거야?’
한편 옆에서 지켜보는 지모는 대화의 흐름을 좀처럼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뭔가 둘만의 공감대가 휙휙 생겨나는 것 같긴 한데, 그 템포가 너무 빨라서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백화점에서 파트타임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김주원과 유지웅의 유대관계가 심상치 않아 보인다.
둘은 분명 평생 접점이 없었고, 이번 제니스 타운점을 기점으로 인연을 시작한 듯이 보인다. 그런데도 눈빛만 봐도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읽는 듯이 느껴진다.
다음 날, 김주원은 지모의 조용한 방문을 받았다.
제니스 타운점의 안락한 장착을 위해 정신없이 바빴지만, 김주원은 미소 띤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김주원은 그가 누구인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사장님께 부탁이 있습니다. 백화점 업무를 전반적으로 좀 이해하고 싶군요. 그래서 말인데, 파트 타임으로 잠깐 저를 써주실 수 있겠습니까?”
“유지웅 고객님을 이해하기 위한 선택이군요. 알겠습니다. 백화점 업무를 편히 관전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드리겠습니다.”
“……관전?”
이런 경우에 관전이라는 단어가 적당한 것인가? 지모는 잠시 헷갈렸다.
“이런…… 그분과 즐겁게 이야기하는 사이에 어느새 저도 그분의 어휘에 물들어 버렸군요.”
“……?”
지모는 아직 이해하기 어려웠다.
뭔가 몹시 어려운 세계에 발을 들인 느낌이다.
“난 둘이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 줄 알았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 같은데?”
정효주의 말에 유지웅은 어깨를 으쓱한 채, 그저 웃기만 했다.
“난 딱 보는 순간 느낌이 왔어. 아, 이 사람은 나와 말이 잘 통하겠구나 하고.”
“네가 김주원 사장님을 언제 봤다고 그래?”
“에이, 그런 게 있어. 스치듯이 봤었나 보지, 뭐.”
뭔가 깊게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눈치가 아니라서, 정효주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럴 거면 아예 그분을 제니스 컴퍼니로 영입하는 건 어때?”
“나도 그 생각은 해봤는데, 남부러울 것 없는 재벌 2세라서 안 돼. 원래 좋은 품종은 밭을 함부로 옮겨 심는 게 아니…… 아무튼 그냥 우호적인 파트너 관계로 유지하는 게 차라리 나을 나아.”
그리고 유지웅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심했다.
“너무 덩치가 커지면 움직이기 곤란하단 말이야. 안 그래도 나중에 얼마나 비대해질지 모르는데 벌써부터 지방 세포를 덕지덕지 붙이고 다닐 순 없어. 오히려 르메어 백화점이 제발 자기들을 인수해달라고 애걸복걸 하는 경우가 없었으면 하는데…….”
“가끔 난 네가 어디를 바라보는지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어.”
“괜찮아. 다들 그러더라고.”
유일하게 본래 세상의 정효주만이 같은 눈높이를 공유할 수 있었지만……. 그 정효주와 지금 차원의 정효주는 같은 사람이면서도 또 다른 사람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조금 아련해졌다.
보스코 등 내로라하는 국내 철강업체는 지금 초유의 긴장을 느끼고 있었다. 바로 결정체를 이용해 만든 철강 강화제의 등장 때문이었다.
복잡한 공정 과정이 별도로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저 기존 생산 공정에 철강 강화제를 섞어주기만 하면, 수십 배 이상 품질이 좋아진다.
그런데 유지웅은 그 좋은 것을 미국에만 우선 수출한다고 한다. 당연히 미국 철강 제품의 경쟁력이 비약적으로 높아질 것이고, 반대로 국내 철강업체가 세계무대에서 설 자리는 좁아지게 된다.
이미 몇 차례나 까였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회사와 업계의 사활이 걸린 문제, 한두 번 까였다고 해서 물러날 수는 없는 일이다.
“또 오셨군요.”
유지웅은 덤덤하게 그들을 맞이했다.
싸늘함조차 보이지 않는 무관심한 표정, 저 안색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협상단은 이제 잘 알고 있었다.
상대는 더 이상 운 좋은 천애고아 출신이 아니었다. 총 공사비 1,000조 원의 산업단지를 보유하고, 미국에 1조 달러의 채권을 갖고 있는 국제적인 유명 인사다.
더 이상 저 앳된 얼굴에 방심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철강업체 CEO들은 단단히 각오를 다졌다.
“이렇게 와봤자 시간만 낭비하고 헛걸음에다가 아무런 소득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 왜 자꾸만 저를 찾아와서 귀찮게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서로 서로 무익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지양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진심으로 염려된다는 말투에, 그들은 잠시 혼백이 이탈할 뻔했다.
안 돼, 안 돼! 저 화법에 더 이상 속아 넘어가선 안 돼!
보스코에 새로 취임한 CEO, 진강철 사장은 단단히 마음을 다잡고 준비한 말을 꺼냈다.
“저희는 철강 강화제를 반드시 도입하고 싶습니다. 그를 위해서 유지웅 의장님께서 원하시는 어떤 대가로 지불할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호오.”
순간 유지웅이 나지막한 감탄사를 흘렸다. 지금 진강철이 보인 태도가 조금이나마 그의 마음에 들어온 것이다.
마음을 움직였다기보다는, ‘적이지만 그래도 저런 기백은 흡족해.’라는 느낌을 주었다고나 할까.
“좋아요. 그렇게 용건을 짧게 정리하시는 것. 저는 아주 좋아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제가 원하는 대가를 충족할 자신이 있으세요?”
유지웅이 진강철 외에 다른 사장들을 둘러보며 입을 떼자, 그들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저희 회사는 이미 결정이 선 상태입니다.”
“그래도 다들 거대 기업의 사장님들이신데, 이 자리에서 가부를 결정할 권한은 있겠죠? 나중에 이사진에서 반발 당하고 주주진들한테 발목 잡히고, 그런 건 없겠죠?”
“당연합니다.”
“신중하게 대답하셔야 할 거예요. 어쩌면 오늘이 정말 최후의 미팅이 될 수도 있어요.”
“…….”
“제가 정말 마음이 없었다면, 여러분들이 막무가내로 찾아와도 아예 만나드리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 점은 잘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유지웅이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자, 그들은 목이 타는 듯한 긴장감을 느꼈다. 갑자기 눈앞의 청년이 엄청나게 커다란 거인처럼 느껴졌다.
“제 제안을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서 오케이 하신다면, 저는 미국과 동등한 가격으로 철강 강화제를 공급할 수 있습니다.”
“그 제안이 어떤 건지 말씀해 주십시오.”
다들 각오를 단단히 붙들어 맸다. 유지웅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결코 놀라지 않으리라! 그리고 시원하게 이 자리에서 오케이를 하리라!
그것이 바로 이사진, 그리고 주주들이 신신당부한 것이었다.
“제가 너그러운 어심으로 철강업체를 긍휼히 여겨 베푸는 혜택이니만큼, 철강 강화제로 인해 얻은 이익은 주주에게는 돌아가지 않았으면 합니다. 오직! 철강 강화제로 인한 이익에만 한하겠습니다. 그건 너무 당연한 거죠.”
“……?”
“……?”
“지금 다들 이해 못하셨어요?”
다들 혼란에 빠졌다.
이익을 주주에게‘는’ 돌리지 말라니? 이게 무슨 소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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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롤력이 충만한 자만이 한 번에 이해할 수 있을 것이로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트롤력은 얼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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