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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태의 저택 정문을 나섰을 때, 도로에는 이미 수십 대가 넘는 경찰차가 포위한 상태였다.
수십 명이 넘는 무장특공대가 이쪽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지만, 마음은 한없이 평온했다.
오히려 포위한 경찰들의 안색이 사색이 돼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저들도 바보가 아니니, 이쯤이면 자신이 탱커 각성자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소총 따위를 들고 탱커 각성자에게 덤비는 것은 자살 행위. 그것을 알기에 수적 우위로 포위를 해놓고도 겁에 질려서 덜덜 떠는 것이리라.
두꺼운 방패 뒤에 숨어 제대로 모습이 보이지 않는 현장 책임자가 확성기에 대고 외쳤다.
“두, 두 손을 들고 투항하라! 너는 이미 포위되어 있다! 다시 말한다! 두 손을 들고 투항……!”
그 순간 최형식이 갑자기 달려들었다. 잔뜩 긴장한 채 총구를 겨누고 있던 이들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들은 어떠한 경우가 있더라도 명령 없이 발포해서는 안 된다는 지시를 신신당부 받았다. 왜 그런 지시가 떨어졌는지도 이해하고 있었다.
상대는 총기가 통하지 않는 탱커였으니까. 섣불리 자극했다가는 오히려 경찰 병력이 전멸당하고 만다.
“으, 으악! 내 총! 내 총!”
아군 진형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특공대 한 명이 사색이 돼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다음 순간 최형식이 원래 있던 자리에 나타났다. 그는 조금 전까지는 없던 특공대 소총을 쥐고 있었다.
경찰들은 그제야 상황을 깨달았다.
그가 아군 진형을 관통해서 도망친 게 아니라, 특공대원의 소총을 빼앗아 돌아왔다는 것을.
최형식은 천천히 소총을 쥐었다. 놀랍게도 소총의 끝은 경찰이 아닌, 최형식 본인의 다리를 향하고 있었다. 바로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왼쪽 다리였다.
최형식은 주저 없이 방아쇠를 여러 번 당겼다.
탕! 탕! 탕! 탕!
총에 맞은 부위의 옷이 형편없이 찢어졌다. 하지만 최형식은 아무렇지 않게 서 있었다. 피 한 방울 흘러나오지 않았다.
확신을 얻은 그는 다시 자신의 배에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옷이 찢어지긴 했지만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왼쪽 다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조금 따끔한 감각이 느껴진 정도?
현장 책임자를 포함한 포위 병력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총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직접 눈앞에서 확인한 것이다. 자신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사기가 바닥까지 추락했다.
“내가 굳이 확인시켜준 것은, 당신들이 무모한 선택으로 무의미한 희생을 감수하지 않기를 바래서입니다. 당신들은 나와 달리 돌아갈 집이 있고 반겨줄 가족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괴물을 상대로 의미 없이 죽고 싶습니까?”
“하, 하지만 당신은 살인자요!”
“오늘은 더 이상 아무도 안 죽입니다. 여러분들이 무모하게 덤비지만 않으면 죽일 일도 없습니다.”
오늘은 아무도 안 죽인다.
그 말에 담긴 의미심장함을 눈치 챈 이는 없을 것이다.
최형식은 손을 들어 책임자를 가리켰다.
“당신, 거기 그렇게 숨어 있지만 말고, 지금 바로 언론사에 전화해서 기자들 불러 모아.”
“기, 기자들?”
“빨리. 내가 왜 백씨 일가들을 죽였는지 그 이유가 알고 싶지 않아?”
최형식은 당당했다.
도시 한복판에 미사일을 쏠 리도 없을 테고, 기껏해야 장갑차나 전차 정도만 투입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저들이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하지는 못한다.
‘담성공격대 탱커들은 움직이지 않을 거다.’
그는 그렇게 확신했다.
담성그룹 오너 일가는 자신이 오늘 벌인 학살을 봤다. 아마 단단히 비상이 걸렸을 것이다.
자신이 담성그룹과 특별한 악연이 없다는 사실이, 담성공격대를 침묵하게 만들 것이다.
담성그룹은 굳이 자신을 자극해서 원한을 돌리게 만드는 위험을 자초하지 않을 테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기자들이 몰려 왔다. 이미 그들은 사건 발생을 접하고 근처에서 대기 중이었던 것이다.
이 상황도 그가 구상했던 여러 시나리오 중의 하나였다.
“난 얼마 전까지 백우그룹 직원이었습니다. 하지만 회장 후계자인 백성태 상무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상무실에서 골프채로 얻어맞아 왼쪽 다리를 영영 못 쓰게 됐죠. 그런데 세상은 내 억울함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검찰은 기소조차 하지 않았고, 백우그룹은 푼돈으로 합의를 강요했죠. 결국 본사 앞에서 몇 달 동안 1인 시위까지 벌였지만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기자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번져 나갔다.
경찰들의 표정도 묘하게 변해갔다. 그런 사연이 있었던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나는 내 복수를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합리화하려고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저 내가 하고 싶었던 대로 했을 뿐이고, 지금은 속이 아주 후련합니다.”
최형식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복수가 허망하다는 거짓말을 누가 했는지 모르지만…… 지금 난 너무 상쾌한 기분입니다.”
“백성태 상무한테만 복수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습니까? 왜 백성태 상무의 부모와 삼촌고모들까지 전부 죽인 겁니까?”
“나는 재벌이니까 하층민들은 맷값 좀 쥐어주고 패서 스트레스 풀어도 된다, 사내에 그런 인식을 공공연하게 만든 공동책임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모두 죽였습니다.”
“…….”
“그들이 책임이 없다고요? 그럴 리가요. 내가 백우그룹에서만 몇 년을 근무한 사람인데. 그놈들도 다 똑같은 놈들이고, 똑같은 책임이 있고, 그래서 싸잡아서 씨를 말려야 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백우그룹 핏줄이라면 어린아이까지 다 죽이고 싶었지만, 그건 정말 아닌 것 같아서 이 정도에서 끝낸 겁니다.”
“……이제 당신은 연쇄살인마가 됐습니다. 이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런 무모한 짓을 저질렀습니까?”
“오래 전부터 상상을 했습니다. 내가 만약 탱커가 된다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고요. 일시적인 분노에 취해 저지른 복수가 아니라, 치밀하게 세운 계획에 따라 순서대로 행한 겁니다.”
기자들은 다시 말문이 막혔다.
지금 최형식의 태도, 눈빛, 말투와 분위기를 보면 결코 험악한 살인마 같지 않았다.
최형식은 카메라를 똑바로 보며 웃었다.
“지금 이 방송 보고 있을 사회의 돈 많은 암세포 덩어리들아, 내가 끝인 거 같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한 가운데, 최형식의 차가운 목소리만이 덤덤히 울렸다.
“기억해. 이 사회가 뿌리부터 변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나 같은 놈들이 얼마든지 계속 생겨날 거야.”
최형식은 마지막 발언을 읊기 전, 그 발언을 표절당한 누군가에게 사죄를 올렸다. 혹시 그 사람도 지금 이 생방송을 보고 있을까?
“내 존재를 개인의 일탈로 볼 거면, 마음대로 해라.”
“아, 저거 내 대사인데. 저걸 표절하다니.”
생중계를 보던 유지웅이 혀를 찼다.
연설 같은 발언을 모두 마친 최형식은 재빠른 몸놀림으로 유유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수십 미터를 가볍게 점프해서 도주하는 그의 앞에서, 경찰들의 포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정효주가 팔짱을 낀 채 지그시 화면을 주시하다가 말했다.
“결국 우려하던 대로 됐네.”
“뭐, 수십 년 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쌓였던 업보가 이제 돌아오는 거지.”
유지웅은 어깨를 으쓱했다.
“백우그룹인가? 최소한의 합리적인 경영 의식만 갖고 있었어도 이런 비극은 없었겠지. 적어도 최형식이 일가족까지 몰살하려고 하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최형식은 자신이 백성태에게 당한 것을, 백성태 개인의 책임으로 보지 않았다.
백우그룹 일가가 오랫동안 그룹에서 군림하면서 형성한, 재벌은 왕이고 직원들은 노예라는 경영 사상과 마인드. 그로 인해 자신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여겼고, 그래서 보복 대상을 백성태에 국한하지 않은 것이다.
“근데 지웅아, 이번 각성자는 윤기원 씨하고는 좀 생각하는 게 다른 거 같은데?”
“어떤 의미에서?”
“자기 복수를 끝냈다고 그걸로 잠적하지 않을 거 같아. 기자들 앞에 당당히 얼굴 보이고 할 말까지 다 한 것을 보면, 뭔가 다른 계획이 있는 거 같아.”
“오래 전부터 꿈꿔온 대로 복수를 했다잖아. 뭐, 미리 정해둔 행보가 있겠지.”
유지웅도, 정효주도, 둘 다 이 사건을 크게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감성이 메말라서가 아니라, 와야 할 것이 당연히 왔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그동안 알아본 바에 의하면 이 나라 고위층은 온갖 암덩어리가 득실거렸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억울함을 참고 살아가는 이들이 제법 많았다. 손을 봐야 할 곳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그 축적된 반발력을 유지웅과 정효주가 나서서 억지로 틀어막는다?
그렇게 되면 제니스 타운도 위험에 처한다. 최형식 같은 이들이 제니스 컴퍼니마저 적으로 인식하게 될 테니까.
물론 둘이 위험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제니스 타운 시설에 대한 테러는 막을 수 없다. 둘이 밤낮을 거르지 않고 매일 순찰하며 보이는 족족 그들을 잡아 죽이는 게 아닌 한은.
제니스 타운은 희망의 성지로 남아야 한다.
“정경유착으로 붙어먹어서 자기들끼리 해먹은 정치인과 기업인, 거기에 빌붙어서 이익을 꾀한 법조인과 공무원, 그걸 막지 못한 무기력하고 선동당한 국민들까지…… 모두 이 나라가 공동으로 감당해야 할 책임이자 부채지. 그 상환 청구가 이제 들어왔을 뿐이야.”
“난 그보다 살인병기로 대나무 창을 쓴 게 더 의미심장한 거 같아.”
“어떤 의미에서?”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정효주가 지그시 쳐다보며 묻자 유지웅은 키득거렸다.
“최형식 그 친구, 반란군 우두머리의 자질이 있네.”
그는 다른 무기도 아닌, 하필이면 죽창을 살해 도구로 썼다.
낫이나 호미 같은 무기조차 마련할 힘이 없는 가난하고 힘없는 민초들이 산에서 깎은 대나무창이나마 쥐고 들고 일어선다는 것을 상징한 것이다.
“최형식 그 친구는 분명히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죽창을 든 거야. 너도 나도 공평하게 한 방, 죽창 앞에 모두가 평등해진다, 뭐 그런 걸 강조하고 싶은 거겠지.”
“이번으로 끝나지 않겠구나…….”
“아마 꽤 많은 사람이 죽을 거야. 인도의 비극이 우리 헬조선에 벌어질 줄은 솔직히 몰랐는데. 뭐, 그래도 핵까지 쓰지는 않겠지. 이 나라는 핵은 없으니까.”
유지웅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어차피 한 번은 거쳐야 할 대수술이었어. 수술 겁난다고 미뤄놓기만 하면 병이 더 악화될 뿐이야.”
이 나라의 모두가 외면하고 방치한 모순.
그동안은 그 대가를 청구할 힘이 없었을 뿐이고, 이제는 청구할 힘을 갖추게 되었다.
“어음 날아왔는데 결제 안 하면 부도나는 거지.”
유지웅은 어음을 발행한 적도 없는 자신이 나서서 그것을 중재할 마음 따위는 없었다.
변형택은 가슴이 떨렸다.
절단된 사지를 치료해본 적은 없다. 심지어 잘린 부위는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최형식이 산산조각 내서 욕실에 흘려버렸기 때문이다.
백성태는 진통제를 맞았지만 여전히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다.
변형택은 마른침을 삼킨 채, 그의 잘린 왼쪽 다리에 치유의 힘을 시전했다.
잘린 부위에 빛이 뿜어지는가 싶더니, 그 빛이 조금씩 길어지고 있었다. 참관을 위해 모인 의료진과 백우그룹 수행원들의 눈에 휘둥그레졌다.
“다리가 돋아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