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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웅은 겐이치로파 본가의 서재를 아지트로 삼고 편안하게 지냈다.
겐이치로는 괜히 유지웅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까 아침점심저녁으로 극직한 산해진미를 차려서 갖다 바쳤다.
하루 식비로만 적어도 백만, 이백만 엔은 들었을 것이다. 여기에 술값 등 기타 비용은 별도다. 저건 순수한 밥값만을 말했다.
유지웅은 식사를 하고 난 뒤 가끔 겐이치로에게 잊지 않고 경고를 주었다.
“보안 철저히 해야 하는 거 알지?”
“예썰!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연히 내 처지가 걱정돼서가 아니라 여기 겐이치로파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지. 보안 유지 같은 사소한 거 하나도 제대로 못 지키면 그 분노로 폭발한 내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일 아니야? 안 그래?”
겐이치로는 며칠 전 유지웅을 몰래 저격했던 일을 떠올리며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이 자는 탱커이면서 원거리 딜러다. 복합 능력자다. 그래서 저렇게 혼자 이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머무르는 거다…….’
겐이치로는 최형식 탱커가 한국에서 어떤 일을 벌였는지를 상기했다. 탱커가 작정하고 마음먹으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를 상상했다.
“날 걱정하지 마. 너희들 처지를 걱정하라고. 그게 보안을 지켜야 하는 이유다, 알겠냐?”
“예썰!”
“좋아. 그 기합, 마음에 들어.”
유지웅은 흡족해서 식사를 들었고, 서재를 나온 겐이치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간부들은 전혀 불만이 없었다. 그들은 유지웅을 어쩔 수 없는 천재지변으로 인지했다. 미국 대통령까지 움직일 수 있는 인물인데, 오스카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일개 야쿠자파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서재를 차지한 채 얌전히 틀어박혀서 밥만 축내는 것만으로도 넙죽 엎드려 감사해야 한다.
한편 유지웅은 겐이치로파 아지트에 은거한 채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잊지 않고 지모 대위와 수시로 연락도 가지고, 정보도 제공받았다.
「코이치 센가스로.」
―만 25세. 고졸. 무직.
―키 173cm, 체중 68kg.
―상당히 오래 전 근접 딜러로 각성. 하지만 각성 신고를 하지 않고 주변에도 일체 알리지 않음.
―골수민족주의자이며, 일본인이 세계에서 가장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있음. 중국과 한국을 특히 혐오함. 일본 기업이 중국이나 한국과 거래하는 것에 지독한 반감이 있음.
―일본 정부가 중국, 한국에 특히 유한 외교를 취한다는 불만을 깊이 품고 있음. 그래서 각성 신고를 하지 않고 숨긴 것으로 추정됨.
―72,000점의 약탈 문화재를 6년 간 대여한 것에 극도로 분노하고 있음.
―집안은 매우 가난한 편임. 할트로 오피스텔을 시가 10억 엔에 구매했음. 돈 많은 여자친구로부터 구매자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사실인 것으로 확인됨.
“돈 많은 여자친구라…….”
유지웅은 지모 대위로부터 받은 범인에 대한 조사 내역을 읽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잘생긴 탱커도 아니고 평범한 근딜인데 왜 여자친구가 집을 사라고 10억 엔이나 주지?”
차라리 탱커라면 재벌집 아가씨가 그 외모에 반해서 이것저것 퍼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코이치의 겉모습은 일반인과 크게 다를 바 없이 평범하다.
유지웅은 지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의장님, 지모입니다.」
“보내주신 정보 내역은 잘 봤어요. 코이치의 돈 많은 여자친구는 뭐 하는 사람인가요?”
「처음에는 화류계 마담 뭐 그런 걸로 생각했습니다만…… 의외로 정숙한 집안 아가씨더군요. 미쓰비시그룹 창업주 가문의 사생아입니다. 이름은 카오리 아이라고 합니다.」
“전범기업의 사생아라…… 이거 뭔가 흥미진진해지고 있지 않아요? 지금 나만 그런 생각이 드나?”
「……아, 아무튼 카오리 아이 양은 현재 코이치한테 매우 깊이 빠진 것으로 보입니다. 집을 사준 것 외에 고급 수퍼카도 여러 대 사주고, 생활비로 쓰라고 아멕스 카드도 쥐어줬답니다.」
“이상하지 않아요? 코이치 그 친구가 근딜이라는 거 빼면 잘난 게 하나 없는데, 재벌집 사생아 아가씨가 뭐 때문에 그렇게 목을 매는 거죠?”
심지어 보고서에 카오리는 코이치가 근딜이라는 것을 전혀 모른다고 되어 있다. 아무리 뜯어봐도 카오리가 코이치에게 푹 빠질 만한 정황이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그 둘이 어떻게 만났는지도 신기하다. 물론 보고서에는 거기까지 적혀 있지는 않았다.
“지모 대위, 뭔가 그림이 그려지지 않나요? 한국을 좋아할 수 없는 전범기업 창업주 가문의 사생아와 그 남자친구 근딜, 그리고 그 근딜 놈은 혐한 감정이 무척 심한데다가 북한 화물선만 골라서 테러하다가 잡혔고요. 아, 이거 진짜 뭔가 수상한데. 재미있는 그림이 있을 것 같은데.”
「일단 드러난 것은 이 정도입니다. 좀 더 알아낸 게 있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유지웅은 일부러 코이치에 관심 없는 척 했다.
코이치에 대한 코멘트는 일절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겐이치로 서재에서 열심히 스트리밍 방송도 했다.
일본이 아니라 한국인 것처럼 배경을 새로 꾸미느라고 겐이치로파 간부들이 제법 고생을 하긴 했다.
그 모두가 코이치, 여자친구, 미쓰비시그룹, 그리고 일본을 안심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과연 그 효과는 바로 드러났다.
일본 검찰이 공소 내용을 변경해, 코이치를 단순기물파손 혐의로 기소한 것이다.
“아니, 화물선을 가라앉혔는데 그게 왜 단순기물파손이 됩니까? 일본 검찰들은 도대체 정신머리가 있는 것들인가요!”
「그런데 왜 말투가 그렇게 신나하시는 건지 모르겠…… 아무튼 근접 딜러로 각성한 것을 잘 몰라서 힘 조절이 안 돼서 실수로 배를 파손한 것으로 몰아가는 모양입니다. 그 대신 보험사에는 철저한 배상을 약속했습니다. 덕분에 보험사도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만족하는 편이고요.」
코이치 뒤에는 분명히 배후가 있다. 그리고 그 배후가 이 사건을 묻으려 하고 있다.
유지웅이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되자마자 곧바로 은폐를 위해 나선 것이 분명했다.
심지어 며칠 후 코이치는 보석으로 풀려났다.
사상자도 없고, 단순기물파손으로 기소되었고, 피해 배상도 적절하게 이뤄진 터이다 보니, 보석 석방 절차를 밟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코이치가 보석으로 풀려난 날 밤, 유지웅은 즐거운 마음으로 조용히 아지트를 나섰다.
‘범죄자의 범행은 항상 더 큰 범죄를 위한 예행연습이지. 자, 코이치. 화물선에 잇따라 구멍을 뚫은 것은 대관절 무엇을 위한 예행연습이냐.’
유지웅은 가벼운 걸음걸이로 할트로 오피스텔로 향했다. 바로 코이치의 집이다.
전에 잠금장치를 뜯어냈던 현관문은 말끔히 수리돼 있었다.
안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은 이미 오피스텔 빌딩에 들어서기 전에 확인했다. 코이치는 지금 집에 있다.
유지웅은 비상키를 꺼냈다. 이럴 때를 위해 문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CIA가 슬쩍 빼돌린 것이다. 수리기사도 물론 CIA 요원이었다.
‘손님? 여자?’
신발장에 새빨간 하이힐이 보였다. 손님이 와 있는지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유지웅은 잠시 귀를 기울였다. 그래도 사랑을 나누는 중이라면 어느 정도 기다려줄 용의가 있었다. 그게 매너 아니겠는가.
‘의무방어전은 아니네.’
둘은 거실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이중문과 TV 소음에 묻혀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유지웅은 미리 챙겨온 도청 장치를 중문에 붙이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 디스플레이 단말기를 켰다.
중문을 통해 전해지는 대화 소리가 증폭돼서 녹음과 동시에 그의 귀에 들렸다. 또한 AI가 자동으로 번역한 자막이 디스플레이에 실시간으로 떠올랐다.
―……너무 허술했어, 코이치.
―죄송합니다, 대장.
―하지만 이해한다. 우리도 설마 그자가 직접 나설 줄은 몰랐으니까. 당분간 자중해라.
―예, 대장.
―우리 대일본제국의 욱일을 위해서라도 절대 차질을 빚어서는 안 된다.
―물론입니다, 대장. 맡겨 주십시오!
유지웅은 황당해서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뭐야?”
이건 상상 이상인데?
유지웅은 할트로 오피스텔을 나선 뒤 곧바로 브라우니를 불러 일본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왔다.
연락도 없이 한밤중에 느닷없이 그가 도착하자 정효주도 깜짝 놀랐다.
“이 시간에 말도 없이? 무슨 일 있었어?”
“어, 너무 큰일이라서 너한테 한시라도 빨리 말해주고 싶었어. 그래서 바로 달려온 거야.”
“그래도 전화라도 미리 좀 하지 그랬어.”
“미리 알면 재미없을 것 같아서 놀라게 해주려고. 자, 잘 들어봐.”
유지웅은 방금 전 코이치의 오피스텔에서 자신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자세히 말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도청 녹음한 대화 내용도 보여 주었다.
“그러니까 카오리라는 여자가 코이치의 여자친구가 아니었단 말이지?”
“이 대화를 봐봐. 이 내용, 이 목소리. 누가 봐도 여자친구는 아니지. 틀림없어. 빨대와 빨대통의 관계야. 내가 빨대 많이 거느린 빨대통이기 때문에 더더욱 확신할 수 있어.”
유지웅은 이견의 여지가 없다는 듯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특히 이 부분을 봐. ‘대일본제국의 욱일’이라는 표현이 분명히 들어가 있어. 와, 누가 전범기업 후손 아니랄까 봐 멘트가 아주 그냥 노골적이지 않아?”
“그럼 코이치가 북한 화물선을 습격한 것은?”
“뭔가를 대비한 연습이지.”
“겨우 항구에 정박한 배에 구멍 뚫는 게?”
“실전하고 연습은 그만큼 달라. 머릿속으로 아무리 이미지 트레이닝하고 사격장에서 총을 쏴 봐도, 막상 실전에 나가면 몸 굳는 애들이 많다 이거지.”
“실전을 대비한 연습이다?”
“모형 선박에 백날 구멍 뚫는 것보다 진짜 선박, 그것도 적국 선박에 몰래 침투해서 구멍 뚫는 게 훨씬 더 연습되지. 멘탈 갈고 닦는 데도 큰 도움 되고. 그 카오리라는 여자는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게 틀림없어.”
“그럼 카오리라는 여자는 이미 그런 실전 경험이 꽤 있다는 거네?”
“아마 그렇겠지. 보통 일이 아니야.”
유지웅은 어느 때보다도 열의를 띤 얼굴로 진지하고 뜨겁게 설명했다.
“복잡하게 예 들 거 없이 관동대학살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어. 원래 대일본제국, 욱일 어쩌고 하는 애들 치고 정상적인 놈은 전혀 없다고. 이놈들, 뭔가 엄청난 일을 꾸미고 있는 게 틀림없어.”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철저히 지켜봐야지. 어쩌면 우리 헬조선 본토에 테러를 가할지도 몰라. 그렇다면 아마 제니스 타운이 가장 노리기 좋은 먹잇감이 되겠지.”
정효주도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북한에 불만을 품은 근접 딜러 하나가 화물선 세 척에 구멍을 낸 기물파손 정도로 치부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근데 왜 미국이 전혀 모르고 있을까?”
“가능성은 두 가지. 하나는 나한테 굳이 말해줄 정도가 아닌 일이라서, 이 경우는 우리 헬조선이나 북한에 대한 큰 위협은 없다고 봐도 되고. 다른 하나는 아직 CIA 일본 지부도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추진 중인 일이라는 거지.”
“넌 어느 쪽이라고 생각해?”
“나야 당연히 후자지.”
유지웅은 가슴을 세게 팡팡 치며 대답했다.
“그래야 더 전개가 재미있어지니까?”
“날 뭐로 보고! 내가 딴 건 몰라도 사람 목숨 걸린 것만큼은 진지하다고!”
“미안, 지금 너 표정이 너무 신이 나 보여서 걱정돼서 그랬어.”
“이건 신난 게 아니라 흥분한 거라고. 전혀 다르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