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귀족이다-1309화 (1,309/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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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웅은 곧바로 지모 대위와 김범석을 저택으로 불렀다.

정효주에게 했듯이 자신이 코이치의 오피스텔에서 들은 것을 설명하고, 녹화 내용도 보여 주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지모는 녹음 내용을 들을수록 점점 심각한 표정이 되어갔다.

“지모 대위는 이 내용을 어떻게 생각해요?”

다 듣고 난 뒤 유지웅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고, 지모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유지웅은 판단을 재촉하듯이 덧붙였다.

“처음에는 커플 간에 상황극 같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어요. 왜, 그런 커플들 있잖아요. 어떤 특정한 상황을 설정하고 그에 맞춰 배역을 맡은 다음에 연기를 하듯 자유롭게 노는 거.”

“……차라리 그런 거라면 저도 마음이 편하겠습니다.”

“하지만 상황극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상하지 않나요? 범석아, 네놈 생각은 어때?”

턱을 만지며 깊이 고민하던 김범석은 화들짝 놀라서 재빨리 대답했다.

“저도 주인, 아니 의장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연인 간 상황극으로 보기에는 이상합니다.”

“뭔가 있어. 분명히 뭔가가 있단 말이지…….”

유지웅은 신음을 흘리듯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지모를 똑바로 돌아보고 물었다.

“정말 미국은 전혀 아는 게 없나요?”

“적어도 제가 들은 바는 전혀 없습니다.”

지모는 강조하듯이 말했다.

한국에 체류하며 유지웅의 친구로서 메신저 역할을 하는 그가 일본에서 벌어지는 음모 같은 것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미 필드 요원도 아닐 뿐더러, 더욱이 한국도 아닌 일본 소식은 본부에서 전해줘야 알 수 있다.

“흐응……, CIA에서 지모 대위나 내가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아직 파악한 게 없거나, 둘 중 하나겠지.”

“제가 본부에 연락해서 일본 내에 불온한 움직임이 있는지 좀 더 알아보라고 하겠습니다.”

“아아, 그만 두세요.”

“예?”

지모가 황당해서 반문하자 유지웅은 검지를 세워서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북한 선박 3척이나 침몰할 정도로 일이 진행되고 있는데 아직까지 미국이 파악하지 못했다는 건, 그만큼 녀석들이 치밀하게 준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더욱 이제라도 치밀하게 조사하여…….”

“그만큼 녀석들이 미국이 이 일을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미국이 나서게 되면 녀석들은 큰 타격을 받게 될 겁니다. 그럼 움직이려 하지 않겠죠.”

“……?”

지모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불온한 움직임이 있다면 그것이 본격적으로 구체화되기 전에 막아야 하는 게 맞지 않는가?

“싹만 제거해서는 근본적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요. 아예 뿌리까지 전부 들어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녀석들이 수면 위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요?”

“첩보전이 아닌, 전면전을 원하시는군요…….”

“상대는 레이더들로 다수 구성된 테러 조직이 가능성이 높습니다. 코이치만 봐도 알 수 있죠.”

범죄자의 범죄는 더 큰 범죄를 위한 예행연습이다.

소속 구성원인 코이치가 북한 화물선을 잇달아 침몰시킨 것은 무엇을 위한 예행연습일까?

“만약 그런 녀석들이 크게 놀라서 지하로 숨어들게 되면 다시는 소탕 못합니다. 두고두고 골치를 썩이는 레지스탕스가 돼버리고 맙니다.”

실제로 본래 시간축에서는 지하에서 활약하는 레이더 테러조직 때문에 아직도 골머리를 썩이는 나라들이 제법 있었다. 주로 제3세계와 유럽 일부 국가들이었다.

“CIA는 아직 그런 조직을 상대로 첩보 활동을 벌인 경험이 없습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미국이 그들을 주시하고 있다는 게 알려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두고두고 처리 못하는 테러 조직만 만들게 되는 겁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결국 전면전을 준비해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전면전을 위한 첩보 활동을 할 순 없다는 환경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설명을 듣고 보니 이해가 된다.

“본국에는 제가 잘 정리해서 전달하겠습니다.”

지모는 CIA는 이번 일에서 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첩보 공작이 빠져야 한다는 발상을 납득하지 못할 테니까.

특히 의욕이 넘치는 CIA 국장은 어떻게 해서든지 사전 첩보를 통해 일망타진하고자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확실히 의장님 말씀대로 레이더 테러 조직을 상대로 한 첩보는 경험이 없다. 미숙하기 그지없어. 반드시 실수가 나온다.’

“그럼 수고해주세요.”

“예, 의장님. 편히 쉬십시오.”

지모 대위가 돌아가고, 이제 서재에는 유지웅과 김범석 둘만 남게 되었다.

“범석아, 넌 어떻게 생각하냐?”

질문 내용이 두루뭉술했다. 주인님이 저렇게 하문하실 때는 지엽적인 내용이 아니라 거시적인 방향을 묻는 것이다.

나무가 아닌 숲을 그려가며 대답해야 한다.

“일본 내 불온 레이더 세력들이 제니스 타운이나 주인님을 노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째서? 그게 더 재미있는 전개가 될 텐데?”

재미없는 전개가 된다는 것에 더욱 분개하는 주인님의 반응에 김범석은 무척 송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외람되지만 그렇다고 거짓을 고할 수는 없다.

‘나는 간신이 아니다. 그런 간신배들의 아첨은 하지 않아!’

“머리라는 게 있다면 일본 전체가 나서도 주인님을 어쩌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반대로 머리가 없다면 이미 진작 CIA 일본지부에 그 움직임을 들켰을 겁니다.”

“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군. 일리 있어.”

“일본 극우추종자들의 패턴은 항상 동일했습니다. 반한 감정을 이용해 일본 내부의 다른 목소리를 억누르고, 자기들의 정치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왔습니다.”

“이번에도 비슷한 전개로 간다는 뜻이냐?”

“죄송합니다. 아직은 구체적으로 그들이 뭘 노리는 건지 확신이 안 섭니다. 너무 가짓수가 많습니다.”

“그럴 수 있지. 아무리 너라 해도 이렇게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는 쉽게 판단할 순 없겠지.”

자신을 칭찬하는 듯한 발언에 김범석은 가슴 속에서 뜨거운 감격이 벅차올랐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해라. 범석아.”

“분부하십시오.”

“일본에서 우리가 챙겨야 할 필요가 있는…… 그런 가치가 있는 현물 자산 목록을 한 번 만들어 봐. 문화재든, 금형이든, 귀금속이든, 뭐든 간에 닥치는 대로.”

“……일본 내에 큰 혼란이 일어날 것으로 보시는군요.”

“역시 범석이. 한 마디만 하면 열 마디를 알아듣는군. 똑똑해서 마음에 들어.”

김범석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기뻐했다. 아, 왜 나에게는 꼬리가 없는 것인가!

“알겠습니다. 만약 일본이 혼란에 처할 경우 챙길 수 있는 모든 이익을 고려해서 대비책을 짜보겠습니다.”

“좋아, 그 준비는 네게 맡기마.”

타국이 혼란에 처한 상황에서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정치, 그리고 외교의 기본이다.

한국전쟁 당시 일본이 전략물자 생산으로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들였나? 아마 일본은 한국전쟁이 3년 만에 끝난 것을 지금도 땅을 치며 아쉬워하고 있을 것이다.

“준비된 자만이 과실을 따먹을 수 있다. 알지?”

“옙, 주인님.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네놈이 따로 조사 좀 해봐. CIA가 나서면 겁먹고 숨어들겠지만 담성그룹에서 돌아다니는 건 크게 신경 안 쓸 거야. 지금 담성그룹이 일본에서 벌인 사업이 꽤 있지?”

“소니하고 합작한 사업이 많으니, 그쪽 라인 통해서 움직이면 됩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래, 고생 좀 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정리한 뒤 유지웅은 손뼉을 가볍게 쳤다.

“참, 담성 오너 일가는 요즘 어떻지?”

“그룹 영향력은 사실상 완전히 상실한 상태입니다.”

“네놈만 노난 셈이구나.”

“전부 주인님 덕분입니다.”

김범석은 다시 한 번 송구한 듯이 고개를 숙였다.

600명이 넘는 임직원과 오너 일가의 구속이 장기화 상태로 접어든 지금, 김범석은 그룹 내 최고권한자였다. 모든 임직원들이 앞을 다투어 그에게 결재를 받으려고 줄을 서 있다.

“너무 끌긴 했다. 이제 그만 정리하자.”

“예, 1심결과 나오는 대로 총회 열어서 경영권과 이사 지위 모두 박탈하겠습니다. 그리고 담성전자는…….”

“아, 제니스 컴퍼니에 함부로 편입시키지 마. 괜히 그쪽 분위기가 우리 쪽까지 물 흐리면 곤란해. 일단 울타리 밖에 놔두고 찌든 냄새부터 빼야지, 안 그래?”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재벌들 눈치도 좀 봐야지. 담성그룹 오너 일가 망하자마자 회사 전체가 제니스 그룹으로 들어오면 다들 나를 어떻게 보겠어? 담성그룹 집어삼키자고 일부러 나서서 오너 일가 망하게 만들었다고 오해할 거 아니야?”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래, 담성그룹은 앞으로도 네가 맡아서 관리해. 수익은 덜 나도 좋으니 기술력 축적하고 잘못된 사내 문화도 갈아엎고, 체질 개선 위주로 운영해.”

“옙!”

김범석은 어느 때보다 씩씩하게 대답했다.

유지웅은 김범석을 통해 일본 내에 불온한 움직임이 없는지 유심히 살폈다.

특히 미쓰비시그룹을 중심에 놓고 주의 깊게 관찰했다.

코이치가 ‘대장’이라고 부른 카오리 아이(대외적으로는 코이치의 애인으로 알려진)가 미쓰비시그룹의 사생아였기 때문이다.

김범석은 담성그룹이 가진 일본 내 인맥을 이용해서 미쓰비시그룹 내부의 동향, 그리고 카오리 아이아의 관계를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그는 한때 180조 원이 넘는 ‘일성그룹’ 비자금을 단독으로 관리할 만큼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에 대한 유지웅의 믿음을 배반하지 않았다.

“카오리 아이는 일단 미쓰비시그룹 경영권 확보에 관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경영권 확보?”

“예, 그룹 내 주요 임원들을 비밀리에 만나고 다니며 관계 구축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가만, 근데 방금 ‘일단’이라고 한 것 같은데?”

“맞습니다. 역시 저의 주인님이십니다. 그 미묘한 차이를 단번에 짚어내시다니…….”

주인의 예리함에 다시 한 번 감격하며, 김범석은 조금 더 진중해져서 말을 이었다.

“카오리 아이는 창업주 가문의 사생아입니다. 본래라면 그룹 경영 간섭 같은 것은 꿈도 못 꿀 처지죠. 부유한 삶이 보장되어 있기는 하나 일반적인 재벌딸의 수준에는 전혀 미치지 못하는 수준입니다.”

“흐음, 그렇지. 사생아니까.”

“하지만 코이치한테 쓴 돈만 20억 엔이 넘습니다. 그밖에도 미쓰비시그룹 중역들한테도 적지 않은 돈을 듬뿍 먹였죠. 뿐만 아니라 일본 중앙정치에도 최소 100억 엔 이상의 돈을 뿌린 것으로 보입니다.”

“흐음, 그 돈이 다 어디서 났을까?”

“카오리 아이는 해외여행도 잦은 편입니다. 한 달 중 20일 이상은 보통 해외에 머무릅니다.”

“가만, 혹시 아프리카 같은 낙후 지역 위주로 찾아가는 건 아니겠지?”

“맞습니다. 카오리 아이는 해외봉사활동에 열성적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평생 고아원 한 번 찾아본 적 없는 여자인데 말입니다.”

김범석은 주인에게 이런 보고를 올릴 수 있다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덧붙였다.

“카오리 아이와 함께 움직이는 자원봉사자들은 자기들을 RS봉사단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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