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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치가 카오리를 만난 것은 레이더로 각성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는 아직도 그때의 경험이 강렬한 기억으로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당신이 코이치 센가스로? 근접 딜러 각성자 맞지?”
“그, 그걸 어떻게…….”
“난 카오리 아이라고 해. 나와 함께 가지 않을래?”
그 당시 코이치는 오랜 백수 생활 때문에 집에서도 내놓다시피 한 자식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근접 딜러로 각성했지만, 무엇을 해야 좋은지 알 수가 없었다.
사회생활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기 능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법도 몰랐다.
“나와 함께 가면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줄게.”
“함께……? 뭘 해야 하는데요?”
본질을 두드리는 질문에, 그녀가 입가에 떠올린 차가운 미소는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혁명.”
이상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코이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허황된 꿈이라는 비웃음이 들지도 않았다.
마치 오랫동안 갈망했던 욕구가 뚫고 나올 수 있는 해방구를 찾은 듯한 희열…….
“지금 일본은 썩었어. 썩은물이 고일대로 고였지. 지금의 일본에서 더 이상의 발전이나 도약은 기대할 수 없어.”
“…….”
“난 지금의 일본을 뒤엎고, 권력을 차지하고 싶어. 당신도 날 도와줬으면 해.”
“당신도 레이더? 무슨 클래스죠?”
“탱커.”
“……나 하나 돕는다고 뭐가 달라집니까?”
“북한의 황백호도 홀몸으로 나라를 뒤엎고 최고독재권력자가 되었지. 우리라고 해서 못할 게 뭐가 있지?”
“하지만…….”
“그리고 당신과 나, 우리 둘이 전부가 아니야. 이미 100명이 넘는 동료들이 함께 하고 있어. 100명의 레이더가 뭉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지?”
황백호는 혼자서도 한 나라를 차지했다. 물론 그만큼 북한의 국가 시스템이 낙후되어 있었고, 또 최초의 탱커라는 메리트가 크게 작용한 것도 있으리라.
그에 비해 일본은 안정적인 체제가 완성된 국가다. 아래에서 뒤엎고 무언가를 새로 만든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100명이 넘는 레이더들이 힘을 합친다면, 충분히 해볼 만하지 않을까?
“일본을 무력으로 전복시키는 것은 가능해요. 간단한 일이죠. 하지만 무력만으로 지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건 염두에 두고 있나요?”
“백수 히키코모리인 줄만 알았는데, 의외로 예리하네? 더 마음에 들어.”
카오리의 칭찬에 코이치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내 친부는 미쓰비시그룹 창업주의 핏줄이야. 그룹 내의 몇 몇 중역은 지금 내게 협조하고 있어. 이만하면 대답이 될까?”
“설마 그들도 함께 하는 건가요?”
“아니, 그들은 내가 그룹 장악에 관심이 있는 정도로만 알고 있어. 탱커라는 것은 모르지.”
대재벌의 핏줄.
이상하게 그 사실에 코이치는 마음이 놓였다. 적어도 무턱대고 체제를 전복하고 차지하려는 그릇은 아닐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렇게 코이치는 욱일공격대에 가입했다.
욱일공격대는 대외적으로 RS자원봉사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 존재 자체는 비밀이었으며, 대원들은 모두 레이더 등록을 하지 않았다.
가족들조차 그들이 레이더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오로지 욱일공격대원만이 자신들이 레이더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 욱일공격대는 50명의 탱커와 42명의 힐러, 그리고 15명의 원거리 딜러로 이뤄져 있었다.
코이치의 가입을 축하하기 위해 대원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모였다. 서로 얼굴을 익히고 결속을 다지기 위한 중요한 절차라고 했다.
“이 나라는 썩었어.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권력과 부귀영화를 위해 나라를 움직이고, 자기들끼리 세습을 반복하고 있지. 거기에 우리의 자유와 행복은 없어.”
카오리는 덤덤하게 포부를 밝혔다. 코이치는 그 어느 때보다 집중력을 높인 채 그녀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썩은 정치인들은 결국 자기들의 권력 그늘 아래 우리를 두고 지배하려 할 거야. 우리가 가진 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더욱 우리를 핍박하고 탄압하려 할 거야. 이용당하느니 차라리 우리가 힘을 합쳐서 이 나라를 지배해버리자.”
코이치는 가슴속에서 꿈틀거리는 용기를 주체할 수 없었다. 다른 이들도 자신과 비슷한 감정에 휩쓸린 것이 분명히 보였다.
“황백호 통령도 혼자서 나라를 차지했는데, 우리라고 못할 이유가 전혀 없어. 모든 일본 레이더들의 해방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반드시 이 나라를 차지해야만 해.”
일은 착착 진행되었다.
욱일공격대는 해외봉사라는 명목으로 아프리카 오지 등 제3세계로 잦은 출국을 했다. 그곳에서 힘을 합쳐 괴수를 사냥하고, 사체를 선진국에 비싼 값으로 팔았다.
그 과정에서 해당 지역 원주민들을 대리인으로 내세웠기에 발목이 잡힐 일도 없었다.
원주민들은 단돈 천 달러만 쥐어줘도 뛸 듯이 기뻐하며, 기꺼이 얼굴 마담이 되어 주었다.
선진국들이 공격대 결성이다, 레이더 관리다 뭐다 하고 있을 때, 욱일공격대는 차근차근 미래를 준비했다.
레이드 초기, 괴수 사체는 선진국에 매우 비싼 값으로 팔려 나갔다. 연구재료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던 선진국들은 앞을 다투어 기꺼이 거액을 내고 사체를 사갔다.
단시간 내에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한 마리당 최소 1,000만 달러에서 3,000만 달러까지 받고 팔아치웠으니.
사체를 팔아서 만든 돈만 20억 달러가 넘었다. 엔화로 무려 2,000억 엔이나 되는 거금이었다.
여기에 카오리의 투자 수완이 엄청났다. 그녀는 2,000억 엔이나 되는 돈을 국제선물시장에서 굴려서 3,000억 엔이 넘는 거액으로 다시 불렸다.
그녀는 대원들에게도 인색하지 않았다. 대원 한 명 당 10억 엔이 넘는 돈을 뿌리며 호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게 해주었다. 그 외 나머지 거액은 그녀가 단독으로 따로 운용했다.
“미래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현재를 희생할 필요는 없지. 이 정도는 마음껏 즐겨도 돼.”
굳이 배고픈 시절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바로 카오리의 지론이었다.
“나머지 돈은 내 몫이 아니야. 우리 모두의 몫이자, 활동 자금이지.”
그녀는 2,000억 엔이 넘는 거액을 단독으로 운용했지만, 결코 자기 몫이 아니라 모두의 몫임을 항상 강조했다.
국가 전복이라는 꿈을 꾸는 이들은 그녀가 거액을 만지는 것에 전혀 불만을 품지 않았다. 그들이 품은 목적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 정도 금액으로도 턱없이 모자랄 수 있었다.
일은 착착 진행되었다.
해외 비밀 레이드와 투자금 운용을 통해 공격대 활동 자금은 착실하게 불려 나가고 있었다.
대원들은 카오리의 지시 아래 정치와 행정, 법률에 관해서도 따로 깊은 공부를 했다.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당연히 알아야 하는 지식이라는 것이다.
그런 세심함에 코이치는 다시 한 번 그녀에게 반했다. 이성적인 의미가 아니라 자신을 이끌어주는 리더로서.
대원들은 착실하게 레이드, 공부에 몰두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도 실수 없이 병행했다.
어떤 이는 정치인을 포섭했고, 어떤 이는 자위대 지휘부를 맡았으며, 어떤 이는 우익 세력을 담당했다.
어느덧 욱일공격대는 200명을 넘어섰다.
탱커 수만 거의 100여 명에 달하는 무력 집단, 이 정도면 쿠데타를 실패하고 싶어도 실패할 수가 없을 것이다.
물론 일본 정부에 등록되어 있는 레이더 수가 훨씬 많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자신들이 든 반기 아래 모일 것이다. 카오리의 지도력을 믿는 대원들은 그렇게 확신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썩어빠진 정치인들을 위해서 같은 레이더인 우리에게 반기를 들 사람은 없어. 그리고 우리는 하나로 뭉쳐 있지.”
그리고 마침내 때가 되었다.
북한 화물선을 대상으로 인위적인 침몰 연습을 마친 코이치는 대업의 첫 삽을 뜰 날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 어이 없이 체포되는 불상사를 겪었지만, 카오리가 손을 쓴 덕분에 단순기물파손 혐의로 보석 석방될 수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시간을 끌 이유는 없다.”
다 함께 모인 자리에서 카오리는 대업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접시와 물은 필요 없어. 우리는 기약 없는 이별을 앞두고 있는 게 아니니까.”
실패를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200여 명의 레이더로 구성된 욱일공격대는 그 자체로 막강한 무력 집단이었으며, 사회 다방면에도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니까.
1년도 안 되는 시간이지만 착실하게 대업을 준비했다. 실패란 있을 수 없다.
그들이 진작 일어서지 않은 이유는 바로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코이치, 사흘 후 작전을 시행해. 일본해에서 일본 탐사선을 모두 수장시켜 버려.”
“예, 대장. 실수 없이 해내겠습니다.”
세 척의 일본 탐사선의 침몰.
그로 인한 우익 세력의 준동과 혐한 정서의 발로.
신주쿠에 일어난 대형 화재 참사.
그 모든 것은 욱일공격대가 사전에 설계한 대로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막아! 무조건 막아!”
“절대 들여보내선 안 돼!”
“조센징을 일본 땅에서 쫓아내라! 단 한 명도 일본에 남겨두지 마라!”
“왜 우리를 막는 거냐! 너희는 조센징 편이냐? 아니면 조센징인 거냐?”
코이치는 인파 사이에 몸을 숨긴 채, 어떻게든 한국대사관에 침입하려는 우익 청년단원들을 차분히 바라보았다.
카오리는 일본의 욱일을 바라는 마음에서 욱일공격대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진짜 성향은 우익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좌익이나 중도 쪽 성향도 아니다.
그보다는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남김없이 이용한다는, 극단적인 효율주의에 가깝다.
그녀는 혐한 정서, 혐중 정서, 극단적 민족주의, 배타주의 등을 마냥 터부시하지 않았다.
―혐오와 파괴하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벌레들이지만, 저들도 나름대로 이용 가치가 있지.
그것이 바로 저런 하급 인물들을 바라보는 카오리의 시선이다.
일본을 차지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것도 가리지 않고 이용한다는 것, 바로 그것이야말로 카오리의 진정한 성향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때문에 200여 명의 대원들은 흔들림 없이 그녀를 믿고 따라가는 것이다.
‘카오리는 우리에게 일본을 쥐어줄 것이다. 카오리야말로 우리가 평생 믿고 따라야 할 리더이자, 주인이다.’
코이치는 조용히 품안의 권총을 쥐었다.
근접 딜러인 그는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총을 꺼내 정확히 목표를 맞추고, 다시 감출 수 있다.
이 날을 위해 사격 연습도 충분히 했다.
비교적 한적한 구석으로 이동하는 그의 시선이 날카롭게 다듬어졌다.
마침내 한 우익 청년단원이 경찰의 가드를 뚫고 담을 기어올라 우뚝 서는데 성공했다.
그는 재빨리 권총을 꺼냈다.
총몸을 손수건으로 덮은데다가 팔을 길게 뻗지 않고, 가슴에 바짝 붙인 채로 조준했다. 누가 보더라도 손수건으로 가슴을 닦는 자세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제아무리 뛰어난 군인이라도 이 거리, 이런 자세로는 목표를 맞출 수 없다.
하지만 그는 훈련받은 근접 딜러였다.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
방아쇠를 당기자 한 줄기 총성이 울렸고, 대사관 안으로 뛰어들려던 청년은 머리를 관통당한 채 뒤로 떨어져 내렸다.
“조센징이 일본인을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