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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서 그런 내용을 본 것 같긴 한데…… 어떻게 해결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
“너도 그래?”
「한 줄 정도로 요약하고 넘어간 거 같은데? 특별한 서술은 없었던 거 같아. 나도 네 말 듣고 지금 기억난 거야.」
정효주 역시 과잉 축적 현상에 관해서 막연하게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다’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둘의 입장에서는 그만큼 오래 전(태어나기 전후) 일이기도 했고, 결국에는 잘 해결된 역사일 뿐이었다. 천연두가 뭔지 잘 모르는 세대처럼 말이다.
“뭔가 우리가 기억나는 게 있으면 박사님들한테 힌트라도 줄 텐데.”
「근데 언제까지 거기 있을 거야? 곧 올 줄 알았는데.」
“팔당호 물 갖다 주고 잠깐 결과 좀 지켜본다고 이렇게 됐네. 이제 곧 들어가야지.”
「아마조니온 잠깐 구경 갔다가 졸지에 일이 눈덩이처럼 커졌네. 사건이 있는 곳으로 네가 찾아가는 건지, 네가 있는 곳으로 사건이 찾아오는 건지 모르겠어.」
남미국에 의한 아마존 우림 파괴를 억제한다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아마조니온을 놔둬야 하는가, 아니면 그들의 경제발전을 위해 잡아야 하는가?
아마조니온을 탐색하면서 천천히 그런 판단을 결정하려고 했지만, 전개 방향이 전혀 엉뚱한 데로 번지고 말았다.
이제 아마조니온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존재가 되었다.
「아, 그리고 이번에 회사에서 식량 사들인 거 알지? 사람 먹을 거랑 가축 먹을 거랑 10년치 샀대. 3억 톤 정도 된다고 하네. 지금 한창 운송 중인가 봐.」
“그래? 처음 듣네.”
「보고 못 받았어?」
“응, 못 받았어. 바람직하군. 그런 소소한 안건은 이제 굳이 보고하지 않고 알아서 처리하는 거. 예전에는 이보다 더 작은 안건까지 일일이 들고 와서 물어보는 바람에 귀찮았는데. 우리 사장단도 이제 많이 노련해지셨어.”
「근데 왜 나한테는 보고하는 걸까?」
“효주 네가 그래도 좀 편안한 거지. 이쁘잖아. 원래 안주인은 좀 그런 게 있는 게 좋아.”
「……말이라도 못하면. 어휴.」
그래도 아주 듣기 싫은 말은 아니었는지, 목소리에 웃음기가 조금 서렸다.
“10년치 곡물 비축이라……. 부디 류 사장님의 우려가 우려로 끝났으면 좋겠는데.”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여기서 더 큰 문제가 생기는 건 원하지 않아. 지금도 머리가 아픈데. 수색 작업은 좀 어때?」
“아직 건진 게 없네. 그래도 전 세계 레이더들이 훌륭하신 총사무장님 지휘 아래 열심히 수색 중이니까, 조만간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싶어.”
아마존 강을 오염시키는 1차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지면, 팔당호 오염 사건을 해결하는 것도 한결 쉬워질 것이다.
「아마존 강을 뒤지는 것보다 팔당호하고 그 주변을 뒤지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그렇긴 한데 이미 아마존에 투입한 인력을 다시 그쪽으로 돌리는 것도 좀 번거롭거든. 그래서 내가 뒤져보려고.”
「네가 직접?」
“응, 가만히 앉아서 노느니 그런 거라도 해야지. 오늘 바로 브라질 출국할 거야.”
유지웅이 떠난다고 하자 그동안 나름대로 정든 브라질 관료들이 아쉬워하며 공항까지 배웅을 나왔다.
그는 일일이 악수를 나눈 뒤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정말 제 전용기에 문제가 있었나요?”
“…….”
“있었다는 걸로 해두겠습니다. 크게 서운하지는 않으니까 너무 마음 쓰실 필요 없어요, 하하.”
그렇게 브라질 관료들의 마음에 일말의 찜찜함을 남긴 뒤, 유지웅은 전용기를 타고 한국으로 향했다.
10시간이 넘는 비행시간은 이제 그에게 상당한 지루함을 주고 있었다.
“매번 해외 나갈 때마다 이렇게 오래 걸려서야 원. 그냥 브라우니 타고 다니는 게 더 낫겠어.”
원래 시간 축에서는 비행시간이 이렇게 길지 않았었다.
순항속도가 마하 2 이상인 민항기가 제법 존재했기 때문이다. 항공유를 쓰지 않고 결정체 연료를 쓴 덕분이다.
다만 그런 민항기들은 비행 요금이 다소 비쌌고, 전체 노선의 10% 이하였다.
경쟁적으로 민항기 속도 증가를 꾀했던 항공사들은 굳이 ‘너무 빠르게’ 날아갈 필요가 없다고 암묵적 합의를 본 것이다.
‘민항기는 마하 0.8에서 0.9 정도면 충분하다. 그게 운용비용 절감에 도움이 된다.’
결국 항공사는 비용 절감을 제일 우선시한다. 빠른 속도가 아닌 효율적인 속도를 추구한다.
때문에 석유를 사용하는 이곳보다 더 저렴하고 효율적인 연료를 쓰면서도, 민항기의 최대 항속은 마하 1이 조금 못 되는 수준으로 고착되었다.
“그래도 원래 시간축에서는 마하 2 넘는 속도로 나는 여객기가 전혀 없지는 않았는데, 여기는 얄짤 없네. 그냥 죄다 하늘 위의 굼벵이들이야. 이럴 거면 콩코드는 왜 없앤 거야.”
순항 속도가 마하 1이 조금 못 되는 선에서 정해지는 것은 무슨 운명의 계시라도 되나 싶다.
“안 되겠어.”
전용기 안에서 고민하던 유지웅은 결국 전화를 들었다.
스마트폰에서 전화번호를 검색한 그는 곧바로 번호를 눌렀다. 음성 통화가 아니라 영상 통화였다.
「Hello?」
중년의 백인 남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보잉 사장님 되시죠?”
「Huuuuuuul!」
그제야 유지웅을 알아본 보잉 사장은 허둥지둥하며 크게 소리쳐 누군가를 불렀다. 유지웅은 느긋하게 기다려 주었다.
그가 부른 이는 통역이었다. 각자 통역을 사이에 두고 둘의 통화가 시작되었다.(유지웅은 다수의 영어 통역사가 24시간 교대로 대기한다.)
「아, 이런. 정말 반갑습니다. 이렇게 전화를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갑작스러운데요.」
“그런데 딱 한국어 통역사가 사장실에 대기 중이네요. 조금 신기하네요.”
「하하, 실은 언제 갑자기 전화 주실지 몰라서 한국어 통역 가능한 비서를 새로 뽑았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500대 순위 안에 드는 기업가들은 다 그럴 겁니다.」
최근 미국 CEO들의 트렌드였다.
언제 어느 때 유지웅이 갑자기 전화를 할지 모르니 한국어 통역이 가능한 비서를 채용하는 것.
일전에 유지웅이 뭔가 물어보려고 미국의 모 기업에 전화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통역이 준비되어 있지 않아 원활한 대화가 이뤄지지 못했다. 하필이면 마침 그때 유지웅이 통역 없이 전화를 한 터였다.
덕분에 대화는 소득 없이 종료되었고, 그 기업가는 땅을 치고 후회했으며, 그 소식이 미국 CEO들 사이에 널리 퍼지면서 그런 트렌드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자가용 비행기 타고 집으로 가는 중입니다. 귀사에서 생산한 B-747 기종이죠.”
「아, 그렇군요. 저희 회사 제품을 애용해주시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혹시 불편하신 점은 없으신지요?」
“느린 거 빼고는 다 좋은 거 같네요. 사실 전화를 한 것도 그거 때문이거든요.”
보잉 사장은 둔한 이가 아니었다. 그 한 마디에서 유지웅의 전화 용건을 알아차렸다.
“커스텀 제작 전용기 두 대를 주문하고 싶어서요. 지금 바로 견적 받아볼 수 있을까요?”
전용기 주문 제작을 무슨 게이밍 조립 PC 오너 넣듯이 하는 말투에는 천하의 보잉 사장도 당황했다.
「죄송합니다만, 커스텀 제작이라면 하루아침에 견적이 나오기 어렵습니다. 조금 더 시간을 주셔야 합니다. 일단 원하시는 바를 메일로 보내주신다면 바로 검토해서 결과를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메일로 보낼 것까지도 없어요. 간단하거든요. 일단 주문하고 싶은 건 두 가지 모델입니다.”
「경청하겠습니다.」
“초음속 여객기가 사고 싶어요. 지금 여객기들은 너무 느려서 태평양 한 번 건너려면 기본이 10시간이라서 답답합니다. 최소 3시간 밑으로 끊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정도 속도는 되어야지 이 답답함을 조금 해소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면 차라리 브라우니를 타고 다니는 게 나을 테니까.
“두 기체 모두 동체는 동일하게 해주시되, 하나는 엔진은 설계 단계에서부터 빼주세요.”
「네? 그 말씀은 설마…….」
“우리 연구소에서 항공기 엔진도 제작해보려고 하거든요. 나중에 완성되면 시험 삼아 달아보려고요.”
보잉 사장의 표정에 긴장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설마 제니스 컴퍼니에서 항공 사업까지 손을 대려고 하는가? 그렇다면 막강한 경쟁자가 새로이 등극하는 것이다.
‘아니야. 설마…… 항공역학 기술은 오랜 노하우와 운용 경험이 필요하다. 그저 돈이 많다고 뚝딱 밀어붙일 수 있는 영역이 아니야. 하지만 제니스 컴퍼니라면…….’
엔진 개발이라니?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보잉 사장이 혼란스러워서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도 유지웅의 요구 사항은 계속되었다.
“그러니까 엔진 빠진 모델이랑 엔진까지 있는 완제품 모델, 이 두 기종을 각각 4기씩 총 8기를 주문하고 싶습니다. 언제 받아볼 수 있을까요?”
쿠팡 로켓 주문하듯이 천연덕스럽게 묻는 말투였지만, 보잉 사장은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오늘부터 바로 설계 검토 들어가겠습니다. 기존에 초음속 여객기를 개발하던 전적이 있으니 설계 자체는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설계가 나오면 생산비용 등 판매단가도 나올 겁니다.」
“비싼 건 상관없는데 빠르고 안전해야 합니다. 실용성도 좋아야 하고요.”
「명심하겠습니다. 저, 그런데 항공기 엔진을 제작하신다는 것은 무슨 뜻이신지……?」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엔진을 한 번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이제 연구소에 주문 넣으려고요.”
「예? 이제 주문을 넣으신단 말씀이십니까?」
그제야 상황을 알아차린 보잉 사장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었다.
그러니까 유지웅이 자기 개인적인 취미를 위해서 시험 삼아 새로운 엔진을 만들어보겠다는 것 아닌가? 게다가 이제 막 시작해볼까 하는 상황이고?
‘놀랐잖아.’
이제부터 엔진 개발을 시작한다면, 아무리 날고기는 전문가들을 동원해도 적어도 10년은 지나야 시제품이 나올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보잉 사장은 비로소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럼 잘 부탁합니다.”
「중간 경과 자주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유지웅은 록히드마틴사에도 다시 전화를 걸어 동일한 견적을 넣었다. 노스롭그루먼 사에도 연락을 취했다.
미국의 3대 항공업체에 동일한 오더를 넣은 것이다.
“누가 제일 잘 만들까? 이제부터 설계 시작한다 치면…… 받아보려면 못해도 2년은 걸리겠지? 어휴, 진작 오더 넣을 걸.”
전화를 끊고 투덜거리던 유지웅은 아차 싶어서 얼른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프랑스였다.
“거기 에어버스죠? 제가 커스텀 기체 제작 주문을 하나 넣으려고 하는데요. 네? 장난 전화 아니니까 빨리 사장님 좀 바꿔주시겠어요? 아니, 제가 할 일 없어서 통역까지 써가면서 프랑스에 장난 전화를 뭐 하러 겁니까. 아, 제발 사장님 좀 바꿔주세요. 배송 주문할 게 있단 말이에요.”
미국 기업들의 트렌드를 따라가기에, 프랑스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인가 보다.
유지웅은 어렵사리 에어버스 사장과 연락이 되었고, 무사히 원하는 주문을 넣을 수 있었다.
“온라인 주문 한 번 더럽게 힘드네. 잊지 않겠다, 프랑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