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귀족이다 1441화
[헬조선 편]
82장 아,의장님!(5)
유지웅은 흠칫했다.
설명하기 힘든 엄청난 충격이 그의 정신을 강타했다.
태어나서 이런 일을 겪으리라고 상 상해 본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재빠른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카메라! 카메라!’
하필이면 이런 중요한 순간에 전용 카메라 장비가 없어!
유지웅은 아쉬운 대로,휴대폰을 셀카 방송용 모드로 설정한 후 영상 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간다,생방송?’
유지웅은 송출과 녹화를 동시에 작 동시 켰다.
시청자들한테 방송 시작 멘트를 던
질 틈도 없었다.
언제 사라져 버릴지 모르는 저 원 념을 붙들고 있어야 한다!
“당신의 이름은 뭐죠? 어떻게 이곳 에 왔습니까?”
“돈 벌려고. 열심히 일하면 돈을 준댔어. 그 돈을 모아서 소도 사고 집도 사고 장가도 가려고.”
남자는 느리지만 분명한 말로 말했 다. 유지웅은 재차 물었다.
“이름은 뭐죠?”
“……모르겠어. 내 이름이 뭐지? 자네는 아나?”
검댕 사이로 하얗게 빛나는 눈동자 가 잠시 일그러졌다.
두통이 밀려온 듯 남자는 두 손을 들어 머리를 움켜쥐었다.
녹슨 고통이 묻어나는 몸짓은 이십 대 같아 보이기도 했고,삼십대 같 이 느껴지기도 했으며,사십대나 오 십대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언제 집에 갈 수 있나?”
방송을 위해 이런저런 멘트를 잔뜩 생각해 두었던 유지웅은 말문이 턱 막혔다.
애절함이 가득한 눈빛 속에서,그 는 열심히 생각했던 수많은 멘트를 몽땅 잊어버렸다.
“전쟁은 아직도 안 끝났나?”
“전쟁은 끝났어요.”
“그래…… 당연히 우리 일본이 승 리했지?”
유지웅은 그 순간 멈칫 했다.
지금 남자는 분명한 조선어로 말하 고 있다. 현대의 억양이나 단어와는 다르지만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는 된다.
그런데 일본어를 쓰지 않는 그가
'우리 일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무슨 말씀이세요. 일본은 당연히 패배했죠.”
그 순간 남자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졌다.
검은 동공 속에 자리 잡은 것은 설명하기 힘든 패색과 좌절뿐이었 다.
일본의 패전이라는 말에,저 남자 는 세상이 무너진 듯이 절망하고 있 었다.
“이봐요. 일본은 패전하고 조선이 독..”
그 순간 거짓말처럼 남자의 모습이 스르르 사라졌다.
마치 허공에 깨끗이 녹아버린 것처 럼,아무런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이게 무슨……
유지웅은 멍하니 선 채 남자가 있 던 곳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썩고 낡아빠진 나무 갑판 더미만이 을씨년스럽게 남아 은은한 바람 소 리를 홀리고 있었다.
“아차! 동생들,어땠어?”
그는 퍼뜩 생각나서 방송을 확인했 다가 놀랐다.
“뭐야? 생방이 아니었잖아?”
분명히 송출을 켰는데,방송이 전 혀 송출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일시적인 오류가 발생한 건가 싶었다.
“다행히 녹화는 되고 있었군. 휴, 안심.”
유지웅은 얼른 녹화 영상을 확인했 다.
하지만 재생 영상을 처음부터 끝까 지 확인한 그는 이내 입을 떡 벌리 고 말았다.
“맙소사,이게 뭐야?”
놀람게도 영상 속에서는 그 남자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낡은 벽을 상대로, 자신 혼자서 떠드는 음성만이 홀러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 * *
「세상에 귀신은 없습니다. 저에게 는 그런 가설은 전혀 필요하지 않습 니다.」
유지웅은 ‘저 귀신 봤어요,귀신!’ 이라고 호들갑을 떨며 최윤에게 연
락했다.
하지만 최윤은 다소 쌀쌀맞다 싶을 정도로 냉정하게 유지웅의 생각을 고쳐 잡았다.
「스마트폰 카메라에도 아무것도 찍히지 않았다고 하셨잖습니까. 의 장님이 일시적으로 환각,환청을 겪 으신 겁니다. 기계는 절대로 거짓말 을 하지 않죠.」
“아니,제 정신은 멀쩡했다니까요. 제가 LSD K)kg을 원샷 해도 1초도 안 돼서 100% 완전 해독하는 간을 갖고 있는데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 세요.”
「LSD요? 그게 뭐죠?」
“아,옛날에 재벌 딸래미 하나가 바리바리 싸들고 들여온 마약 있잖 아요. 그래놓고 유통 목적 혐의가 없다며 단순복용자로 기소유예 처분 받은 그 마약이요.”
「……암튼 엄청 쎈 마약이라는 거 군요.」
“네,제가 그런 걸 사발로 들이켜 도 끄떡없는 신체를 갖고 있다고요. 그런데 환각이나 환청 따위를 설마 볼 거 같아요?”
「하지만 카메라에는 아무것도 찍 힌 게 없잖습니까.」
“그러니까 카메라가 환각을 본 거 죠. 환청을 들은 거고요.”
「카메라가 환각을 볼 수 있습니 까? 아니,그전에 카메라가 환각을 본 거라면 영상에 이상한 게 잡혀야 하는데,아무런 특이점도 없이 멀쩡 한 흉가 배경뿐이었는데요?」
“아무튼 전 분명히 똑똑히 봤다고 요.”
물론 최윤은 유지웅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카메라 녹화 영상에는 너무나 깨끗 하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고, 또 유지응의 목소리만 담겨 있었기 때
문이었다.
차라리 유지웅이 환각을 봤거나, 혹은 자신을 놀리기 위한 몰래카메 라를 준비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리 라.
그것이 최윤이 과학자로서 내린 합 리적인 결론이었다.
‘아,답답해 죽겠네. 이 양반,왜 자꾸 내가 몰래카메라를 하는 거라 고 생각하시는 거야? 내가 그 정도 로 방송에 영혼과 지인들을 팔아먹 은 사람은 아니라고!’
지인을 대상으로 몰래카메라 방송 을 한 적 없는데 말이다.
유지웅은 일단 한 발 타협하기로 했다.
“좋아요,그럼 일단 제가 본 게 남 들은 보지 못하고 저만 본 유령 환 각이라고 가정을 하고 이야기를 계 속해 보죠.”
「말씀하시죠.」
“일본이 패전했다니까 그 사람은 왜 그렇게 세상 무너지는 것 같은 반응을 보였을까요?”
유지웅은 그 점이 몹시 궁금했다. 하지만 뻣속까지 공돌이 출신인 최 윤이 과연 알까 싶었는데…….
「아,그거야 당연하죠. 그 사람
입장에서는 자신이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으로 알고 있을 테니까요.」
“네?”
「일제강점기 말기에 취해진 민족 말살정책 말입니다. 말 그대로 조선 인이라는 개념을 없애 버리는 정책 이에요. 모든 조선인으로 하여금 자 기는 일본 신민이다 라고 생각하도 록 어린 시절부터 장기에 걸쳐 세뇌 학습과 교육을 하는 거죠.」
“헐,난 왜 몰랐죠.”
「그럴 수 있죠. 아무튼 그래서 해 방 직후에는 오히려 조국이 패망했 다고 슬퍼하는 조선인들도 많았습니
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그 유령의 반응은 크게 이상할 건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증을 디테일하게 하신 걸 보면,아무리 봐도 몰래카 메라가 맞는 거 같은데요?」
“아,진짜 몰래카메라 아니라니까 요. 제가 진짜 환각이 아니라 유령 을 본 거라고는 생각 못 하세요?”
「환각이나 몰래카메라가 아니면, 당연히 그 영상에 그 유령의 모습이 잡혀 있어야죠. 아무튼 전 바뽑니다. 그리고 예산 좀 더 주세요. 요즘 돈 없어요.」
“알아서 갖다 쓰세요. 너무 불친절 해서 저 지금 서운하려고 그래요.”
통화를 끊은 유지웅은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며 투덜거렸다.
“환각이라고? 이 양반이 무슨 말 을! 내가 도저히 빼도 박도 못할 증 거를 잡아서 가져오겠어!”
어쩌면 카메라 성능이 부족해서 그 러는 게 아닐까?
유지웅은 고이 접어서 가져온 자신 만의 초고성능 만능 카메라를 꺼냈 다.
“스마트폰 따위로 찍어서 그래. 전 용 장비로 찍으면 분명히 다를 거 야.”
幸 ♦ ♦
유지웅은 그날 밤, 흉가 사이를 돌 아다니며 열심히 유령을 찾아다녔 다.
하지만 출몰 장소 주위를 맴돌아도 유령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뭐야? 설마 낮에만 나타나는 유 령,뭐 그런 건가? 이럼 안 되는 데……
유지웅은 투덜거리며 계속 주변을 샅샅이 수색했다.
30분 넘게 허탕을 치자 수색 범위
는 점점 넓어졌다.
그러다가 그는 어느 수직 갱도를 발견했다.
반쯤 무너진 수직 갱도는 미처 희 수되지 못한 철모가 덩그러니 방치 된 채,흙먼지로 가득 덮여 있었다. '오예!’
그리고 유지웅은 쾌재를 불렀다.
남루한 옷을 입은 남자가 등을 돌 린 채 갱도 입구 앞에서 쓸쓸히 앉 아 있는 걸 발견한 것이다.
뒷모습만 보여서 긴가민가했지만, 낮에 봤던 그 유령이 틀림없었다.
유지웅은 카메라를 켰다. 혹시나 싶어서 일부러 송출 기능은 꼈다.
지금 이 으슥한 시간에,이런 무서 운 배경에서 유령 방송을 보게 되면 시청자들 심장에 좋지 않을 테니까.
송출 기능이 낮처럼 정체불명의 오 류를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이봐요.”
유지웅이 부르자 유령이 뒤를 돌아 봤다.
여전히 20대로도,40대로도 보이는 다양한 세월을 가진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얼굴 가득 묻은 검댕을 지우면 조 금이라도 나아지려나.
“자네는……
유령은 다행히 유지웅을 알아보았 다.
하지만 구체적인 기억을 떠올리기 는 쉽지 않은 둣,머리를 잡은 채 끙끙거리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만났던 것조차 헷갈릴 정도로,기억 상태가 온전치 않은 모양이었다.
“이상하군. 분명히 어디서 봤는 데..
“아까 전쟁이 끝났다고,일본이 망 했다고 말해준 사람입니다.”
“맞아,그랬었어!”
그제야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외쳤다.
남자의 눈빛에 다시금 복잡한 두려 움이 어렸다.
유지웅은 조심스럽게 남자의 반응 을 살폈다. 일본의 패망에 놀라서 또 아까처럼 사라져 버리면 곤란하 다.
다행히 두 번 반복하지는 않을 모 양이다.
“그럼,그럼 이제 나는 어떻게 되 는 건가? 승전하면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그 말 하나만 믿고 지 금까지 열심히 곡평이질을 했는 데……!”
“당신 집이 어디입니까? 조선인가 요,일본인가요?”
“그게 무슨 말인가? 조선이 어디 있다고?”
유지웅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역시 최윤의 설명이 맞았다. 민족 말살정책에 세뇌당한 이 남자는 자 신이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이걸 어디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한다……
출몰 시간이 다하기 전에 꼭 필요 한 정보만 전달할 수 있을까?
괜히 충격적인 이야기를 했다가 또 사라져 버리면 어떡하지?
“일본은 패전했고,조선은 해방되 었어요. 그리고 그로부터 지금 대충 60년 넘게 지났고요.”
“뭐라고? 60년이 지났다고?”
“정확히 60년은 아니고 67년 정도 지났는데……
“67년! 그럼 내가 이제 85살이란
말인가! 그럴 수 없어!”
“거,거짓말하지 마요! 그 얼굴에 그 말투가 어떻게 18살이라는 거 야!”
유령과 유지웅은 서로 다른 의미 로,그리고 서로 같은 크기로 경악 했다.
“아,안 돼! 가지 마!”
유령의 모습이 또다시 순식간에 사 라져 버렸다.
아무래도 감정을 동요하게 만들면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 리는 것 같다.
유지웅은 허탈해져서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얼른 카메라 영상을 확인했다.
“또 아무것도 안 찍혔잖아! 이런 망할!”
♦ 木 *
최윤은 여전히 유지웅이 몰래카메 라를 추진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 다. 할 수 없이 유지웅은 방향을 틀 었다.
“좋아요,그럼 제가 몰래카메라를 하고 있는 게 맞다고 가정하고 이야 기를 합시다. 그러니까 최 소장님은
제가 소장님을 놀리려고 하는 걸 이 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저한테 맞 장구를 쳐주는 겁니다. 그럼 나중에 몰래카메라가 나와도 웃음거리가 될 일이 없겠죠?”
「그런 전제하에서라면 얼마든지 어울려 드리죠. 연극 하는 셈 치면 되니까요.」
“그러니까 만약 제가 본 유령이 정 말 유령이라 가정하면,과학적으로 이걸 어떻게 설명 가능할까요?”
최윤은 한참 동안 생각한 뒤 말했 다.
「모든 건 의장님이 거짓말이 아니
라 사실대로 말했다고 제가 억지로 가정을 한 상황에서 어울려 드리는 겁니다.」
“알았다니까요.”
「다음에 만나면 그 유령한테 한 번 물어보시죠. 결정체 생김새를 설 명하면서,혹시 그런 돌을 본 적이 있느냐고요. 전 결정 에너지가 의심 됩니다만.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