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점수 보니까 더 이상은 안 되겠다."
"……."
김명철 샘은 내 성적을 보고 가망이 없다고 느낀 모양이다.
[국어 72], [수학 54], [영어 78], [한국사 37], [물리2 32], [화학2 31]
만약 고등학교 내내 놀고 재수로 공부를 처음 시작한 학생이 6월까지 죽도록 노력해서 이 정도 점수를 받았다면 칭찬해 줄 만한 점수다.
하지만 삼수생인 나에겐 가당치 않은 점수였다.
"너 다른 진로 알아봐라. 공부는 너랑 아닌 거 같다. 오해하지 마. 내 입장에서 원생 늘어나면 돈 벌고 좋아. 근데 이건 낭비야."
"하지만……."
"변명은 됐고. 솔직하게 말할게. 난 될 학생만 가르치고 싶다. 2년째 널 지켜본 입장에서 말하는 거야. 더 이상은 너도, 나도 돈 낭비, 시간 낭비야. 정 뭘 할지 막막하면 일단 군대를 가."
"……."
샘의 표정에서 지독한 냉소가 묻어났다.
날 정말 포기할 생각인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하지.'
내가 자초한 결과니, 샘을 욕할 생각 없다.
나는 변명 같은 건 하지 않고 노트 한 권을 내밀었다.
"……?"
"오답 노트요. 어제 시험 본 거 정리했어요. 한 번만 봐주세요."
명철 샘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노트를 받아 든다.
사락- 사락-
천천히 노트를 들여다보는 샘.
다시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내 공부 의지를 말로 변명하는 대신, 저 노트로 대신한 것이다.
"이거……."
"네."
"네가 정리한 거냐?"
"네."
"어제?"
"네."
명철 샘이 미간을 좁힌다.
"이 정도 양을 어제 다 정리했다고?"
"집중하니 못 할 것도 없던대요?"
"……."
내가 만든 오답 노트는 틀린 문제와 해설을 대충 오려 붙인 오답 노트가 아니다. 그런 건 정리를 위한 정리일 뿐이고 하등 공부에 도움이 안 된다.
우선 문제를 왜 틀렸는지 진단해야 한다.
단순히 실수인지, 아니면 아예 몰랐던 건지.
실수라면 왜 실수했는지 간단히 기록을 남긴다.
그리고 몰랐다면 풀이 과정에 오류가 있던 건지 아니면 개념 자체를 오해했던 건지 파고든다.
정리를 마치고 한 줄의 느낀 점을 남겨 마무리한다.
오답 노트는 두 번, 세 번 다시 봤을 때 내가 무엇이 부족했는지 명확하게 느끼고 공부에 도움이 될 수 있게 정리해야 오답 노트다운 것이다.
"흠……. 믿기지가 않는데. 누가 도와줬어?"
"진짜 제가 혼자 했어요. 제가 그동안 공부를 게을리하긴 했지만 공부 방법조차 모르는 건 아니라서요."
사실 도움을 받긴 했다.
마법이라는 도움을.
하지만 집중력과 평정심과 정신적인 상쾌함 외, 오답을 정리한 건 순전히 내 판단이었다.
"이건 좀 고무적이긴 하네. 그래서, 앞으로 열심히 공부하시겠다?"
"네. 그러니까 학원은 계속 다닐 수 있게 해주세요."
"갑자기 이러는 이유는? 내가 학생들 수도 없이 봤는데 사람 변하기 힘들다? 이게 반짝 온 변덕인지, 아니면 진짜 변화인지 어떻게 증명할래?"
"음……."
내 속마음을 꺼내 보여줄 수도 없고.
진지한 내 의지를 증명할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김명철 샘이 먼저 말했다.
"매주 토요일에 보는 쪽시험. 매번 응시하고 점수 상승시켜라."
"……!"
쪽시험.
종합반에서 매주 제공되는 일종의 서비스다.
과목별로 10~20 문제 정도가 출제되는데, 문자 그대로 종합반의 서비스 차원이라 수험생들은 그걸 볼 수도 있고 안 볼 수도 있다.
자유로운 시험이지만, 그것도 어쨌든 시험.
'하지만… 지금 나한테 선택권은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요."
"……."
그러자 명철 샘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긴다.
내가 이걸 수락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이영원."
"네?"
"사실 너 때문에 민원을 좀 받았어."
"네……?"
"너 공부 제대로 안 해서 학급 분위기 망친다고."
"그, 그런……."
수험생이 되면 사소한 분위기에도 쉽게 영향을 받는다.
옆 사람이 공부 좀 안 한다고 그게 무슨 대수냐 싶을 수도 있지만, 예민한 수험생 입장에선 그조차 눈엣가시일 수도 있다.
"내 입장상 그 애들의 말을 그냥 넘겨들을 수 없어. 어쨌든 그 친구들은 공부를 하려는 입장이고, 넌 그동안 아니었으니까."
"그, 그건 그렇죠……."
"나한테만 증명하는 거로 부족해. 그 친구들도 널 인정하게 만들 자신 있냐?"
"……."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폐를 끼칠 순 없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예. 반드시 인정하게 만들게요."
"좋아. 그럼 이게 진짜 마지막 기회야. 딱 한 달."
"……."
"한 달 동안 한 주라도 쪽시험을 거르거나 점수가 떨어지면 아웃이야. 오케이? 한 달이 지나면 난 널 인정해 준다."
아무래도 이제부터 생존전이 될 것 같다.
평소라면 절대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뭐든 실전에 들어가면 이 고질적인 유리멘탈이 말썽을 부릴 테니까. 뻔히 질 싸움은 애초에 피하는 게 맞다.
하지만, 이제 피하지 않는다.
나는 달라졌고, 날 도와줄 마법도 있다.
"…예."
나는 차분하게 대답하는 것으로 상담을 마쳤다.
* * *
과목별 수업 복습을 마쳤다.
직후 복습을 실행하고 교제 단권화 작업을 한다.
단권화 작업은 내가 알고 모르는 걸 명확하게 정리하는 작업이다.
단권화 작업은 과정 자체가 공부이기도 하거니와, 나중에 핵심적인 개념과 취약한 단원을 빠르게 짚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최후 시험 당일 전날, 모든 과목을 전부 훑어 복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단권화뿐이다.
"후……."
아직 마나가 보충되지 않아 집중력에 마법의 도움을 받진 못했지만, 상담에서 얻은 긴장감이 약간의 도움이 되었는지 나는 그다지 딴생각하지 않고 자습을 마칠 수 있었다.
이제 오후 6시.
우리 종합반은 여기서 학원 일과를 마친다.
남은 건 집에서 스스로 자습하는 일만 남았다.
드르르륵-
귀가하는 사람들을 따라 나도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서 문제 풀이랑 부족한 개념 공부 하고 자자.'
집에 갈 때쯤이면 마나가 채워지고 한 번은 더 콘센트레이트를 쓸 여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나름대로 공부 계획을 세운 뒤 학원을 나섰다.
"저기, 형!"
"……?"
그런데 내가 학원을 막 나섰을 무렵, 뒤에서 박종석이 불러 세웠다.
"형 오늘 같이 술 한잔하기로 했잖아요."
그러며 손가락으로 소주 잔 기울이는 시늉을 보인다.
"아, 미안. 나 집에 일 생겨서."
"거짓말! 형, 오늘은 소현이랑 예림이도 온다니까요?"
"……."
"그냥 술 마시고 노는 자리가 아니라 공부에 서로 윈윈하는 스터디 모임이에요."
"하지만……."
아마 오늘 모이는 애들은 6월 모의고사도 다 잘 봤을 테다. 감만 잘 유지하면 원하는 대학교 학과에 진학할 수 있는 녀석들.
그들에겐 오늘 술자리가 그저 모의고사 뒤풀이이자 추진력을 위한 쉼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당장 스프린터처럼 무호흡으로 뛰어가도 모자란 형편이다.
"공부하는 사람들끼리 어울리면 형한테도 좋아요. 형도 마음 잡고 싶은 거 아녜요?"
"……."
공부하는 사람들끼리의 모임이라.
박종석이나, 다른 남자애들은 어쩐지 몰라도 확실히 두 여자애들은 탑급 수험생이다.
나는 박종석의 말에 살짝 흔들렸다.
'…공부하는 애들과 사귀어두면 언젠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어쩐담?'
* * *
초저녁, 학원가의 어느 호프집.
거기에 다섯 남여가 둘러앉았다.
"건배~!"
박종석의 건배 제의로 다섯 잔이 한데 부딪힌다.
"자, 안면은 다 있을 테니까 간단히만 소개할게. 이쪽은 오정환, 이쪽은 심용호. 고딩 때부터 내 친구들이야. 전부 대한대 목표로 하고 있어."
"안녕."
"안녕."
이소현과 홍예림이 박종석의 친구들과 인사했다.
다섯은 모두 상위권 대학을 노리는 수준급 수험생이다.
평균 2등급인 박종석이 가장 하위일 정도.
"근데 한 명 더 온다고 하지 않았나? 그 삼수 오빠."
홍예림의 질문에 박종석의 안색이 안 좋아졌다.
"아 그게… 아, 씨.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이 새끼 어딜 빼려고, 흐흐."
오정환과 심용호가 박종석에게 손을 내민다.
박종석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지갑에서 수표를 꺼내 둘에게 한 장씩 쥐여줬다.
홍예림이 물었다.
"뭐 하는 거야?"
"아, 사실 내기했거든. 그 형 오늘 모임에 올지 안 올지."
"……?"
"그 형 얼굴은 반반하고 괜찮은데 왠지 모르게 아싸 기질 있잖아. 어제도 술자리 있어서 불렀는데 빼더라고. 그래서 오늘은 오는지 내기했지. 내기에 너희 둘 이름을 좀 팔았어."
"뭐? 우리 이름 팔아서 내기했단 말이야?"
"응. 아오, 근데 진짜 오늘도 안 오네."
이소현은 얘기가 재미있는지 말없이 씩 웃으며 맥주잔만 기울였고, 홍예림은 퉁명스러운 듯한 말투로 말했다.
"야, 너희들 너무 짓궂다. 그 오빠 공부는 못 해도 착해 보이던데. 왜 놀리는 거야."
"에이~ 놀리긴. 그냥 우리끼리 내기한 거뿐인데."
오정환이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그 얘기는 됐고. 너네 이번 평가원 어땠어? 당연히 잘 봤겠지만."
"평이했던 거 같은데?"
"영어 38번. 그거 맞혔어?"
오정환의 질문으로 대화는 평가원 모의고사 주제로 넘어갔고, 이영원은 대화에서 스륵 잊혀 버렸다.
다섯 남여는 평가원 문제 중 화두가 된 몇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입시 정보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마침 박종석을 제외한 네 사람 모두 대한대를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이 잘 통했다.
특히 이소현, 홍예림은 이미 수능 대비를 끝냈고 의대 면접까지 신경 쓰고 있는 수준이다.
"대단하다. 소현아, 예림아 우리 좀 잘 이끌어줘라. 우리도 너희가 도움 필요한 거 있으면 발 벗고 도와줄게. 아 참, 우리 아빠가 압구정에서 성형외과 하거든? 너희는 이미 완벽하지만 너네 친구들 중에 필요한 애 있으면 말해, 싸게 잘해줄게."
"얘가 뭐라는 거야? 하하."
오정환의 말에 두 여자가 웃었다.
남자들은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는 두 여자들에게 관심이 많은 듯했다.
"일단 우리 카톡방이나 하나 만들까? 같이 정보도 공유하고 해이해지지 않게 서로 채찍질도 해주고."
"괜찮을 거 같은데?"
오정환의 제안에 남자들이 맞장구쳤다.
여자들도 썩 싫진 않은 모양이다.
입시는 공부가 첫 번째지만, 그만큼 중요한 게 정보다.
비슷한 성적이면 정보력이 운명을 가른다.
무엇보다, 남자애들이 얼굴 반반하고 싹싹한 데다, 공부도 잘하고 집안도 좋다.
"난 콜~ 나쁘지 않은 거 같아."
홍예림이 먼저 콜을 외친다.
대충 술자리가 결말로 이어질 때쯤, 단톡방이 하나 만들어졌다.
"다음에도 술 한잔하자. 9월 평가원 끝나고?"
"그 전에 필요하면 한 번 더 봐도 되고."
그때 박종석이 말했다.
"그땐 그 형도 다시 불러내겠어. 한 번 더 내기해!"
"에이, 그 형을 뭐 하러 또 불러~"
오정환의 말에 박종석은 고개를 저었다.
"나만 뜯길 순 없잖아."
"그땐 또 누구 이름 팔려고."
이소현의 너스레에 사람들이 웃어젖혔다.
그때 심용호가 말했다.
"뭐, 내기는 좋은데. 아마 그 형은 조만간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
그 의미심장한 말에 홍예림이 물었다.
"왜? 그래도 오늘 보니까 꽤 열심히 하던데. 모르잖아. 계속 열심히 해서 성적 올릴지."
"맞아. 공부를 제대로 안 하긴 해도 중도에 그만둘 형은 아니야."
박종석도 거들었지만 심용호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얼마 전에 내가 담임한테 항의했어."
"뭔 항의……?"
"공부 분위기 흐리니까 좀 내보내라고."
네 사람은 모두 헐 하는 표정이 되었다.
모두 심용호 같은 생각을 한 번쯤은 해도 그걸 실제로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오늘도 담임이랑 상담하면서 그 형 모의고사 점수 어땠냐고 물어봤거든? 근데 그냥 웃기만 하더라."
"아, 진짜?"
"얼마 못 버틸 거야. 담임한테 한 소리 들었을 텐데 자존심이 있으면 곧 나가겠지."
"이 새끼 이거, 완전 악마 새끼였네? 크크."
박종석은 심용호의 뒤통수를 휘적였다.
그러자 심용호가 반론한다.
"악마는 무슨~ 빨리 제 갈 길 찾게 해주는 게 좋은 일 하는 거지!"
"아니지 이 바보야."
박종석이 검지를 휘저었다.
"한 명이라도 더 우리 밑을 깔아줘야 우리가 상대적으로 더 높아질 거 아니냐. 한 가지만 알고 둘은 모르는 녀석!"
"이거이거, 박종석이. 루시퍼도 한 수 배우고 갈 놈이네?!"
"와하하하!"
다섯 사람은 같이 웃었다.
"아무튼! 내기하자! 그 형이 계속 버티는지 못 버티는지!"
"좋아, 그 내기엔 우리도 낄래. 9월 모의고사 전까지로 기한 정하고."
"그래! 콜!"
무르익은 상위권 재수생들의 모임은 다시 이영원 이야기로 돌아와서야 완전히 매듭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