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형 대마법사-5화 (5/318)

제5화

-형, 오늘 룰 한 판? 어제 뺐으니까 오늘은 같이해야지!

-영원아. 술 한잔할래? 너한테 할 얘기도 좀 있고. 민지도 관련된 얘기야.

-야, 삼수 생활은 어떠냐? ㅋㅋㅋㅋ 6월 평모 잘 봤냐?

-영원아 오늘 너희 동네 지나가는데 함 보자. 성원이도 같이 간다.

박종석의 끈질긴 술 권유를 물리치고 집에 돌아왔다.

"후우……."

하지만 박종석만 문제가 아니었다.

같이 게임 몇 번 했던 재수 동생들부터 태식이 형님, 그리고 대학에 먼저 들어간 동창들까지.

웬일로 이렇게 연락이 오는지들 모르겠다.

일부 재수생들은 평가원 모의고사 끝났고 내일 토요일이라고 고삐를 살짝 푸는 느낌이고, 동창들은 이제 곧 방학 시즌이라 그런가 보다.

'유혹 물리치는 것만 해도 개빡세네.'

내 자신의 등을 두드려 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을 정도로 집에 와 밥 먹고 곧장 책을 편 내가 기특했다.

사락-

아까 계획한 대로 못다 한 수업 복습을 하고 문제 풀이를 하다가 잘 생각이다.

그런데 이 정도 계획으론 부족하다.

'시행착오를 줄이려면 계획을 진짜 잘 세워야 해.'

복습과 문제 풀이라는 막연한 계획으론 실력을 제대로 올릴 수 없다.

그래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 전에 냉정하게 자기 실력을 평가해야 한다.

일단 직후 복습을 차분히 마친 뒤, 평가원 모의고사 오답 노트를 펼쳤다.

"……."

내가 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벽에 가깝게 정리된 오답 노트들.

그런데, 두 번째로 보다 보니 한 가지 근원적인 문제점을 발견했다.

'내 실력은… 오답 노트가 필요한 수준도 안 된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그랬다.

오답이 너무 많아서 오답 노트를 들여다볼 게 아니라 차라리 교제로 다시 돌아가 처음부터 개념 공부를 하는 게 더 나을 정도였다.

두근…….

맥이 풀리는 느낌과 함께 살짝 초조해진다.

이미 너무 늦은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무리 열심히 한들… 뒤따라가기에 너무 늦은 거 아닐까?'

"후우우……."

남들은 다 문제 풀이에 매진하는데, 나만 다시 교제 첫 페이지를 펼쳐야 한다는 것.

안 겪어봤다면 이 기분을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모두 같이 버스에 올라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데 나만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점점 멀어지는 버스를 향해 손을 뻗는 듯한, 그런 절망적인 느낌.

'공부에는 자기 페이스가 있다.'

이 명제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모두가 이 명제를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아니다.

쉽게 진정되지 않는 심장을 붙잡고 나는 생각했다.

'클리버 루이스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늦은 나이, 부족한 재능, 타인보다 한참 뒤처진 수준.

클리버 루이스는 내가 지금 갖춘 모든 조건을 다 갖고 있었다.

그런데 클리버 루이스는,

'닥치고 노력…….'

포기보다 엄청난 노력을 선택했고, 결국 격차를 극복했다.

아니,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정점에 올랐다.

꾸욱.

나는 심호흡하며 펜을 다시 굳게 잡았다.

'아무리 급해도, 허물어질 집인 걸 뻔히 알면서 지을 순 없어.'

나는 오답 노트를 덮었다.

비록 급해도 지금은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땅을 다지고, 기초를 놓은 시작점으로!

공부 계획은 기본 개념 5, 문제 풀이 5로 잡았다가 기본 개념 8, 문제 풀이 2로 바꾸었다.

*     *      *

와글와글.

다음 날 아침.

토요일이라 학원 분위기는 들떠 있다.

나는 가장 일찍 나와 조용히 자리에 가서 앉았다.

토요일은 수업이 없고 쪽시험과 자습만 있는 날이다. 그래서 평범한 재수생들은 오늘을 직장인의 금요일처럼 여기며 한층 밝아진 얼굴을 보여준다.

'쪽시험은 1시니까… 그 전까지 빡 집중하자.'

나는 책상에 공부 세팅을 대충 마치고 작은 소리로 읊조렸다.

"콘센트레……."

"어이, 이영원!"

그런데 웬 목소리가 내 영창을 방해한다.

김영수였다.

"너 이 새끼! 어제 내 문자 씹었냐?!"

"……?"

그러고 보니, 어제 이놈한테서도 연락이 왔었던 거 같다. 다른 연락처럼 싹 무시해 버렸지만.

"술 한잔하자니까, 거 엄청 빼내. 전화도 안 받고."

"나 공부하느라고. 기다렸다면 미안하다."

"공부? 네가? 뻥치고 있네."

이놈이랑 만나서 술 마셔봤자 자뻑 어린 말만 들어야 해서 정신 건강에 해롭다.

"진짜야. 이제부터 공부할 거니까 방해하지 말아줘라."

"웃기는 놈. 갑자기 바람이 불어서는~ 지금 시작해서 되겠냐?"

"용건 없으면 네 자리로 가."

"용건이 없긴. 오늘 시간 좀 내라."

"아니, 나 공부할 거라니까?"

근데 김영수 이놈은 계속 지 말만 한다.

"나 6월 거 올 1등급 찍으면 엄마한테 선물 받기로 했었거든. 그래서 나 신형 노트북 사기로 했다. 이 형님이 백화점 데려가 줄게 따라와. 밥도 사준다."

"……."

"9월엔 롤락스 시계, 수능 땐 펜츠 C클래스! 하하, 어떠냐 이 몸의 위대한 계획이."

그러고 보니, 이놈 집안이 좀 잘산다.

우리 집도 못 사는 편은 아닌데, 이놈하고 비교할 정돈 아니다. 부모님이 무슨 중소 출판사를 운영하신다나?

'고등학교 때도 명품이랍시고 비싼 물건들 엄청 치장하고 다녔지. 근데 성격이 재수 없어서 대부분 이놈 물건만 탐낼 뿐 같이 안 어울렸지만.'

"넌 보상이 쎄서 좋겠다. 근데 난 진짜 됐어. 나중에 수능 끝나고 차 사러 갈 때나 불러줘라. 차나 얻어 타게."

수능에서도 올 1등급이 나왔을 때의 얘기겠지만.

"이 새끼,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거야. 아무튼 진짜 안 간다 이거지?"

"그래."

"그래라~ 꽁밥 먹을 좋은 기회를 놓치네. 룰루~"

김영수는 또 만만한 애 중 하나를 붙잡으려고 눈에 레이더를 켜고 강의실을 어슬렁거렸다.

뭘 하든 옆에 꼬붕 하나를 끼고 다니는 버릇은 아직도 못 고친 모양이다.

나는 김영수의 뒷모습에 혀를 찼다.

'너무 자신만만한 게 어째 불안한데. 그리고 이 시기에 신형 노트북이 왜 필요하냐.'

6월 잘 본 애들 중에 9월이랑 수능 때 망한 애들을 한둘 본 게 아니다. 공부는 언제나 겸손하게 해야 한다.

지금 내가 김영수를 두고 이런 말 할 처지는 절대 아니지만…….

나는 김영수에게 신경을 완전히 끄고 조용히 읊조렸다.

"콘센트레이트!"

일순 주변이 조용해진다.

세상이 간데없었고, 오직 이 강의실 안에 책과 나만 존재하는 듯했다.

우선, 주간 복습을 마친 뒤 개념 공부를 시작했다.

그다음 점심까지 한 시간쯤 남았을 때 그동안 익힌 개념이 어떻게 문제에 적용되는지 확인했다.

문제를 틀려도 당장 해답지를 보지 않았다.

최대 세 번까지.

사고력 증진을 위해서라도 세 번까지는 문제를 틀려도 나 혼자 씨름하며 해결해 볼 생각이다.

*     *      *

점심이 지나고 드디어 때가 왔다.

내 결심을 증명할 첫 테스트.

아까 점심 전 명철 샘이 나한테 와서 말했다.

-어제 한 약속 잊지 마라. 쪽시험 보고 바로 나한테 가져와. 채점은 내가 한다.

나는 결연한 마음으로 쪽시험 강의실로 들어갔다.

거기엔 어제 박종석과 술자리를 했던 두 여자애들과 박종석의 친구들도 있었다.

공부를 잘하는 애들은 역시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쟤네들은 굳이 안 봐도 될 텐데…….'

성실함이 남다르고 꼼꼼하다.

두근. 두근.

아무튼, 이제 내 남은 삼수 생활을 건 실전이다.

일단 명철 샘과 약속은 이번 쪽시험에서 평균 70점을 받는 것이다.

국영수의 경우 총 20문제가 나오니, 6개 이하로 틀려야 하고, 한국사와 탐구 과목은 10문제가 나오니 3개 이하를 틀려야 했다.

그렇지 못하면 나는 아웃이다.

시험지만 받았는데 벌써 심장이 고동치고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다.

고질적인 증세였다.

'스펄… 이 저주받은 몸뚱이!'

고작 쪽시험인데, 삼수 생활이 걸렸다는 생각을 하자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 증상은 나이가 들어도 내 발목을 잡으니 통탄스럽기 그지없었다.

마법이 있길 천만다행이지.

"피스 오브 마인드."

나는 작게 마법을 읊조린 뒤, 쪽시험을 시작했다.

마법의 효과는 확실했다.

'보인다… 정답이 보여. 이건 내가 알던 것들이야.'

새로운 경험이었다.

시험 때 몰라서 틀렸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 중 일부는 심리적인 평정심을 갖고 보니, 아는 데 머릿속에서 끄집어내지 못해 틀린 것이었다.

어쩌면 나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100% 최상의 컨디션으로 시험에 임할 수 있는 수험생이 된지도 모르겠다.

*     *      *

-저 오빠 진짜 웬일이래?

-그러게. 공부할 생각이긴 한가 봐.

-내기가 어떻게 될지 궁금한데? ㅋㅋ

박종석, 오정환, 심용호, 그리고 이소현, 홍예림이 모인 단톡방이 시끄럽게 떠들었다.

다섯은 쪽시험을 먼저 끝내고 나오면서 이영원이 시험을 치르고 있는 모습을 봤다.

토요일이면 가장 먼저 집으로 가버렸던 이영원이 남아서 시험을 보자 다섯 재수생들은 의외라 느낀 것이다.

한편, 심용호는 이영원의 모습이 아니꼬왔다.

'참 나. 진짜 자기 주제도 모르고, 양심도 없는 인간이잖아?'

그의 성격상 제대로 공부도 안 하면서 자리만 축내고 앉아 있는 인간을 경멸하는 편이다.

소위 쓸모없는 인간.

그런 사람들 중 심용호의 관념에 이영원은 단연 최악이었다.

삼수이면서 동생들 보기 쪽팔림도 없는지 어영부영이고 흐리멍텅한 눈으로 강의실 분위기만 망친다.

그런 주제에 상위권 대학을 가고 싶은지 탐구 과목으로 물리2와 화학2를 선택했다.

'담임은 대체 뭔 생각인 건지. 쯧.'

뭐 하러 쪽시험 조건을 걸어 기회를 주는지 모르겠다.

심용호는 이영원 같은 구제불능을 보면 어떻게든 한 번 골탕먹여서 자기 주제를 깨닫도록 짓밟아야 했다. 그것은 이 무료한 인생의 소소한 낙이기도 했다.

'다음 주에도 계속 학원 나오면 담임을 한 번 더 압박해야겠어.'

"용호야~ 거기서 뭐 하냐."

그런 생각을 하는데 앞서간 오정환과 박종석이 부른다.

"아, 그래. 지금 가자."

셋은 다시 공부하기 전에 카페에 갈 생각이었다.

카페로 가면서 심용호가 둘에게 물었다.

"너네 분명 그 형 버틴다에 걸었지?"

"아니, 종석이랑 예림이만."

"그랬지. 후후. 종석아, 번복은 없는 거다. 명심해."

심용호는 이영원을 마음속에서 완전히 찍어버렸다.

막상 따지고 보면 그렇게까지 찍을 일은 아닌데 말이다.

*     *      *

"커닝한 거 아니지?"

김명철 샘이 내 시험지를 받고 한 말이다.

"어휴~ 큰일 나려고 커닝을 해요."

피식.

명철 샘이 실없는 헛웃음을 짓고 안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냈다.

"그럼, 고일지 스탑일지. 어디 한번 보자."

"……."

내 자존심이 걸린 문제기도 하지만, 재수학원에서조차 잘렸다는 얘기를 엄마 아빠에게 전할 순 없다.

나의 결심을 증명하는 첫 번째 관문.

과연 나는 생존할 수 있을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