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태식이 형은 스터디 제안을 한 이유가 수강료 때문이라는 건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아무리 가난해도 가난을 무기 삼아 살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까.
태식이 형은 나에게 부담 주기 싫다며 편하게 생각해 보고 특강 개강 전까지만 대답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밥을 계산하겠다는 걸 기어이 본인이 계산하고 헤어졌다.
'형님이랑 누님, 꼭 좋은 대학 가야 할 텐데.'
편한 사람들이라 그런지 괜스레 마음이 쓰이는 둘이다.
둘에게 이 수험 생활의 고단함이 언젠가 추억이 되길 바란다.
삐리릭- 끼익- 쾅.
"후우……."
익숙하고 포근한 집 냄새가 날 맞이해 준다.
둥둥땅~ 둥둥따당~
그런데 내가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스마트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엄마.
"어, 엄마."
-아들, 집에 왔어?
"응. 이제 막."
-아들, 아무래도 이번 주에도 못 갈 거 같아…….
엄마는 원래 주말마다 서울에 와서 날 보고 다시 올라가곤 했다.
-이번 주도 예원이랑 같이 있어 줘야 할 거 같아서.
김포국제외고에 입학한 훌륭한 내 여동생 예원이.
예원이는 나랑 다르게 뭐든 잘하는 아이다.
비록 늦은 사춘기와 낯선 환경 때문에 지금은 좀 방황하는 듯하지만.
"난 괜찮아. 엄마. 난 혼자 지내도 돼. 근데 엄마랑 아빠는 잘 있는 거지?
-응, 네 아빠랑 엄마는 잘 있지. 요즘 일하느라 바빠.
한국은행 임원이던 아빠는 예원이가 외고에 합격했을 무렵 퇴직했다.
그리고 김포로 이사를 결정하고, 거기에 작은 치킨집을 하나 열었다. 의외로 장사가 꽤 잘되는지 바쁘게 지내고 계신단다.
-영원아, 예원이가 지금 학교생활을 조금 힘들어해. 그래서 못 가는 거니까 네가 이해해 주렴.
"에이, 내가 애도 아니고. 진짜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그래… 엄마가 돈 보냈으니까 그거로 밥 잘 챙겨 먹어. 맛있는 거로.
"응~ 알겠어~"
-사랑해 아들.
"나도~"
엄마랑 통화를 종료하고 나는 우선 몸을 씻었다.
공부하다가 곧장 잠들 수 있는 준비를 마친 것이다.
하지만,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나는 방 불을 다 끄고 은은한 주광색 배드램프 하나만 켠 채 바닥에 앉았다.
당장 공부를 시작해도 되지만 그러지 않고 먼저 가부좌를 틀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마법사들의 수행 방법, 명상을 시작하려는 것이다.
'마나 리젠을 가속화하고 마나 감각을 증가시킨다.'
무인들이 이런 방식으로 내공을 증진시킨다.
하지만 무형의 힘을 다룬다는 점에서 마법사도 그리 다르지 않다.
클리버 루이스는 매일 일과에서 명상을 한 번도 빼먹지 않았을 만큼 이 훈련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나 역시 이렇게 하는 이유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서클을 추가시키기 위한 조건.'
책에 의하면 1서클에서 2서클에 도달하려면 마법을 100회 이상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짧은 시간 내 서클 추가 조건을 달성하려면 이 명상법으로 마나를 회복시켜 가며 마법을 사용하는 게 유리하다.
'2서클에 가면 지금 나에게 진짜 필요한 마법이 있다.'
클리버 루이스가 2서클에 올라가 익혔던 신비의 마법.
그것을 얻기 위해 나는 매일 일과에서 명상과 마법 사용을 반복할 생각이다.
우선, 명상을 도와줄 수 있는 마법을 사용한다.
"피스 오브 마인드."
화아아아-
피스 오브 마인드를 사용해서 명상을 진행하면 마나 리젠이 더욱 가속화된다.
피스 오브 마인드를 쓰는 데 필요한 마나 양보다 더 많은 마나를 충전할 수 있고, 또 서클 업 조건인 마법 사용 1회도 추가되니 일석이조의 방법이다.
이 방법으로 클리버 루이스는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2서클에 오른다.
나는 금방 명경지수에 이르렀다.
그리고 보이지 않지만 세상에 분명히 존재하는 마나를 이미지화하여 손에 붙잡는 데 온 신경을 몰두했다.
* * *
"리프레시 리커버리. 콘센트레이트."
화아아아아-
1시간가량 명상으로 마나를 상당량 회복했다.
자연스럽게 회복되는 마나로는 마법을 하루 4~5번 사용하는 게 한계지만, 이렇게 하면 최대 6~7번은 사용할 수 있을 거 같다.
'1시간 이상 투자해야 하는 단점이 있지만, 효율은 그만큼 좋아지니까.'
리프레시 리커버리 덕분에 정신적인 체력도 완전히 회복했다.
이 긴 밤을 공부로 지새울 수 있을 정도로!
"그럼, 시작해 볼까."
사라라락!
복습 교제와 문제풀이집까지, 눈앞에 펼쳐진 책들 속으로 내 의식이 확 빨려 들어갔다.
몰입에서 깨어날 때쯤이면, 나는 놀라운 분량의 공부를 한 뒤일 것이다.
* * *
짹짹짹.
아침을 알리는 참새 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
비로소 나는 몰입에서 깨어났다.
펜을 쥔 손아귀는 얼얼했고 정신은 하얗게 불태워 사르르 아려왔다.
"밤을… 꼴딱 새버렸네."
아침 해를 보고, 달궈진 대지의 온기를 느끼니 나른함이 급속도로 몰려왔다.
"휴우……."
그런데 기분만은 더없이 짜릿하고 감격스럽다.
내가 이 정도 몰입으로 공부해 본 적은 살면서 단연컨대 한 번도 없었다.
중고등학교 때 열심히 노력하는 편이긴 했지만 노력의 질로 따지면, 지금은 그때와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리프레시 리커버리."
화아아아-
밤을 새워 찾아온 지독한 나른함이 싹 씻겨 내려간다.
'오늘 저녁까지는 공부하지 말자. 바람도 좀 쐬고 머리에도 쉼을 줘야지.'
마법으로 약간의 체력 회복과 정신적인 릴렉스가 되긴 하지만, 계속 입력 작용만 하면 뇌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일주일에 하루, 그중 반나절만이라도 쉴 수 있게 해줘야 한다.
그러면 그 휴식 시간 동안 무의식적인 작용으로 공부했던 것들이 뇌에 논리적으로 정돈된다. 그래서 적절한 쉼이라는 건 수험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그럼, 일단 씻고 바깥에 좀 나가볼까?'
뭘 할지 정하진 않았지만, 이제 여름이다.
시원한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 마시며 바깥에 나가서 즐겁게 돌아다니는 사람들 구경만 해도 충분할 것이다.
덜컥!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방문을 나섰는데.
"으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악!"
쾅!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넘어졌다.
거실에 웬 머리를 귀신처럼 풀어 헤친 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여자도 내가 놀라서 지르는 비명을 듣고 똑같이 비명을 질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익숙한 얼굴이다.
"예, 예원아?"
"아 뭐야 진짜! 왜 놀라고 난리야!"
내 여동생 이예원.
근데 분명히 김포 집에 있어야 할 녀석인데, 대체 이 아침에 여긴 웬일이란 말인가?
"너, 너 말도 없이 언제 온 거야. 깜짝 놀랐잖아."
"언제 오긴! 내가 어젯밤에 문 너머로 인사도 했잖아!"
"……."
내가 공부에 몰입하고 있던 어제 밤 시간. 예원이가 왔었나 보다.
나는 공부에 완전히 몰입한 상태였고, 그 때문에 예원이의 인사를 듣지 못했던 것이다.
"아… 미, 미안. 공부에 집중하느라 네 인사를 아예 못 들었나 봐."
"이씨! 오빠가 무슨 공부를 한다고!"
"아, 그게……."
예원이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렸다.
"아니, 근데 얘는 왜 갑자기 온 거야? 어제 엄마가 같이 있어 준다고 했었는데."
나는 혹시 엄마도 같이 왔나 싶어서 큰방을 열어봤다.
그런데 예원이 외에 누구도 온 흔적은 없었다.
'얘가 혼자서 뭔 일이 있는 건가?'
둥둥땅~ 둥둥따당~
마침 전화가 온다.
발신자는 이번에도 엄마.
"응, 엄마."
-영원아. 예원이 거기 갔니?
"응. 갑자기 무슨 일 있는 거야?"
내 물음에 엄마의 한숨이 한차례 이어지고,
-얘가 어제 다 자는 사이 오밤중에 나간 모양이야.
"……."
-저번에 중간고사 본 이후로 얘가 계속 힘들어하네…….
시험을 잘 못 본 모양이다. 혹은 기대만큼 잘 보긴 했으나 생각보다 등수가 낮았거나.
그래서 사춘기의 전형적인 증상이 증폭된 듯하다.
'독립되고 싶은 욕구.'
아직 추측일 뿐이지만 예원이는 지금 엄마랑 아빠의 관심이 부담스러울 것이다.
자신 때문에 이사도 가, 치킨집 창업도 해, 오빠인 나를 혼자 두고 자기랑만 같이 살아.
이런 부분들이 예민하고 감수성 풍부한 고1 여학생에겐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게다가 외고에 들어갔으니, 학교생활도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어휴, 그래도 집으로 갔다니 다행이네. 영원아, 엄마 곧 갈게. 예원이 좀 어디 안 가게 해줘.
노력은 하는데, 등수는 안 오르고.
대가 없이 주어지는 부모님의 사랑과 걱정이 그저 부담스럽기만 한 시기가 있다.
'귀여운 녀석.'
나는 이예원이 들어간 방 문을 보면서 엄마에게 말했다.
"아냐, 엄마 그냥 거기 있어. 얘는 내가 알아서 돌려보낼 테니까."
-네가 어떻게 하려고? 너는 네 공부 하느라 힘들 텐데. 엄마가 금방 갈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진짜로. 이 시기엔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둬야 할 때도 있는 거야."
-아휴… 얘가 요즘 공부도 통 안 하고 행동도 날카롭게 달라졌지 뭐니. 엄마랑 아빠는 걱정이야.
"엄마. 걱정하지 말고. 오늘은 여기 있게 내버려 둬. 내일 학교 가야 하니까 알아서 돌아갈 거야."
나는 엄마를 달래고 전화를 끊었다.
엄마의 관심은 탈출의 이유 중 하나였을 텐데, 다시 엄마가 데리러 오면 예원이에게 그것만큼 최악의 상황은 없을 것이다.
달그락, 치이이.
달걀과 햄을 부치고 버터에 식빵을 굽는다.
그리고 드립 커피를 부드럽게 내렸다.
똑똑.
"오빠 들어간다."
벌컥.
그러자 이어폰을 끼고 날 보며 인상 쓰는 여동생이 나타난다.
아깐 씻고 머리가 반쯤 마른 상태라 귀신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용모가 멀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왜~!"
"밥 먹으라고. 하하."
"안 먹을 거야!"
아까 자기 온 줄도 몰라주고 자지러진 나 때문에 조금 삐친 모양이다.
"네가 좋아하는 버터 식빵인데도?"
예원이가 좋아하는 딸기잼도 함께였다.
향긋하고 구수한 버터 냄새와 캐러멜라이즈 된 식빵의 색깔을 보자 예원이의 얼굴이 살짝 누그러든다.
"놓고 가든가."
"그래. 먹어. 먹어야 또 하루를 살지."
나는 틱틱거리는 예원이의 책상에 식탁을 차려주었다.
"너 말 없이 나왔다며?"
"……."
"엄마한테는 오지 말라고 해뒀어. 하루 정돈 집 떠나서 쉬는 것도 나쁘진 않지. 생각 편하게 먹고 쉬어라."
"치, 오빠는 오빠나 잘해. 내 걱정하지 말고."
예원이의 표정이 뾰로통해졌다.
가족의 호의조차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로 들리는,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시기.
나는 피식 웃은 뒤 말했다.
"외고는 어때? 적응하기 힘들지?"
"…몰라. 학교 얘기하기 싫으니까 그만 얘기해."
딱 봐도 적응을 잘 못한 얼굴이다.
보통 부모에게 반항심이 드는 나이가 되면 친구들과 겉돌기 마련인데, 친구를 만나는 대신 혼자 서울 집에 온 것만 봐도 그랬다.
'네가 말 안 해도 이 오빠는 다 알고 있단다. 후후.'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도 딱 보인다.
김포라는 새로운 동네에 적응하지 못한 것도 있겠고, 빡세진 고등학교 생활 때문일 수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중학교 때와 달리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는 자기 자신.'
때문이다.
항상 1등만 하던 녀석인데, 똑같이 1등만 하던 아이들과 경쟁을 하다 보니 자존감이 낮아지는 것이다.
'중간고사도 봤다고 했으니. 더 뼈저리게 느끼고 있겠지. 세상이 얼마나 치열한지.'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는 어떤 벽과,
영재인 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범재에 불과한 자기 자신을 받아들여야 하는 뼈아픔.
거기에 부담스러운 부모님의 기대와 관심까지.
나의 방황과 결이 약간 다르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대부분 다 비슷하다.
내가 식빵을 먹고 있는 예원이에게 말했다.
"그거 먹고 오빠랑 나가자. 바람 쐬게 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