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빈 자습실에 앉아 혼자 공부하던 예전과 달리 이제 두 사람이 더 늘어났다.
명철 샘은 처음에 절대 안 된다고 얘기했지만 내가 잘 설득했다.
-저 하나만 보고 매일 야근하시느니 두 사람이라도 더 있으면 좋지 않나요? 샘도 덜 지루하실 거예요.
생각해 보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나 하나 공부 봐준다고 매일 11시까지 야근하는 건 지루한 일이다. 그런데 세 사람이 되면 다르다. 아마 샘 입장에서도 야근할 맛이 더 생길 것이다.
애초에 태식이 형과 민지 누나의 입을 막기 위해서라도 내 요청을 거절하긴 어려웠을 테지만.
어쨌든, 나나 샘이나 형, 누나들이나 서로에게 좋은 그룹이 결성되었다. 진짜 건전하고 공부만 하는 스터디 그룹이.
특히 태식이 형과 민지 누나는 수학 특강에 들어갈 형편이 안 되었는데 수학 교과인 명철 샘의 추가 지도를 받을 수 있어서 크게 기뻐했다.
'이거로 스터디 제안을 거절했던 마음의 빚은 완전히 털어낼 수 있겠어.'
나는 기뻐하는 둘을 보고 흡족한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집에 가서 하나, 남아서 하나, 공부는 똑같다.
오히려 학원에 있는 게 집중이 더 잘되는 경우가 많다.
사수로 마지막 사활을 걸어야 할 형과 누나에겐 정말 좋은 기회일 것이다.
"자, 잘 봐. 사각형 ABCD가 직사각형이면 선분 AB가 x축과 평행하겠지? 그럼 두 점 A, D의 x좌표가 같겠냐, 다르겠냐?"
"아……!"
태식이 형은 반쯤 힌트를 듣고는 곧장 이마를 짚었다.
여기서부턴 스스로 문제를 풀 수 있겠는지 웃는다.
"하하, 샘 제가 나중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다들 피곤하시면 커피라도 사 올까요?"
"커피 마시면 이따 잠 안 와서 어쩌려고. 그냥 물이나 한잔 떠와."
"옛! 금방 떠 오겠습니다!"
태식이 형이 돈이 없는 건 명철 샘도 알기 때문에 돈 쓸 일은 없게 해준다.
행동이 빠릿하고 깍듯한 태식이 형의 모습에 명철 샘도 확실히 야근하는 맛이 느껴지는지, 만족하는 모양새다.
"너희들, 분명히 얘기하지만 좋은 대학 가야 한다.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안 되면 진짜… 너희나 나나 다 같이 죽는 거야."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것 같지만 반쯤 진심이 느껴진다.
"걱정하지 마세요. 실망시켜 드리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니까요."
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고, 내 대답에 태식이 형과 민지 누나도 결의에 차 고개를 끄덕였다.
* * *
-오늘은 진짜 덥다 ㅋㅋ 공부하고 일어나는데 방석이 축축하네 ㅋㅋ
-악, 뭐야 드러워. 왜 에어컨 안 틀어.
-에어컨 바람에 컨디션 상할까 봐 ㅋㅋ 몸이 연약해서.
스카이라인 멤버들은 각자 집에 돌아가 자습하면서 중간중간 톡을 주고받았다.
주요 내용은 공부한 내용들 서로 확인해 주는 정도이고, 간혹 신변잡기가 있었다.
그 신변잡기 중에는 이영원의 내용도 종종 등장했다.
-야, 근데 우리 내기 솔직히 결판 난 거 아니냐? 그 형 진짜 마음 잡고 공부하잖아.
박종석의 말에 대부분 동의하는 분위기.
-그렇긴 하더라. 명철 샘도 그 형 잘 챙기는 거 같고.
-맞아. 그 오빠 공부하기 시작한 뒤로 은근히 자주 불려 가. 따로 지도받는지도?
-그럼 우리 내기 승부는 끝난 거로? ㅋㅋ 솔직히 9월까지 버틴다로 내기하는 건 우스워졌다.
-그럼 용호랑 소현이 내일까지 한 장씩 가져와라 ^.^
내기는 유야무야 결판이 난 것으로 정리되어 갔다.
"……."
이 톡을 지켜보는 심용호는 눈 밑을 꿈틀거렸다.
'젠장… 분위기가 정반대로 가고 있어.'
그때 이영원의 쪽시험지 성적이 공개된 뒤로 스카이라인에서도 더 이상 이영원을 무시하지 않았다.
심지어 강의실에서 계속 보여주는 훌륭한 공부 태도에 오히려 도전을 받기도 하는 듯하다.
심용호는 휴대폰의 문자 내역을 보며 미간을 좁힌다.
'근데 이 인간은 핸드폰도 안 보고 사나.'
저번에 박종석으로부터 이영원의 연락처를 받아낸 뒤 따로 연락했었다.
지난번 일에 대해 할 말도 있으니 따로 만나고 싶다고.
보낸 문자만 세 통이 넘었고, 전화도 여러 번 했다.
그런데 도무지 반응이 안 온다.
진짜 이영원의 번호가 맞는지 다시 박종석에게 확인했지만 맞다는 대답만 들었다.
'감히 날 무시하다니…….'
더욱 괘씸해진다.
연락을 씹히고 나니, 학원에서 대면했을 때 말을 꺼내긴 더 껄끄러워서 아직도 이영원과는 한마디 말도 못 붙였다.
심용호는 혹시나 해서 단톡방에 물어본다.
-근데 혹시 그 형이랑 연락하는 사람 있어? 내가 사실 전에 있었던 일 오해도 풀 겸 얘기 좀 하자고 연락했는데 다 씹기만 하더라고.
-보니까 사수 하는 언니 오빠하고만 친하게 지내는 거 같던데. 우리 중 누가 그 오빠랑 연락하겠어.
-그건 그래.
-유유상종이라잖아. N수 어벤져스 팀.
-ㅋㅋㅋㅋ 뭐래. 연장자 놀리는 데 재미 들렸냐?
다른 친구들은 이영원에게 별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쳇… 별수 없겠군.'
이영원에게 연락이 씹힌 이후론 공부가 더 손에 안 잡힌다.
영 껄끄럽긴 하지만 직접 대면해서 한번 불러내야겠다.
그리고,
-얘들아. 우리 내기 하나 더 하자.
-무슨 내기를 또? 너 이번 판 졌다고 생떼 쓰는 거지.
-이번엔 진검승부. 9월 모의고사 점수 내기. 그 형이 몇 등급 받는지로.
심용호는 다시 이영원을 거론했다.
-아니 왜 또 그 형이야 ㅋㅋㅋ 무슨 원수졌냐.
-그래,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오정환과 홍예림의 이야기에도 심용호는 아랑곳 않고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
-궁금하지 않아? 정신 차린 삼수생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그냥 재미로~
-재미는 있을 듯?
-그럼 이번엔 좀 크게 걸자! 큰 거로 한 장!
다행히 이번엔 분위기가 따라와 준다.
심용호는 어떻게든 이영원을 추락시키고 싶었다.
지금은 모두 이영원을 인정하는 분위기지만, 결국 자신이 옳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반드시 추락시킨다.'
이영원은 역시 틀린 인간이라는 걸 증명해서 모두에게 자기 생각이 옳았음을 각인시킬 것이다.
그리고,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아버지 앞에서 인정받을 것이다.
* * *
기말고사 첫날 아침이 밝았다.
이예원은 엄마 아빠의 배웅을 받으며 학교에 도착한다.
"딸, 긴장하지 말고. 고작 1학년 시험이니까 편하게 해. 좀 못 봐도 괜찮아."
"응원한다. 딸."
"……."
다른 학부모들도 자기 아들 딸들의 등교를 함께하며 응원전을 펼쳤다.
고작 1학년 1학기 기말고사 따위가 뭐 대수라고 이러나 싶지만, 이곳 김포국제외고의 분위기는 수능 날을 방불케 했다.
단지 대입을 위한 시험이 아니다.
왕좌가 걸린 위한 왕위 쟁탈전이다.
쟁쟁한 사람들만 모인 고수들의 진검승부.
여기서 한두 번 패하기 시작하면 패배에 익숙해진다.
절대 그런 일은 있어선 안 되었다.
엄마 아빠의 응원에 이예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갔다 올게."
"그래. 우리 딸."
부담 갖지 말아라, 조금 못 봐도 괜찮다, 그렇게 말하지만 이예원은 그럴 수 없었다.
치킨집 운영하며 삼수생 오빠를 둔 집안이라는 폄하를 듣고서 가만히 꼬리를 내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들이 뭘 안다고.'
자신과 가족들에 대해 함부로 떠드는 아이들에게 그동안 아무 반응 안 하고 참아왔다. 이번 기말고사에서 뭉개 버릴 생각으로.
비장하게 걸어 교실로 향하는데,
딩동~
문자 하나가 도착한다.
-내 동생, 기말고사지? 힘내라.
오빠 이영원이었다.
"참 나. 자기나 잘하라니까……."
그런 생각이 들지만 입꼬리는 슥 올라갔다.
그때 오빠를 만난 이후, 오빠가 조금은 달라 보였다.
마냥 무시하고 하찮게 생각했던 오빠였는데, 조금은 괜찮아 보이는?
'이미 완벽하다… 이미…….'
이예원은 이영원이 알려준 주문을 외며 교실로 입장했다.
싸늘한 기류가 흐른다.
교실은 거의 전쟁터의 폭풍전야를 방불케 했다.
예민함이 극도로 치달은 학생들은 일말의 잡담조차 하지 않았고, 서로 친하게 지내던 사이라고 해도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어깨너머를 내주지 않았다.
시험이 시작되기 전, 모두가 오늘 과목의 마지막 정리에 들어간다.
이예원도 당연히 그랬다.
한두 장짜리 요약 노트를 들고 핵심적인 내용들을 머릿속에 그리며 시험을 최종 대비했다.
'좋아… 완벽하다.'
머릿속에서 시험 범위 내의 지식이 목차별로 쫘르르 정리되었다.
눈을 감아도, 굳이 생각을 짜내지 않아도, 지식이 분출하는 샘처럼 자연스럽게 솟아올랐다.
반복에 반복을 더한 숙달의 극치였다.
'실수만 잡으면 돼, 실수만…….'
김포국제외고는 시험 자체의 질이 좋기로도 유명하다. 지금 이예원처럼 잘 준비된 학생이라면 전부 정답을 맞힐 수 있을 만큼.
이예원은 자신이 있었다.
잠시 후, 종이 울린다.
"보던 거 다 정리하고! 필기구만 빼고 전부 집어넣어라!"
먼저 와 있던 담당 교사가 일제히 통솔하기 시작했다.
1교시는 수학.
이예원은 요약 노트를 서랍에 집어넣고 필기도구를 꺼낸다.
그런데,
틱- 틱-
"……."
문제가 생겼다.
'아니, 이게 왜?'
샤프의 샤프심이 부러져 있었다.
심지어 샤프심 통의 샤프심들도 전부 서너 동강으로 부서져 있었다. 수 차례 바닥에 떨어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볼펜으로 하면 돼.'
하지만 볼펜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예원은 심지가 가느다란 0.28mm 펜을 쓴다. 그런데 볼펜의 꼭지가 땅바닥에 떨어졌을 때처럼 휘어진 게 아닌가?
꽈드득-
어금니가 세게 물렸다.
'어떤 녀석이……!'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잘 썼던 필기도구들이다.
그런데 지금 아침이 되어 모두 부러져 있다.
설사 누가 실수로 떨어뜨렸다고 해도, 필통 안에 들어 있던 것들이 이런 식으로 박살 날 일은 없다.
즉, 누군가의 소행이라는 뜻.
이예원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주먹을 꽉 쥐었다.
'젠장…….'
미리 필기도구를 확인했더라면.
하지만, 이런 사정이 생기리라는 예상을 못 했는데, 어떻게 대비한단 말인가.
물론 샤프나 볼펜이 없어도 컴퓨터용 사인펜이 있으니 문제를 푸는 게 불가능하진 않다.
하지만 선이 두껍게 나오는 컴퓨터용 사인펜으론 수학 문제를 풀이하기 매우 불편했다.
곧 담당 교사가 시험지를 배부한다.
"뒤로 넘겨. 넘기다가 먼저 들춰보면 0점이다. 종 한 번 더 칠 때까지 덮어놔."
사락- 사락-
아직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벌써 시험지가 배부되고 있다.
중학교 때와는 다른 상당히 긴장 넘치는 고등학교 기말고사. 누구든 허튼짓은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삼엄함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