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두말하면 잔소리 아니겠는가?
이렇게 방대한 지식의 저장고를 누가 마다하겠는가?
심지어 그 누구의 지식도 아닌, 신의 경지라 불리는 10서클 대현자 클리버 루이스의 지식이 담긴 것들인데!
'대, 대단해.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다.'
도서관에 발을 들이자 비현실적인 감각에 사로잡힌다.
아파트만큼 높은 서가(書架)들이 대단지를 이루고 있다 하면 적당히 감이 오겠는가?
나는 쿵쿵거리는 심장을 붙잡고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그야말로 대도서관.
정말, 없는 책 빼곤 다 있을 것 같았다.
"……."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마라. 후후. 어차피 하루 아침에 다 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니까."
책들은 무질서하게 꽂혀 있는 게 아니라 서가마다 콘셉트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어느 서가에는 무공과 관련된 책들이 빼곡하고, 어느 서가에는 몬스터와 생물에 대한 것들이 빼곡하다. 어느 곳은 화학과 연금술에 관한 것들이다.
그야말로 네르샤이아 대륙의 모든 지식을 여기 다 모은 건 아닐까 싶었다.
"네가 원하는 주제는 저쪽이다."
"고, 고마워."
나는 분신이 안내하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마나이론/마법학>
안내받은 서가의 가장 아래, 저렇게 쓰인 안내판이 있었다.
"여기서부터 보면 될 거 같군."
"……."
고급스러운 양장본 책들이 켜켜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비록 손때가 묻어 낡아 보이는 것들은 있어도, 하찮아 보이는 건 없었다. 모두 고급스러운 자태를 유지하고 있다.
'루이스 이 사람… 책을 보관하는 방식도 강박적인 사람이었군.'
사라락-
가장 눈에 띄는 <마법학요론서>를 꺼내어 펼쳤다.
"그것이 너희 세계로 치면 대충 물리학 기본서 정도는 될 거다."
분신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는 것들을 완벽히 다 떼고 나면 너도 이제 어엿한 마법사가 되는 거지."
"그래……."
나는 그동안 마법에 대한 이해 없이 마법을 사용해 왔다.
원래 마법을 쓰려면 마법식에 대한 이해와 마나를 다루는 감각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둘 모두를 모른 채 마법을 써 왔던 것이다.
'마나분해구슬 훈련으로 감응력을 키우고, 여기서 공부하며 마법식도 익힌다.'
그러면 분신의 말대로 정말 마법사다워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루이스와 달리 다른 마법도 사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제 결정했다.
여기 있는 책을 전부 익혀보기로.
"고마워. 분신……."
"후후. 별말을. 지식의 저주에 빠지지 않게 조심하기나 해라. 세상엔 많이 공부할수록 아둔해지는 사람도 많으니."
"……."
분신은 내게 이 공간을 맡기고 등을 돌렸다.
이제 알아서 공부하라는 뜻이다.
그때, 내가 분신을 불러 세웠다.
"잠깐."
"뭐냐?"
"그… 너 말이야."
"……?"
"뭐랄까. 너에게 어울릴 만한 이름… 을 불러주고 싶은데. 그냥 분신이라고 부르는 건 정 없어 보이기도 하고……."
그러자 분신이 어리둥절하다는 듯 갸우뚱했다.
"이름?"
"그래. 너는 어쨌든 루이스와 독립적인 존재잖아. 그러니 루이스라고 부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 분신이라고 부르는 건 아닌 거 같아서."
"푸하하하!"
내 말에 분신이 웃어젖힌다.
나는 왜 웃는 건지 몰라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내 이름이라… 생각해 본 적 없는 주제였다."
"……."
"난 그저 내 존재의 목적에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될 뿐이라서."
마인드 트레이너로서 나의 훈련 교관.
그 이상으로 자신을 생각해 본 적 없다는 뜻이다.
분신이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곰곰이 생각하더니 내게 말했다.
"이름은 네가 알아서 불러라. 재미있을 거 같긴 하군."
* * *
주로 낮에는 학교 수업을, 밤에는 루이스의 대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다.
사실상 학교 수업은 아직 1학년 수준에 맞춰져 있어 새로운 걸 배운다기보다 참여에 의의가 있는 정도였고, 대도서관에서의 공부가 거의 메인이 될 지경이었다.
"오빠."
"어? 어어."
나는 종종 낮에도 강의가 끝난 다음 빈 강의실에 남아 마인드 월드에서 루이스의 책들을 탐독했다.
그러다 가끔 이렇게 다른 사람이 부르는 바람에 현실로 돌아왔고.
"오빠, 미안한데. 나 이거 이해가 안 돼서요. 조금 도와줄 수 있어요?"
혜연이는 내게 교재를 하나 내밀었다.
미적분학 수업 때 쓰는 미분방정식 연습 교재였다.
미분방정식이란 연속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물체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분석하는 데 사용되는 방정식이다.
예컨대 천체나 위성의 움직임을 계산하고 포탄의 궤도를 예측할 때 쓰인다.
"음, 어디 한 번 봐줄게."
대학 수학도 결국은 연습이 중요하다. 많은 문제를 풀어보는 연습만이 답이다.
이론적인 이해력이 아무리 탁월하다 해도 연습 없이는 문제 앞에서 백지 상태가 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나는 차분하게 혜연이가 내민 문제에 접근해 보았다.
"음……."
슥- 슥-
내가 풀이하는 모습에 혜연이는 오오 하며 눈을 빛냈다. 어느새 지용이와 미진이도 혜연이를 따라 가까이 다가왔다.
미적분학 수업을 같이 듣고 자습하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와아……."
"진짜 빠르다."
세 사람은 내 풀이 과정은 둘째 치고, 속도에 놀라는 듯했다.
내가 문제를 풀던 손놀림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음, 된 거 같은데? 잠깐 한 번 검산해 볼게."
나는 풀이가 제대로 되었는지 눈으로 슥슥 훑어봤다.
풀이는 정확했다.
그다음 설명이 들어간다.
"일단, 변수분리 유형이니까 꼴을 이런 형태로 바꿔준 다음에 양 변을 적분해서……."
침묵하며 들어주는 아이들.
슥- 슥-
"아, 아아! 맞다. 저기서 잘못 갔구나!"
내가 아니어도 다 똑똑한 친구들이니, 조금만 방향을 잡아주면 곧장 이해해 버린다.
설명 이후, 혜연이가 노트를 들어서 눈으로 풀이를 다시 훑었다.
"…오빠는 어떻게 이렇게 빨리 풀 수 있어요? 과학고 나온 애들보다 수학을 더 잘하는 거 같아."
"그러게. 오빠 6월부터 공부 시작했다는 기사 보고 시험용으로 속성 공부 한 줄 알았는데. 직접 보니까 내공이 장난 아니네요."
"하하… 그런가?"
미진이도 나에게 공치사를 해줬다.
지용이는 내가 푼 게 정말 맞는지 다시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형… 진짜 6개월 만에 이렇게 하는 거 맞아요? 진짜라면 말도 안 되게 천재인데……?"
"…하하."
사실, 6개월 만에 실력을 올린 건 아니다.
마법을 얻은 6월부터 수능 11월까지 6개월은 맞지만, 나는 루이스와 마인드 월드의 도움을 받았으니까.
그리고 수능 준비 기간보다 수능 이후 개강 전까지 한 공부량이 훨씬 많다. 그러니 내공이 있다고 느껴질 수밖에.
"그냥 감각이 조금 좋다고만 생각해 줘. 천재까지는 좀……."
"아니에요. 진짜 이 정도면 칭찬받아도 돼. 교수님이 기대 거는 만큼 오빤 진짜 최고예요. 웬만한 수학과 신입생들도 이렇게 못 할걸요?"
나중에 3, 4학년 되어서 진로를 이론물리 쪽으로 가닥을 잡는다면 어차피 물리학도는 수학도만큼 수학을 잘해야 한다.
물리학과와 수학과의 경계가 희미해질 정도로 물리학도는 깊이 있는 수학 실력을 요구받는다.
"그냥 연습을 많이 했을 뿐이야. 사실, 나 이 교재 벌써 한 번 다 뗐거든."
"엥? 진짜요? 벌써 이걸 다 봤다고요? 오빠 진짜 집에 가서도 공부만 하는 거예요?"
그렇다고 말하기도, 아니라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문제 풀이를 해버린 지금, 어느 쪽이든 부담스러운 관심을 받게 될 테니까.
"아니, 이렇게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는 오빠를 왜 다들 몰라줄까?"
"그러게. 다들 영원 오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해."
나는 미진이, 혜연이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고개를 갸웃했다.
"남들이 나한테 뭐라고 했어?"
그러자 미진이가 휴대폰을 보여준다.
"오빠, 설마 에브리원타임 어플 없어요?"
"……?"
미진이가 내민 휴대폰 화면에는 어떤 어플의 메인 화면이 떠 있었다.
<에브리원타임 : 대한대학교>
화면을 본 내 표정에 미진이가 놀랐다.
"와… 진짜 오빠는 공부만 하는구나. 전국 대학생이 다 쓰는 어플인데 이걸 모르다니."
"대체 이게 뭐 하는 건데? 아니, 그보다. 지용이 너도 이거 해?"
그러자 지용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
"이거 학생 인증하면 대한대 다니는 모든 학생들이 쓰는 글을 다 볼 수 있어요. 요샌 이거로 학과 공지도 볼 수 있고 캠퍼스 생활 팁 같은 거 얻을 수 있어서 필수라고요."
"에이 참. 오빠 핸드폰 이리 줘보세요."
보다 못한 혜연이가 내 핸드폰을 건네받아 어플을 설치해 주기 시작했다.
"오빠. 공부만 하지 말고 이런 거도 좀 보세요. 세상 돌아가는 건 알아야죠. 여기 익명게시판도 있는데 거기서 요즘 오빠 얘기로 핫하다고요."
"내 얘기……?"
익명게시판이란, 말 그대로 신원을 밝히지 않고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게시판이다. 그리고 그 게시판에는 대한대 학생 인증만 하면 재학생이든 졸업생이든, 어느 학과든 제약 없이 글을 쓸 수 있다.
그리고, 요즘 올라오는 글 중 나를 두고 쓴 글이 몇 있는데 조회수가 높다고 한다.
"이거 좀 보세요!"
<요즘 자연과학대 신입생들 학교 왜 다님?>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게 만드는 자극적인 제목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
-요즘 자연과학대 많이 물러졌더라. 원래 공부 분위기 제대로였는데 신입생들 옷 입고 다니는 꼴 보니까 무슨 클럽 온 줄 알았네.
특히 ㅇㅇㅇ.
ㅈㄴ 그 얼굴로 왜 물리학과 갔냐. 무슨 화류계 사람인 줄 ㅋㅋ. 공부 요령은 있어서 어케 수능은 잘 봤는지 몰라도 전형적인 양아치 얼굴이다.
그리고 우연히 내가 이번 주에 압구정 갔다가 걔랑 닮은 얼굴 봤는데 업소 들락거리더라. 그 ㅅㄲ 발랑까졌음. 순진한 자연과학대 순녀들아. 그 외모에 속지 마라. ㅋㅋ
엄청난 조회수로 화제글에도 오른 게시물이었다.
신입생들에 대해 일침을 놓는 척하며 시작하지만, 결국 날 저격한 글.
'뭐야 대체? 무슨 근거로 이런 소리를…….'
본문에 달린 댓글도 무지 많았다.
-대한대생이 쓴 거 맞나? 격 떨어지는 글이네.
-제재가 필요하다. 익명게시판 관리 좀 해야 할 듯.
-근데 ㅇㅇㅇ 그 사람 확실히 이상해 보이긴 함. 놀게 생긴 건 사실이잖슴? 본인은 안 놀고 싶어 한다 쳐도 주변에서 가만 놔둘 얼굴도 아니고.
-근데 그 물리학과 2학년 김원혼지 김완혼지 그 사람도 마찬가지 아님? ㅇㅇㅇ이나 그 사람이나 분위기 흐리는 건 도찐개찐 아닌가.
ㄴ야 ㅋㅋ 김완호는 왜 건드려 걔가 얼마나 성실한데. 과외도 열심히 해서 얼마 전엔 펜츠도 뽑았더라.
ㄴ설마 김완호 본인?
ㄴ이거 완호가 쓴 거임?
ㄴ펜츠C클래스 ㅋㅋ 할부면 누가 못 사.
-솔직히 자연과학대 예전 같지 않은 건 사실. 신입생들 공부는 제대로 하는지 모르겠다.
-뭐야. 누군데 우리 오빠 모함해! 잡히면 죽었어.
나와 같은 조인 미진이, 혜연이, 지용이는 나를 어느 정도 아니까 저런 글을 믿는 것 같진 않다.
하지만 나를 멀리서 볼 뿐인 다른 학우들은 어쩌면 저런 말에 나에 대한 안 좋은 편견을 가질지 몰랐다.
"보세요. 누군지 몰라도 오빠를 무지 질투하는 거 같아요!"
"못된 사람이야 진짜. 같은 대한대생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
하지만 나는 왠지 이 글을 누가 썼는지 알 것만 같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시겠다?'
나는 어떤 얼굴을 떠올리며 피식 웃어주고 어플을 종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