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연매출 10조에 육박하는 유성물산과 유성인베스트먼트를 이끄는 유성그룹의 총회장, 유성.
그의 외동딸 유다인은 사회부적응자였다. 소위 히키코모리.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감을 잡을 수조차 없어요. 어느 날 갑자기 학교에서 돌아온 뒤로 말도 안 하고 방에만 있습니다."
"……."
유다인은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이후 한 번도 이 집 밖을 나간 적이 없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학교도 자퇴해야 했다.
어느새 아줌마도 소파에 왔다.
"흑흑… 우리가 일 때문에 너무 바빠서 신경을 못 써줘서 그래요. 일이 바빠도 아이를 먼저 챙겼어야 했는데."
부잣집이라 좋은 일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런 짠한 사정도 있구나 싶다.
딸이 그렇게 된 이후로 아줌마는 부회장 자리에서 내려왔고, 아저씨도 최대한 재택 근무를 하는 쪽으로 회사의 업무 스타일을 바꿨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좀처럼 딸의 호전은 보이지 않았다고.
"그나마 과외 선생님들하고 어렸을 때부터 친했던 친구 둘하고는 얘기도 해요……. 그런데 애가 말이 너무 없어선지, 과외 선생님들은 2달을 못 버티고 다 그만두시지 뭐예요?"
어렸을 때부터 친했던 친구들이란, 예림이가 소개한 다른 학생들을 말한다.
그리고 다인이는 학교에 안 나가기 때문에 검정고시를 준비하며 집에서 과외로 공부를 하고 있었다.
"흠… 그렇군요. 일단 지금 다인이를 불러주실 수 있나요? 직접 만나고 싶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
과외를 받을 만한 애인지 아닌지는 이런 사정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공부를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돼.'
다인이 아빠와 엄마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주고받았다.
혹시라도 내가 불러놓고 과외 못 하겠다고 하면 딸에게 상처가 될지도 모르니까.
"걱정 마세요. 상처가 될 일은 없을 겁니다."
"여보, 다인이를 데려오세요."
"알겠어요……."
잠시 후,
작은방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
그 방에서 나의 과외 학생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 * *
유다인은 처음부터 문 틈 사이로 이영원의 모습을 관찰했다.
'저 사람이… 내 새로운 과외 선생님?'
그동안 열 명도 넘는 과외 선생님을 만나왔다.
전부 대한대생인 건 말할 것 없고, 수능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보유했던 선생님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온 선생님은 그보다 더했다.
'설마 인터넷을 시끌시끌하게 했던 그 사람일 줄이야……!'
이영원에 대한 기사나 뉴스를 본 적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아주 인상적이어서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저 선생님이라면…….'
모두가 자신을 두 달 이상 버티지 못하고 떠나 버렸다.
'6개월 동안 공부해서 만점 받을 만큼 머리가 좋으신 분이니까… 어쩌면 조금 다를지도……?'
유다인은 이영원이 과외 선생으로서 어떨까 생각하면서 기대 어린 호기심을 발동했다.
하지만, 기대감에 반해 그동안 쌓인 경험이 찬물을 끼얹는다.
'아니, 그래봤자 똑같을걸……? 똑같은 놈일 거야!'
대부분 유성 집안에서 뭔가 얻어내기 위해 발을 들였을 뿐, 자신을 가르칠 수 있을 만큼 인내심이 많은 선생님은 지금껏 한 명도 없었다.
결국 어느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이영원도 얼마 못 버티다가 결국 백기를 들리라.
그런 생각을 하는데,
"얘, 다인아."
"……!"
저벅-
엄마가 자길 부르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유다인은 재빨리 관심 없는 척 문 틈을 좁혔다.
철컥-
곧 엄마가 들어왔다.
"선생님이 너 보자고 하셔. 이리 나올래?"
"지, 지금?"
"응. 과외 할지 말지 결정하기 전에 직접 보고 싶다고 하시네."
"아……?"
이런 적은 없었다.
보통 보수가 얼만지 물어보거나 무조건 맡겨만 주시라고 허언 하게 마련인데, 갑자기 자길 보고 나서 결정하겠다니?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두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은둔한 지도 어느새 만 2년이 되어가는 유다인에게 새로운 만남은 늘 떨리는 일이었다.
"…긴장하지 말고. 엄마랑 아빠도 같이 있을 거야. 그러니까 잠깐만 나와봐."
"아, 알겠어."
끼익-
이내 문이 열리고, 유다인과 이영원은 거실에서 대면했다.
이영원이 싱긋 웃어 보이자 유다인은 고개를 푹 숙였다.
"다인이가 쑥스러움이 많네요."
"내숭이죠, 내숭. 호호……."
다인이 엄마는 다인이의 손을 잡고 와서 이영원의 반대쪽에 앉혔다.
이영원이 먼저 상투적인 질문을 한다.
"혹시 다인이는 꿈이 있니?"
"……."
다인이가 대답을 못 하자, 다인이 엄마가 보챘다.
"다인아, 너 꿈 있잖아. 얼른 말씀드려~!"
중학생 때부터 갖고 있던 다인이의 꿈.
"과, 과학자요."
의외의 대답에 이영원이 눈에 이채를 띠었다.
"오, 나랑 길이 비슷하네? 그럼 대학에 꼭 가야겠다."
"네, 네에……."
꿈을 물어본 것은 자연스럽게 공부 의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꿈이 없어도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대개는 꿈에서 공부의 원동력을 얻기 때문이다.
"우리 애가 진짜 영특해요. 중학생 때는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니까요? 지금은 학교에 안 나가고 공부를 오래 놔서 그렇지, 시작하면 다시 잘할 애예요. 영원 선생님이 좀 잘 부탁해요."
다인이 엄마는 이영원의 반응을 살피다 눈가에 이채가 오른 걸 보고 이때다 싶어서 치고 나갔다.
대놓고 선생님 호칭도 써버렸고!
"물리학 전공인 저랑 비슷한 길을 가려는 거 같아서 저도 확 끌리네요. 하하."
"다인아. 너 이 선생님 알지? 뉴스에도 나오고 인터넷에도 많이 나왔잖아. 같이 공부하면 너무 좋겠다!"
"……."
유다인은 확 끌린다는 이영원의 말에 당황해서 얼굴이 붉어졌다.
그때, 이영원이 유다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나 링크를 사용하려는 목적이다.
"다인아, 과학자가 꿈이라니 반갑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악수부터 하자."
"아, 악수요?"
"응. 혹시 모르잖아? 우리가 나중에 같은 대학에서 선후배로 만나게 될지?"
"어……."
다인이는 당황했다. 처음 보는 남자의 손을 잡는 건 아직 너무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러자 다인이 엄마가 보챈다.
"얘가? 뭐 하고 있어 얼른 악수해야지~! 귀한 선생님이신대!"
다인이는 엄마의 말에 머뭇거리다가 이내 이영원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동시에, 이영원이 마나 링크를 발동했다.
-대상 : 인간.
-상태 : 좌절(만성). 두려움(만성). 질풍노도(일시). 우월감. 지식의 저주. 열정.
마나를 타고 유다인에 대한 정보가 이영원의 머릿속에 전해졌다.
저절로 입꼬리가 슥 올라갔다.
'이것 봐라……?'
성장에 방해가 될 만한 몇 가지 요소가 있긴 했지만, 몇몇 키워드는 그 반대의 가능성도 시사하고 있었다.
'잘만 도와주면 폭발적인 성장도 가능하겠다.'
이영원은 마나 링크를 마치고 유다인과 그의 부모님에게 씨익 미소를 보여줬다.
준비해 온 다른 질문은 더 이상 필요 없었다.
"선생님, 그럼 과외는……."
웃고 있는 이영원에게 다인이 엄마가 묻는 한편, 유다인은 이영원의 손을 잡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심장이 쿵쿵거리고 호흡이 가빠지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뭐, 뭐지. 이 사람… 왜 갑자기 심장이…….'
그래서 살짝 눈을 들어 앞에 있는 이영원의 얼굴을 보는데, TV에서 봤던 그 어떤 연예인보다 멋있는 남자가 자신을 향해 활짝 웃고 있었다.
"다인아 앞으로 잘 부탁한다."
* * *
다인이와 과외 약속을 하고 난 뒤, 이어 두 집을 더 돌아 예림이가 소개해 준 학생들을 전부 만났다.
세 학생은 서로 어릴 적부터 친구였고, 모두 공부에 대한 뜻은 있는 친구들이었다.
그리고 다인이만큼은 아니지만 모두 부유한 집의 자녀들이었다.
'잘만 도와주면 금방 성장할 애들이었지.'
다인이를 제외하면 가업을 잇고 싶은 애들이라 그런지 향상심이 컸다.
아무튼, 예림이네 지인들은 전부 당일에 과외를 확정 지었고 이제 예원이네 학교 지인들만 면접하면 과외 준비는 모두 끝이다.
"하, 그 많은 애들을 언제 다 만나냐?"
서른 명이 거뜬히 넘은 지원자로, 오전부터 장사 시작 전까지 쉬지 못할 거 같다.
* * *
MT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학교, 집, 마인드 월드를 반복하는 나의 일상은 달라진 게 없지만,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들이 많이 달라졌다.
띵~
-영원아, 나 영철 선배야. 동아리방 놀러 와~
-영원아. 당구 칠 줄 아니? 혹시 칠 줄 모르면 한번 와. 물리 공부에 도움도 되고 재미있어.
-형 오늘 밤에 기숙사 애들끼리 술 한잔하려고 하는데 오실래요?
-영원 오빠, 혹시 볼링 칠 줄 아세요? 1학년끼리 볼링 치러 갈까 하는데 같이 가요!
날 찾는 사람도, 날 좋아해 주는 사람도 많아졌다.
원래 일반물리 같은 조인 김미진, 류혜연, 이지용을 제외하면 솔직히 인사를 주고받는 애들도 거의 없었다.
'역시, 대학생은 1박 2일인가.'
하룻밤을 같이 부대끼고 놀면서 각인된 인상은 쉽게 벗겨지지 않는다.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이렇게 한 학기, 한 학년이 지나갈 듯하다.
그리고,
"……."
째릿!
한 번 눈을 마주치고 금방 고개를 돌려 버리는 어떤 사람.
"푸핫."
나는 카페에 앉아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다가 우연히 지나가던 김완호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김완호는 이제 나와 눈 한 번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에브리원타임 어플에 날 음해하는 글도 더 이상 올리지 못하는 듯했다.
물리학과 MT 썰은 이미 대한대 전체에 퍼진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으니까.
눈치 파악이 되는 놈이라면 더 이상 내 앞에서 설칠 수 없다.
'귀여운 자식. 다음 학기엔 같이 들을 수 있는 수업도 있을 텐데. 그땐 어떤 태도일지 궁금하네.'
쪼로로록-
김완호가 꼬리를 내리니 왠지 모르게 김이 빠진다. 이내 남아 있던 커피를 한 번에 다 마셔 버렸다.
그리고 다음 강의를 위해 움직이려는데,
띵~
다시 한번 휴대폰 알림이 떴다.
<입금 : ₩5,000,000>
"오, 마지막 학생이 과외비를 입금했군."
지난 주 토요일 면접을 통해 최종적으로 뽑힌 과외 학생은 10명.
서른 명 넘는 지원자 중, 이 정도로 가려낼 수 있었던 건 전부 마나 링크 덕이었다.
공부 외에 다른 목표가 있는 애들은 전부 탈락시켰다.
'예컨대 나랑 연애를 하고 싶어 했다던가…….'
면접 당시를 생각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일부는 노골적으로 나에게 애정의 눈빛을 보냈는데, 큰일 날 일이다.
'물리학자 되기 전에 잡혀갈 테니까!'
아무튼, 이로써 예원이네 학교에서 10명. 예림이 지인이 세 명.
총 13명의 학생을 나의 첫 제자(?)로 거두었다.
처음치고 제자 수가 많긴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들이 원한다는데.
나는 그들의 공부를 도와주면서 스스로 발전의 기회를 얻고, 그들은 나에게 공부에 관한 도움받는다.
이렇게 서로 윈윈하는 관계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지만, 썩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잔액 : ₩80,000,000.>
과외를 위해 새로 개설한 계좌에 벌써 이만한 돈이 쌓여 있었다.
"하하… 한 달에 8천이라… 돈 버는 게 이렇게 쉬운 일이었나?"
현실감이 안 들긴 하지만, 확실한 건 유일한 수능 만점자 타이틀이 생각보다 대단하다는 것이다.
'난 받은 만큼 보답해 주면 되니까.'
돈을 어떻게 쓸지는 아직 보류로 하고 강의실로 향했다.
그런데,
둥둥땅~ 둥땅~
"음?"
웬일로 예원이로부터 먼저 전화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