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와하하하!"
"꺄아아악!"
첨벙! 첨벙!
미끄럼틀에서 내려오며 사람들이 물에 빠지고 물을 먹어 허우적대는 모습이 주변의 웃음을 자아냈다.
수심이 깊지 않고, 미끄럼틀과 풀장 지척에서 대기 중인 1학년들이 안전 사고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으니 모두 안전에 걱정 없이 즐길 수 있었다.
"…말도 안 돼! 분명 내가 더 짧은 미끄럼틀을 탔는데!"
"오예~! 문화상품권 내 거다! 하하하!"
가장 높은 미끄럼틀에 올랐 탔던 사람이 의외의 결과에 방끗 웃는다.
최대 동시 탑승 인원이 세 명이고, 셋은 동시에 출발하는데, 이때 부표를 먼저 잡기 위해 어느 미끄럼틀을 선택할지 가위바위보로 결정한다.
하지만, 사이클로이드 곡선의 비밀을 모르는 사람들은 부표를 빨리 잡기 위해 대부분 낮은 미끄럼틀을 택했다.
2미터짜리 미끄럼틀은 발만 뻗어도 밑에 도착하게 생겼으니, 전부 그 미끄럼틀을 선호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게 7미터짜리 미끄럼틀에서 내려오는 속도가 본인과 똑같지 뭔가?
"다음 순서 준비되셨으면, 스타트!"
"꺄아아악!"
"으아아아~!"
슈우우와아!
이전 참가자들이 풀장에서 빠져나가자마자 곧장 다음 순서가 진행되었다.
"네! 1번 미끄럼틀! 앞서가고 있습니다! 예~! 잡았네요! 이번에도 1번 미끄럼틀을 선택한 분이 우승입니다!"
마이크를 잡은 송영구와 류혜연이 참가자들의 상황을 중계했다. 중계자가 있으니 행사는 더 활기차고 즐겁게 느껴졌다.
웅성웅성.
결과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슬슬 눈치채기 시작한다.
"야, 저거 꼭 낮은 미끄럼틀이 좋은 게 아닌 거 같아. 차라리 제일 높은 1번 미끄럼틀 선택해서 가속도를 받는 게 나아 보여. 어차피 내려와서 20미터 헤엄을 쳐야 되니까!"
"진짜 신기하네. 거리가 다른데 어떻게 내려오는 속도가 똑같지?"
사람들이 궁금해하면 물리학과 1학년들이 주변에 있다가 옆에 붙어서 슬쩍슬쩍 알려준다.
"이게 사실은요."
이러쿵저러쿵.
"아~ 대박. 이게 그 재미없는 미적분이랑 관련 있는 거였어요?"
"네, 맞아요."
"근데, 가장 빨리 내려오게 되는 원리가 뭐예요?"
"그건 중력가속도가 가장 세게 작용할 수 있는 모양이라 그런데요, 여기에는 중력 외에 다른 외력이 작용해선 안 된다는 조건이 붙지만 표면에 흐르는 물을 이용해서……."
물리학에 관련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나눌 수 있게 된 것은 이 미끄럼틀 체험 덕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사람들은 신기하고 스릴 있는 경험을 통해, 높게 쌓았던 물리의 벽을 어느 정도 낮출 수 있었다.
"와아~! 엄마! 너무 재밌어. 한 번 더 할래!"
"아이고…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이제 그만하자. 너무 자주 타면 폐 끼치는 거야."
어느 모자의 대화를 듣던 1학년이 가까이 간다.
"아녜요, 어머니! 마음껏 타세요!"
"아이고… 그래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순서만 지킨다면 얼마든지 타도 괜찮아요."
"와아~! 신난다!"
"기다리시면서 솜사탕이랑 팝콘도 드세요! 초등학교 어린이까지는 무료로 제공해 드리고 있어요."
"어머, 고마워요. 정말로."
나와 송영구, 채신용, 이지용이 놀이기구 제작부터 설치까지 전체적인 그림을 짰다면, 나머지 동기들은 큰 그림 안에서 세세한 부분을 채우고 색을 입혔다.
미끄럼틀 주변의 팝콘 부스, 솜사탕 부스, 풍선 부스를 비롯해 에어샤워장은 전부 나머지 인원이 플랜을 짜고 준비한 것들이다.
'후후. 순조롭군.'
역사상 물리학과뿐만 아니라, 자연과학대 소속 학과 그 어떤 곳에서도 이 정도로 사람을 끌어모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사람이 붐비는 옆 동네 공대와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우리가 준비한 사이클로이드 미끄럼틀로 인해 자연과학대 앞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사이클로이드 미끄럼틀 옆에는 또 하나의 비밀 병기가 있다.
푸슈우우우우!
"우와아아악-!"
오성그룹에서 후원조로 빌려준 거대 원통형 구조물이 대활약을 하고 있었다.
사람 둘이 원통 안에서 공중에 뜬 상태로 최대 높이 10미터까지 치솟았다. 한 명은 오성그룹에서 파견된 직원이었고, 한 명은 방금 미끄럼틀을 타고 에어 샤워를 마친 체험자였다.
'일명 무중력 체험 장치.'
밑에서 강한 바람을 불어, 몸을 띄워주는 장치였다.
지구에서 작용하는 중력의 힘은 9.8m/s2.
그 힘과 같은 크기의 힘을 바람으로 불어주면 무중력과 비슷한 상태를 체험할 수 있다. 바람의 힘을 조절해서 높이 올라갔다 내려갔다도 가능하다.
원래 네버랜드에 놓으려던 물건인데, 한 명씩밖에 못 태우고, 진행 요원이 늘 같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가성비가 나오지 않아 오성그룹 연구센터에 보관만 하던 물건이란다.
원통이 투명하기 때문에 공중에 뜬 체험자는 입을 크게 벌리고 기겁을 했다.
10미터면 아파트 4층에 가까운 높이.
밑에 서 있는 사람이 이쑤시개처럼 작아지고 학교 전경이 거의 다 보인다.
옆에서 볼 땐 별거 아닌 거 같아도, 실제로 공중에 떠보면 그런 말 못 한다.
"으아아아아!"
슈우우우우웅-
곧 바람이 천천히 멈추며 체험자와 진행 요원을 지면에 착지시켰다.
"와… 이건 대박이야 진짜!"
체험자는 카타르시스에 젖어 한껏 감격을 내뱉었다.
"어때? 안 무서웠어?"
"그냥 아무 생각 없어져. 진짜 대박… 오늘 이거로 축제 다 봤다고 해도 불만 없을 듯."
체험자는 친구들에게 자랑처럼 체험담을 늘어놓는다.
"좋겠다… 난 무서워서 못 하겠던데."
"난 옷 젖는 게 영 거슬려서……."
"나 봐. 이제 거의 말랐지? 그래도 아직 조금 축축하긴 하지만, 햇빛에 걷다 보면 금방 마를 거 같아."
무중력 장치는 에어 샤워로 애벌한 건조를 추가로 진행해 주는 역할도 했다.
씩.
줄을 길게 늘어서서 문화상품권을 타기 위해 경쟁하듯 미끄럼틀을 타는 사람들과, 공중에 붕 떠올라 기막힌 체험을 하는 사람들.
자연과학대 앞마당에서 웃음과 기분 좋은 비명이 그치질 않았다.
'바로 이거였어.'
딱 내가 생각했던 그림.
사람들에게 물리에 대한 이야기를 거부감 없이 전달했을 뿐만 아니라, 잊지 못할 추억도 심어줬다.
나는 스스로 뿌듯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흐뭇하게 해?"
"…어, 어어?"
"설마, 자기 자신을 대견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옆에 있던 홍예림에게 속마음을 들키고 말았다.
나는 머쓱해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조금은 그렇네. 내 머릿속에만 있던 장면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게 신기해."
그러자 홍예림이 친근하게 다가와 내 팔짱을 꼈다.
'읏……?!'
보는 눈도 많은데, 얘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당황스러웠다.
'누가 보면 사귀는 줄 알겠다!'
홍예림이 말했다.
"나는 오빠가 참 신기해."
"뭐, 뭐가?"
"처음에 재수학원에선 좀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면 알수록 존경스러워."
"뭐, 뭐어?!"
"사람이 어떤 계기로 마음을 먹으면, 이렇게 달라질 수도 있구나 싶어서. 원래 사람 잘 안 변한다잖아? 근데 오빠는 그런 통념을 완전히 깨고 있어."
"……."
"공부도, 과외도, 학과 생활도. 마음먹은 일을 하나하나 묵묵히 해나가는 모습. 진짜 멋있다. 헤."
홍예림이 화사하게 웃으며 날 올려다본다.
'얘, 얘가 왜 갑자기 쓸데없는 말을…….'
나는 너무 가까이 붙은 홍예림에게 말했다.
"저기, 예림아. 근데 넌 너네 학과 안 가봐도 되니……?"
1학년이면 바쁠 텐데…….
"괜찮아~ 우린 다 순서 정해서 부스 맡기로 했거든. 난 이틀째만 하고 첫째 날이랑 셋째 날은 자유야~!"
"…그, 그렇구나. 그럼 다른 학과도 좀 다녀보지 왜 여기서만……."
"오빠, 만에 하나 안전 사고 발생했을 때 나 같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어? 나 예비 의사라구~! 기본적인 응급처치술 정돈 할 줄 알아!"
"……."
내 옆에 어슬렁대는 것에도 다양한 이유가 존재했다.
"헤헤. 물리학과 축제 너무 재미있어. 여기서만 축제 내내 보낼 수도 있겠다."
"그, 그렇구나… 알겠으니까, 일단 이 팔 좀……."
나는 예림이를 떨어뜨려 놓으려고 붙잡힌 팔을 살짝 흔들었다.
그런데 마침,
"샘~!"
"샘! 영원 샘!"
"……?"
갑자기 들려오는 익숙한 소리에 나와 홍예림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너, 너희들!"
열두 명의 고등학생들.
나의 과외 학생들이었다.
"너희가 여긴 어떻게……."
구선미가 가장 먼저 와서 말한다.
"어떻게는요! 우리 중간고사 끝나서 학교 전체가 여기로 견학 왔어요! 여기 대한대잖아요!"
"아……!"
대한제는 다양한 중고등학교에서 진로 탐색 명목으로 견학을 온다.
거기에 김포국제외고 학생들도 포함된 듯했다.
"히히, 샘 있는 물리학과로 제일 먼저 달려왔어요. 학교가 너무 예뻐요. 저도 꼭 여기 올 거예요!"
"그, 그럴래?"
"샘~! 안녕하세요."
속속 도착한 아이들이 나에게 가까이 와서 인사한다.
모두 밝은 얼굴이다.
단 한 사람만 빼고.
'예원이 녀석. 부끄럼 타나 본데.'
예원이는 나랑 아는 사람들이 있는 학교에서 자신과 나의 관계가 알려질까 봐 어딘가 수줍어하는 듯했다.
나는 여동생의 모습을 보고 귀여워서 피식 웃었다.
"근데 이 언니는 누구예요?"
수군수군.
"되게 예쁘다… 샘 여자친군가 봐!"
"완전 대박… 대한대 올 이유가 생겼어."
남여 학생들 사이에서 수군대는 말이 오갔다.
단, 구선미를 비롯한 몇 명에게서는 질투의 시선이 느껴졌다.
내 가까이 붙어 있는 홍예림을 의식하는 모양이다.
그때, 남자 애들 몇 명이 대놓고 물어봤다.
"샘, 여자친구예요?"
그러자 홍예림은 활짝 웃으며 검지로 자길 가리키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한다. 그리고,
"아하하하!"
걸쭉하게 웃어젖힌 홍예림은 그 말을 한 학생의 어깨를 팡팡 쳤다.
"와아~ 오빠 과외 학생들. 너무 귀엽다아~! 좋았어! 기분 좋아졌다! 너희들 오늘 하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다 말해! 오늘 하루 축제 동안 내가 다 쏜다!"
"우와아아아!"
"오와아아!"
몇몇 애들이 방방 뛰며 좋아했다.
나는 난감해서 계속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그래도 잘된 건가. 애들이 온 덕에 예림이가 나한테서 좀 떨어졌으니.'
나는 혼자 조용히 있는 예원이에게 갔다.
"예원아, 너도 인사할래? 오빠 재수 때부터 동기야. 소속은 의대."
"…음, 뭐……."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는 예원이.
사실 예원이도 어울리고 싶을 거다. 워낙 사교성이 없을 뿐.
나와 예원이가 애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홍예림에게 갔다.
"안녕하세요, 이예원이라고 합니다."
"오~?!"
이름을 듣자마자 예림이가 눈을 빛낸다.
"얘는 내 여동생이고, 얘네들 학교에서 전교 1등이야. 하하."
내가 자랑스럽게 얘기하자, 예원이는 뭐 그런 걸 얘기하냐는 얼굴로 핀잔을 줬다. 어차피 대한대 올 사람이면 웬만하면 전교에서 1등은 한 번쯤 해봤던 사람이라는 걸 이예원도 알기 때문이다.
홍예림이 아주아주 사랑스러운 얼굴로 예원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머! 네가 예원이구나!"
마치, 원래 알았던 것처럼 알은체하는 홍예림.
"오빠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 오빠 말처럼 똘똘하고 예쁘게 생겼네?"
"네, 네……?"
"나는 홍예림이야. 홍예림. 편하게 언니라고 불러!"
"아, 네… 예림 언니."
"아아악! 너무 귀여워 예원이!"
와락!
이예원이 쑥스러워할 때 홍예림이 기습적으로 껴안았다.
나는 예원이만큼 놀라서 헉 소리를 냈다.
어떻게 말려볼 틈도 없이 갑자기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예원이 저러는 거 되게 싫어할 텐데.'
평소 스킨십을 안 좋아하는 아이다.
사춘기의 여파가 남아 있기 때문인지 엄마랑도 접촉을 잘 안 하는 녀석.
나는 걱정되는 마음으로 둘을 지켜봤다.
다행히 예원이는 큰 반항은 없었다.
곧 예림이가 조금 떨어져서 말했다.
"언니 얼굴 잘 기억해. 도움이 필요할 때면 언제든 달려가 줄 네 버팀목이니까!"
"……."
"같이 따로 밥 한 번 먹자! 너희 부모님이랑 같이 봬도 좋고! 히히."
홍예림은 그렇게 말한 뒤, 뒤에 있는 나를 슥 돌아본다.
경계심 따위는 단박에 깨뜨리며 사람을 휘어잡는 엄청난 싹싹함과 가공할 속도의 일 처리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이 녀석… 슬슬 무서워지려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