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강남의 유명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TV에도 여러 번 나온 셰프가 운영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입구부터 분위기가 제법이다.
"오빠, 여기야!"
먼저 도착해 있던 홍예림이 손을 들어 나를 부른다. 나도 손을 들어 인사한 뒤, 곧 그녀가 있는 맞은편 자리에 가서 앉았다.
"공부하느라 힘들지?"
"아휴. 죽겠어 정말. 이러다 단명하겠다 싶더라니까?"
예림이는 기말고사에 대한 부담감이 큰 모양이다.
'집에 가기 전에 마법 효과나 체험시켜 줄까.'
스퍼트를 내야 할 이 중요한 시간에 나를 만나겠다고 나온 걸 보면 방전 직전인 게 틀림없다.
"그래서 오늘 보자고 한 이유가 뭐야? 소원 있다면서."
"응, 소원 있지."
"말해봐.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면 해줄게."
그러자 예림이는 씩 웃는다.
"이미 들어주고 있는데?"
"엉? 무슨 소리야 그게?"
"데이트. 데이트하자고 부른 거야. 내 소원."
"…엥?"
나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표정이 감춰지지가 않는다.
'데이트……?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홍예림은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손에 얼굴을 기댄 뒤 날 바라본다.
"그냥 오빠 얼굴 보는 게 내 힐링이라서. 호호."
"얘, 얘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예림이 이 녀석은 저런 말을 정말 아무렇지 않게 잘도 한다.
쪼르르-
곧 웨이터가 와서 우리 잔에 와인을 따라주고, 전채를 내준다.
"농담 아닌데?"
"진짜 다른 소원 있는 거 아니고?"
"응. 진짜 다른 거 없어. 흐흐."
나는 맥이 빠져 와인을 한입에 들이켜 버렸다.
"어머, 뭐야? 그 박력은?"
"난 또 무슨 엄청 큰 부탁 하나 싶어서 긴장했잖아. 휴우."
"이 정도면 큰 부탁이지. 오빠는 바쁘니까!"
"그, 그런가?"
이야기와 함께 식사가 시작되었다.
"근데 오빠한테 궁금한 게 있어."
"뭔데?"
"요즘 바쁘게 하고 있는 연구라는 거. 대체 무슨 연구야? 축제 마지막 날도 연구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갑자기 집에 갔었잖아."
내가 축제 이후로도 학교 수업을 마치고 곧장 집에 가길 반복하니까 뭘 하는지 궁금했나 보다.
"그냥 물리 관련된 거야."
"그래서 그게 뭐냐구~"
말해줘도 별로 관심 없어 할 거 같아서 그냥 뭉뚱그려서 말했던 건데 이번엔 구체적으로 묻는다.
"아, 그게 뭐냐면. 하나는 수학적 난제에 대한 거고, 다른 하나는 배터리와 관련된 거야."
"수학적 난제와 배터리……?"
"응. 너 리먼가설이라고 알지? 난제는 그걸 말하는 거고, 배터리는 전고체 배터리라고 차세대 배터리라고 일컬어지는 게 있거든."
"아, 나도 그거 알아!"
내가 마인드 월드에서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두 가지는 워낙 유명한 주제라 관련 학계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라도 대부분 안다.
'거기에 이세계 마법학이 접목되어 있다는 사실은 말할 수 없지만…….'
"와~ 근데 그런 걸 왜 연구하는 거야? 물리학과 학생은 원래 그런 거 연구하나?"
"음~ 그렇다기보단 개인의 취향에 가깝지. 연구 분야는 워낙 많으니까. 나는 이 연구를 통해 추후 회사를 차릴 생각이야."
예림이는 내가 하는 이야기가 재미있는지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귀를 기울인다.
'보통 이런 대화 재미없어할 텐데… 얘가 특이한 건가?'
"그럼 거기서 더 궁금한 게 있는데, 그런 연구는 보통 연구실에서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집에서 어떻게 연구한다는 거야?"
"음, 물론 실험실에서 할 수 있으면 좋지. 하지만 집에서 할 수 없는 것도 아니야. 좋은 가설과 이론을 설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거든."
비록 마인드 월드에 관해 이야기할 수 없어서 이 정도로 얘기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이론물리학 분야만 해도 거의 모든 연구가 책상 앞에서 이루어진다. 실험실에 가봤자 딱히 도움받을 수 있는 게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대부분 아는 뉴턴, 가우스, 파스칼 같은 대학자들도 그랬다고.'
그들이라고 다 연구실, 실험실에서만 살았던 게 아니다. 많은 시간을 자기 집에서 평범하게 살면서 연구했고, 그럼에도 세상에 유구한 업적을 남겼다.
공부나 연구가 꼭 학교 같은 단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그런 것들이 많은 도움을 주긴 하지만, 진이 말했던 것처럼 막상 결정적인 대발견 내지 깨달음은 평범한 일상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와~ 그 말 멋있다!"
"그, 그래?"
"꼭 학교에서만 연구하는 게 아니다라… 우와. 오빠 벌써 무슨 대학자 된 듯한 느낌이야. 진짜 1학년 맞아? 아니, 진짜 그 재수학원에서 겉돌던 오빠 맞아?"
"하, 하하……."
그랬다.
예림이는 나의 재수학원 시절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6월 모의고사 전까지만 해도 엉망진창으로 공부했는데, 그 모습을 알고 있는 예림이 앞에서 이런 아는 체를 하다니.
민망하기 그지없으니 빨리 아무 말이나 해서 화제를 돌려야겠다.
"아, 아무튼. 일단 소속될 연구실이나 실험실 없어도 당장 할 수 있는 연구부터 하려고. 어차피 배터리 연구 같은 경우에는 실제로 개발하려면 비용도 엄청 많이 들거든. 설비랑 공장도 필요하니까 나중에 투자도 받아야 할 거고……."
"오빠."
예림이가 갑자기 내 말을 끊고 날 불렀다.
"응?"
"내가 투자해도 돼?"
"뭐? 배터리?"
"아니."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오빠한테 투자하고 싶다고."
"…무슨 말이야?"
예림이는 오늘따라 아리송한 말을 여러 번 한다.
"오빠가 뭘 하든, 거기에 내가 투자할게. 오빠가 하고 싶은 연구든 개발이든 내가 전폭적으로 지원한다고."
"……."
나는 얘가 지금 농담을 하나 싶었다.
그런데, 예림이네 부모님은 전문 투자가이다.
소위 주식 부자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
예림이가 나에게 부잣집 과외 학생들을 소개시켜 줄 수 있던 것도 예림이네가 그 집안들과 기업가&투자자로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다인이네 유성그룹 것만 해도 10%가량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하니까…….'
아직 예림이가 얘기한 내용만 듣고 알 뿐이지만, 얘기하지 않은 것까지 치면 훨씬 더 큰 부자일 것이다.
"너… 그거 진심이야?"
나는 확인차 물었다.
그러자 홍예림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진심으로 오빠한테 투자하고 싶어. 내 인생 전부를 걸고."
"……."
그 이야기를 듣고 나도 모르게 들고 있던 포크를 떨어뜨렸다.
* * *
달그락-
"먹어."
"……."
임나연 앞에 짜장면 한 그릇이 놓였다.
후루룩! 후루루룩!
임나연을 구석에 감금해 놓고 옆을 지키고 있는 사내들은 각자 자기 그릇을 코에 묻고 짜장면을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임나연은 음식 생각 자체가 들지 않았다.
"줄 때 먹어라."
"안 먹으면 후회할 텐데. 쯧쯧."
사내들은 임나연의 처지가 딱하다는 듯 혀를 찬다.
하필 꼭지 돌아버린 미친개 강현호에게 걸렸으니 말이다.
"어이, 아가씨. 그냥 좋게 협조해요. 험한 꼴 보기 전에."
"그래. 그렇게 뻗대봤자 그쪽한테 좋을 거 하나 없다니까?"
"……."
임나연이 잡혀 온 이유는 다름 아닌 이영원 때문이다.
첫째 이유는 이영원과 연인 사이로 의심된다는 점.
그건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그래도 최소한 썸싱이 있었을 거라고 오해를 샀다.
어제 버스에서 이영원과 헤어진 후 가련한 여인처럼 종착지까지 간 걸 보면 막 이별했거나 싸웠을 거란 추측이다.
임나연은 답답해서 숨이 넘어갈 듯했지만, 이들은 자기 말을 전혀 듣지 않는다.
'아, 아예 아니라고 말할 순 없지만.'
그리고 둘째 이유.
연인이 아니더라도 어쨌든 재수학원 때 알던 사이인 건 맞을 테니, 주변 친구들 중 이영원을 잘 아는 사람이라도 불러내라고 했다.
'어떻게든 오빠에 대해 알아내려고 하는 걸 보면 분명 나쁜 목적이 있는 거야…….'
대체 왜 이영원에 대해 알려 하냐고 수차례 물었지만 이유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
임나연은 거기서 확신했다. 필경 이영원이 잘못한 일은 없을 거라고.
'오빠처럼 바르고 순수한 사람 못 봤어. 이런 못된 사람들한테 원한 살 만한 짓을 할 리가 없다고……!'
이미 본인을 납치한 것만 해도 선을 넘은 행동이다. 이런 짓을 대낮에 벌이는 막무가네인 사람들인데, 이영원에게 무슨 그리 대단한 원한이 있다고 이러는 걸까 생각해 보면 답은 딱 나왔다.
"아가씨. 시간 끈다고 뭐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면 곤란해. 그냥 시원하게 불라니까? 그럼 조용히 보내준다고."
"……."
임나연은 정보를 불면 이영원과 그의 가족이 위험한 처지에 놓일 수도 있기 때문에 절대 불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분다고 해서 날 조용히 보내줄 사람들도 아니고…….'
임나연은 쪼그려 앉은 채 고개를 숙여 두 팔에 얼굴을 묻었다. 휴대폰을 빼앗겨서 도움을 구할 방법도 없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지금 상황이 그저 막막할 뿐이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임나연은 이영원에 대한 걱정을 하다가 문득 기말고사가 걱정되었다.
부질없는 걱정이란 걸 알면서도.
* * *
부우우우-
화아아아-
"……!"
"오오."
진의 동공이 커진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흡……!"
나는 구슬에 올렸던 손을 내리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 훈련은 언제 해도 엄청난 심력을 요구한다.
"헉… 허억……."
짝- 짝-
진이 나에게 박수를 보냈다.
"꽤 하는군."
"…그런가?"
"루이스보다 빨랐다. 재능으로 치면 네가 좀 더 낫군. 그래봐야 도토리 키 재기다만."
"하하……."
진은 셀프 디스나 마찬가지인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는 구슬을 이리저리 살펴본다.
마나 분해 구슬은 푸른 빛으로 가득 차 있다.
마나가 분해되는 속도보다 더 빨리 마나를 가득 주입했기 때문이다.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히 해냈군. 통과다."
영롱하게 빛을 내던 구슬은 이내 얼마 못 가 다시 원래 투명하던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제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는 건가?"
"훗."
처음엔 기초 체력을 다지고, 회피 훈련을 했다.
그다음이 바로 이 마나 분해 구슬 훈련.
특히, 이 훈련이 필요하다고 했던 이유는 다음 훈련 단계에서 죽지 않기 위함이라고 했다.
우우웅-!
훈련의 성과인지, 내가 주먹에 힘을 주는 것만으로 주먹 주변의 마나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오오…….'
원래 매일 6시간씩 빠지지 않고 훈련하다가 요즘 연구를 시작한 이후론 4시간으로 줄였다.
하지만 꾸준함의 성과로 결국 이번 단계도 클리어했다.
퍼억!
"……!"
진이 기습적으로 뻗은 주먹을 내가 반사적으로 막았다.
상당히 얼얼한 타격.
이 훈련 전이었다면 반응은 했을지언정, 파괴력에 뼈를 다쳤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견딜 만하다.'
진이 씩 웃는다.
"이제 준비가 된 거 같군. 다음 단계 훈련을 시작하겠다. 바로 해보겠어?"
"음… 좋아. 해보지 뭐."
내가 몸을 바르게 했다.
그러자 진이 손가락을 따악 튕긴다.
그 소리에 맞춰 사위가 어두웠졌다.
그리고 드러나는 결투장.
바뀌어 버린 환경에 긴장감이 순식간에 밀려든다.
"집중해라. 한눈파는 순간 진짜 죽을지도 모르니까."
마인드 월드 안일지라도 순간적으로 머리가 터지거나 몸이 양단되는 등 치명적인 외상을 당하면 충격에 의해 뇌사에 빠질 수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마나를 집중시켜 방어하는 기술을 익힌 것이었고.
'어디 한번 해보자고…….'
나는 전신에 마나를 고르게 분포시킨 뒤 이 결투장에 등장할 무언가를 기다렸다.
새로운 목표는 언제나 나를 두근거리게 만든다.
"소개하지. 네르샤이아 대륙 최강의 무력 집단, 로시온 기사단!은 아니고, 거기에 입단을 희망하는 기사 아카데미의 생도다."
"……."
다소 김빠지는 소개 이후, 내 앞에 검은색 실루엣이 뭉글뭉글 나타났다.
그것은 점점 내 앞으로 다가오며 모습을 덧입었다.
전형적인 격투가의 모습을 한 인영.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죽진 않겠지……?'
진이 워낙 분위기를 잡아대는 터에 조금 무섭긴 하지만, 차라리 잘됐다.
'생각이 좀 복잡할 땐, 몸을 움직이는 게 최고니까.'
아까, 예림이와 식사하던 자리에서 있었던 일은 정말이지 생각만 해도 혼란스럽다.
'자기 인생을 걸고 싶다니, 나 원 참…….'
나는 너무 당황해서 아무 대답도 못 하고 멍하니 있다가 레스토랑을 나왔다.
대체 홍예림은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한 걸까.
'설마… 날 좋아하는……?'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시야가 번뜩였다.
푸걱!
피슈우웅! 콰앙!
"……!"
무언가 내 복부를 매우 빠른 속도로 강타했다.
나는 절로 눈을 까뒤집었고, 수십 미터를 날아가 벽에 강하게 충격했다.
"커, 커허억……!"
내장이 전부 찢어지는 듯한 격렬한 통증이 몰려온다.
진이 멀리서 혀를 찼다.
"쯧쯧. 집중하라니까. 기사 생도라고 우습게 보면 곤란해. 로시온의 기사 시스템은 대륙 최고라고."
아무래도 이번 단계는 진의 훈련 중 역대급으로 험난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