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화
부릉~
홍예림네 가족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예림이의 엄마 최미영 여사가 딸에게 말했다.
"아주 건실하고 좋아 보이더라 얘, 네가 말한 대로 딱 그런 사람이야!"
"그렇지? 우리 오빠가 진짜 보통 대학생이 아니라니까?"
"그니까 말이야. 그런데, 영원 학생 나이가 얼마라고 그랬지?"
"나보다 한 살 위니까 22살이지!"
"오호……?"
홍예림이 엄마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했다.
"왜? 문제 있어?"
"아니, 문제 있는 게 아니고. 내가 느끼기엔 무슨 서른 살은 된 것처럼 성숙하더라고. 그 친구, 단순히 공부 잘하고 연구에 빠진 친구처럼은 보이지 않더라. 여보, 당신은 어땠어?"
홍예림의 아버지 홍대성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가 느끼기에도 나이에 비해 상당히 성숙해 보였어. 예림아, 대한민국에 몇 없을 친구더구나."
"그치? 히히. 내가 뭐랬어!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솔직히, 홍예림의 부모는 이영원을 만날 때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했다.
딸이 워낙 확신을 갖고 밀어붙이고, 또 투자 가치를 살펴봐도 충분히 대단한 내용이라 투자 자체를 후회한 적은 없지만, 이영원이라는 사람에 대한 의문은 있었다.
정말 예림이가 말하는 것처럼 대단한 사람인지를 말이다.
하지만 이번 만남을 통해 확실히 깨달았다.
'보통 크게 될 인물이 아니야. 22살에 이 정도면, 나중에는 대체 얼마나…….'
22살 대학생이 부모뻘 되는 사람을 앞에 앉혀놓고도 긴장하는 기색 없이 젠틀하게 미팅을 주도한다. 또 그 저명한 이철희 회장과도 협상을 승리로 이끌어 냈다.
그의 과학자로서 능력은 완전히 논외로 하고서도 엄청난 재목이 틀림없었다.
두 사람은 투자가로서 수많은 군상의 인간을 만나봤지만, 이영원이 주는 인상은 처음 느껴봤다.
물론, 이영원이 마인드 월드에서 실제 나이보다 오랜 시간을 보냈던 게 그런 인상을 만들어내는 데 한몫했을 테지만, 그걸 알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성공해도 보통 성공할 사람이 아니다……!'
오늘 두 사람은 완전히 확신을 얻었다.
이영원을 밀어주기로 결정한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고, 앞으로의 투자도 전혀 아깝지 않겠다는 것을.
"얘, 그나저나 영원 학생은 왜 너랑 안 만나겠다니? 네가 모자랄 게 뭐 있다구!"
"어머, 최 여사님? 언제는 더 천천히 고민해 보라더니? 갑자기 왜 이렇게 태도가 변하셨을까?"
"왜는 이것아! 우물쭈물하다가 놓치면 큰일이니까 그렇지! 안 그래요, 여보?"
"허허, 그야 그렇지. 하지만 그 문제는 좀 더 둘이 알아서 하게 둡시다."
"그리고 오빠가 날 안 만나겠다고 한 건 아냐~ 그냥 지금은 서로에게 중요한 시기니까 부담을 주지 않을 뿐이지!"
홍예림은 부모님에게 이영원에 대한 투자 이야기를 하면서 이영원을 좋아하고 있고 언젠가 결혼을 전제로 만나보고 싶다는 말을 했던 적 있다.
하지만 이영원이 지금 연구와 공부에 바쁘기 때문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적극적으로 고백하지 않고 있을 뿐.
그 당시, 예림이네 엄마는 신랑감을 고를 땐 더 천천히 신중하게 고민해야 한다면서 홍예림에게 너무 마음을 정해놓지 말고 다른 남자들도 배제하지 말라는 조언을 했었다.
그런데 이제 입장이 완전히 바뀐 듯했다.
"얘, 우물쭈물하지 말고. 확 들이대 알겠어?!"
"내가 알아서 할게요, 최 여사님~"
"허허, 네 엄마가 그 친구를 엄청 마음에 들어 하나 보구나."
홍예림네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자동차가 집에 안전히 도착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 * *
주말이 지나고, 아침부터 김포 시내의 대지가 지진 난 듯 울려댔다.
쿠르르르!
부르르릉-!
엄청난 규모의 중장비들이 김포 시내를 지나 평야를 향해 들어서고 있던 것이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래?"
"글쎄. 오성에서 뭔가 짓는다더구만!"
김포 지역 주민들이 엄청난 행렬의 중장비들을 보고 수군거렸다.
포크레인부터 레미콘, 흙을 실은 덤프트럼 등.
흙먼지를 일으키는 중장비들이 끝을 알 수 없는 길이로 줄지어 이동했다.
이런 상황이니, 언론사들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저기요! 저기요, 어르신!"
김포평야에 이른 여러 대의 포크레인 중 하나에 기자가 다가갔다.
"뭐슈?"
"여기 무슨 공사하는 거예요? 뭘 짓길래 이렇게 많은 중장비가 동원된 겁니까?!"
그러자 포크레인 기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우째 압니까?! 나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지!"
시끄러운 중장비 소리에 서로 싸우듯 목소리를 키우며 질의문답이 진행된다.
하지만 인터뷰거리는 하나도 건질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 동원된 중장비 기사들 모두 자기가 하는 지엽적인 일들만 배정받았을 뿐, 전체적인 그림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땅을 고르고, 기초를 놓고, 길을 닦는 작업에만 투여되었을 뿐, 이게 무슨 공사인지는 모른다.
"아무튼, 무슨 공장 짓는가벼! 바쁜께 이만 가보쇼!"
"예예, 어르신! 수고하세요!"
기자들은 누구에게서도 제대로 된 정보를 들을 수 없었다.
그저 오성그룹에서 고용되어 왔으며, 할당된 일을 하러 왔다는 말만 되풀이되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이게……?"
공사에 투입된 기술자들의 수와 터를 다지는 규모를 보니 웬만한 보통 공장은 아닌 듯했다.
게다가 무려 오성그룹이 하는 일이다.
역시 현장에 오성그룹에서 왔다는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물론 그들 역시 개별적인 지시만 받았을 뿐, 전체적인 내용은 몰랐지만.
이 미스테리한 공사에 대한 보도는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오성그룹, 김포평야에 대규모 공장 설립 중. 목적은?>
<베일에 싸인 공사. 설마 땅 투기 목적인가?>
<온갖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오성그룹은 묵묵부답.>
오성그룹은 이 공사에 대해 엄청난 질문을 받았고 답변을 강제 받았다.
그래서 결국 내놓은 답변은.
-1급 대외비입니다.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의혹을 주장하든, 오성그룹은 모든 의혹을 단칼에 일축해 버렸고, 더 이상 답변도 하지 않겠음을 명백히 밝혔다.
한편, 이런 상황을 멀리서 지켜보는 한 사람.
"으음, 정말 대단해. 이것이 오성그룹의 추진력이구나."
이영원은 김포 연구실 바로 옆에서 진행되는 공사 현장을 옥상에서 지켜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조감도.
그것이 바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공장의 실체였다.
'보안에 모든 주력을 쏟았다 해도 틀리지 않지.'
이철희 회장은 이영원의 요구를 전부 수용해 주었다.
그리고 엄청난 추진력으로 공사를 시작해 버렸다.
이영원이 접근하기 편한 김포 연구실 바로 옆 대지를 확보하고, 공사 허가를 받고, 일이 진행되기까지 단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과연, 오성그룹의 이름은 허명이 아니었다.
모든 공사는 이영원이 친히 구상하고 제작한 조감도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절대 외부에서 관찰할 수 없게 옆 창문은 완전히 없앴고, 돔 형태 천장을 통해 빛을 받는다.'
돔 천장은 자동차 선루프처럼 선팅된 강화 유리로 덮여 있고, 원하면 여닫을 수 있게 처리했다.
또한 모든 공장 동을 외부 출입 없이 오갈 수 있도록 전용 통로를 만들고, 이영원이 있는 연구실 지하에서 바로 통할 수 있도록 지하 통로까지 만들도록 했다.
외부에서 보면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고, 누가 일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구조의 공장이 탄생하는 것이다.
'어차피 나 아니면 일할 사람이 필요하지도 않고 말이지.'
이영원은 공장이 완성되는 동안 마인드 월드에서 한 가지 발명품을 더 만들고 있었다.
아니, 발명품이라기보단 복제품이라는 말이 더 맞겠다.
아직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지만, 마인드 월드에 존재하는 무언가니까.
'골렘.'
지금껏 루이스의 공방에서 이영원을 돕고 있는 골렘들을 현실에 그대로 현출시킬 참이다.
그럼 기술 누출 걱정은 완전히 사라진다.
사람이 아닌 골렘이라 일하다 알게 된 기술의 비밀을 어디 팔아먹을 염려도 없다.
'골렘이 한두 기씩 완성되기 시작하면 배터리 양산도 금방이다.'
그때부턴 엄청난 속도로 공장이 돌아갈 것이다.
골렘은 낮이든 밤이든, 마나만 공급해 주면 쉬지 않고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배신이나 실수할 걱정도 없이!
공장이 완성되려면 최소 몇 달은 걸린다.
그때까지 골렘 현출을 완료할 생각이다.
골렘을 만드는 일이 상당히 복잡하고 어렵긴 하지만, 루이스가 개발할 때 만들었던 골렘 설계도를 보고, 역순으로 분해 조립을 반복하다 보면 분명 현실에 출현시키는 것도 가능해지리라.
이영원은 모든 게 완료된 그 순간을 상상하며 미소를 지었다.
'아마 내년 초면 완성될 거다.'
그때, 정식으로 <01 인더스트리>가 세상에 제품을 공개한다.
세상은 놀랄 것이고, 변화를 준비하게 될 것이다.
* * *
이예원은 마법 서적을 두루 탐독했다.
저쪽 세계로 치면 아직 1서클 생도 수준도 안 되는 형편.
이 시기엔 자기 전문 계열을 찾을 것 없이, 두루 다식하는 게 맞다.
이예원은 이 모든 게 재미있었다.
새로운 세계의 지식을 알아가는 것이 이렇게 색다른 기분을 느끼게 해줄 줄이야.
2학년 2학기 중간고사가 앞에 다가오고 있지만, 여기 루이스의 대도서관에서 마법 서적을 보는 게 즐거워 시험의 압박감도 잊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준비를 소홀히 하진 않았다.
시간이 늘어나고 오빠의 마법으로 공부 효율이 극도로 올라가 이미 차고 넘치도록 준비가 되었다.
언제 시험을 치른대도 자신 있다.
'우와… 이런 것도 있구나.'
졸음도 오지 않고 음식을 먹을 필요도 없는 마인드 월드.
거기서 책에 빠져 이예원은 빠져나올 생각을 안 했다.
한편, 그런 이예원 근처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
"흐음… 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녀석은 메이지급 이상의 재능을 갖고 있어. 어느 계열을 파든 엄청난 인간이 되겠지만, 재능에 맞는 걸 고르면 시니어 메이지급에도 도달할 거다."
저쪽 세계에서 메이지란, 7서클에 이른 마법사를 지칭한다.
시니어 메이지는 그보다 하나 위인 8서클.
9서클, 즉 아크 메이지 내지 세이지(현자)라 불리는 초특급 재능까진 아니지만 어느 마탑을 가든 중역을 맡을 수 있고, 소국의 최고 마법사가 될 수도 있는 재능이다.
이영원은 그래서 더욱 신중했다.
'적당한 재능이면 그냥 편히 내버려 두겠는데… 너무 지나치게 대단하니, 이거야 원.'
여동생이 마법을 제대로 배우면 혼자 이 세계를 뒤집어놓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그리고 여동생이 훗날 자신처럼 힘을 가진 자의 의무감 같은 것이라도 깨우치는 날엔, 굉장히 위험하고 고독한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길 원치는 않는데…….'
친오빠로서 어떻게 뭘 해줄 수 있을까?
하지만 이미 발은 들였다.
괜히 여기서 억압하거나 배제시키는 건 오히려 예원이의 욕구를 더 키울 계기만 될 것이다.
저렇게 마법서 보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니 말이다.
"고민하지 마. 재능은 억압하는 게 아니라, 선용하도록 방향을 잡아주는 게 중요할 따름이다."
"……."
이영원은 진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이미 이렇게 된 이상 별수 없어. 내가 끝까지 예원이 옆에서 도와주는 수밖에.'
"마법서도 두루 익히고 있고, 마나 감응 훈련도 게을리하지 않으니 금세 경지가 오를 거다. 그때를 위해 전문 계열을 미리 결정하는 게 좋아."
진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머잖은 나중을 위해서다.
마법에는 스펠트리라는 게 있다.
최하급 마법이야 어느 계열 마법을 익히든 상관없지만, 나중에 중급 마법만 돼도 어느 한 성향의 마법을 익히면 반대 성향의 마법 체결 능력이 자연적으로 퇴화된다.
즉, 엘리멘탈 계열 재능러가 아닌 한 강력한 불 마법과 동시에 강력한 물 마법을 쓰는 건 어렵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어둠 마법을 익히면 반드시 신성 마법은 불가능해지고.
그래서 어떤 마법을 익히는지는 중요한 문제이다.
특히 성장이 빠른 재능러일수록 빨리 전문 계열을 정하고 그쪽으로 스펠트리를 쌓아가는 게 좋다. 그렇지 않고 아무 마법에나 손을 댔다간 재능이 막혀 이도 저도 아닌 잡캐가 되는 것이다.
"흐음……."
"일단 저 녀석이 좋아하는 걸 물어봐라. 개인이 희망하는 계열이 재능과 일치할 확률도 높으니까."
"알겠어. 그럼 어떤 게 있는지부터 알려줘."
"전에 너한테 얘기하긴 했다만, 강력한 범위 공격에 특화된 워록 계열이 있고, 신성력을 다루는 치유 계열, 저주나 연금술에 능한 위치 계열, 또 인챈터 계열, 엘리멘탈 계열 등이 있지. 물론 어느 계열이든 재능에 따라 한계가 달라지는 건 똑같고."
"……."
이영원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역시 혼자 생각해 봐야 답은 없다.
자기가 아무리 친오빠라고 해도 결국 이예원의 인생은 이예원이 결정해야 한다.
이영원은 책에 빠져 있는 이예원에게 직접 물어볼 생각으로 다가갔다.
한편, 이예원은 책을 보다가 이미 이영원과 진의 대화를 엿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진이 얘기한 전문 계열 중 한 가지 단어에 꽂혀 있었다.
'위치(Witch)……? 위치라면, 마녀를 뜻하는 거 아닌가?'
이예원은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마녀가 된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그 모습은 자기가 어릴 때 봤던 어떤 만화의 장면과 매우 닮아 있었다.
귀여운 꼬마 마녀가 목에 빨간 리본을 달고, 말하는 검은 고양이와 함께 빗자루를 타고 밤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장면.
'내, 내가 정말 그렇게 될 수 있단 말이야?'
갑자기 이예원의 얼굴이 발그레해진다.
그리고 입가엔 은은한 미소가 띠었다.
벌써 반쯤 결심이 선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