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형 대마법사-138화 (138/318)

제138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또 정신 놓고 몰입하다 보니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어느덧 과제는 1-32에 이르렀다.

이제 회로의 소자를 구현하는 문제를 떠나 회로 자체를 설계하는 문제였다.

[연습 1-32. 위 설계를 1/4 크기로 줄여보세요.]

내 눈앞엔 세계지도만 한 복잡한 회로가 나타나 있다.

이걸 핑거 스윕 서킷을 이용해 수정하고 수정해서 1/4 크기로 만들어야 하는 과제이다.

'당연히 제대로 기능해야 하고.'

그런데 이 과제는 일단 두고 나가야 할 듯했다.

오늘은 특별히 주창호 교수님과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내 마인드 월드에서 벗어났다.

덜컥-

그리고 차 문을 열고 나온다. 바깥 가을 바람이 무척 시원했다.

나는 오전 수업을 마치고 교수님을 만나기로 한 4시까지 주차장 차 안에서 마인드 월드로 과제를 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 중간고사로 도서관에 있는 동안, 난 나만의 공부를 했다.

"흐음."

시각은 3시 58분.

딱 맞춰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그나저나 대운동장 쪽이 시끌시끌하네."

모르긴 몰라도 삼강대회라는 게 생각보다 큰 행사였던 모양이다.

엠프를 통해 울려 퍼지는 응원가들과 사람들의 함성 소리.

대한대 재학생들뿐만 아니라 타 학교 학생들까지 와 있으니 소란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 번 보러 가볼 걸 그랬나?'

어쨌든 이 행사도 대학생활의 일부인데, 너무 공부와 연구에만 매달렸던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벌써 4시가 되었으니까.

'이크, 이러다 늦겠군.'

생각을 털어버리고 곧장 주창호 교수님 사무실로 향했다.

똑똑. 끼익.

"오, 왔군. 영원 학생."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주창호 교수님이 책상에서 일어나 날 맞이해 주셨다.

"이쪽으로."

지난번 공모전 참가를 권유받을 때 앉았던 자리로 날 안내해 주신다.

"어때, 학과 생활은 할 만한가?"

"아무렴요. 너무 행복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이군. 요즘 1학년들뿐만 아니라 타 학년들도 학과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아 교수로서 기분이 좋네. 이게 다 자네 덕이야."

"에이, 설마요. 다 교수님들의 노고 덕분이지요!"

내 말에 주창호 교수님이 허허 웃으신다.

교수님과 나는 서로에게 공을 돌리며 분위기를 달구었다.

실제로 요즘 물리학과 분위기는 최고로 좋다.

다들 자부심이 생기니 공부도 열심히 하는 듯하고 말이다.

"동기들에게 자네 이야기는 자주 전해 듣고 있네. 모두 자네를 많이 의지하는 것 같더군."

"그렇다던가요? 그 녀석들, 사람 부끄럽게."

"그래서 말인데, 요즘 자네가 강의만 듣고 금방 사라져서 다들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더군. 혹시… 자네 진로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동기 녀석들이 내 이야기를 교수님께 했던 모양이다.

교수님이 왜 날 만나자고 하시나 궁금했는데, 아마 이 이유 때문인가 보다. 내가 혹시 물리학과 외 다른 생각을 하고 있진 않은지 궁금하신 것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 내가 물리학과에서 없어질 경우 기껏 좋아진 분위기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까 염려스럽기도 하신 모양이다.

"교수님. 전 물리학과밖에 없습니다.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아요. 반드시 졸업까지 할 생각입니다."

그렇다.

내가 회사를 차리고 혁신 제품을 세상에 내놓을 계획을 했지만, 전공은 여전히 물리학과를 할 생각이다.

누군가는 제품 개발을 위해 공학 쪽으로 전과를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모든 공학의 근본은 물리다.

'응용학문은 독학하면 돼.'

사실 난 이미 물리나 공학적 지식도 대학 수준을 벗어나 있다. 내 입장에서 굳이 다른 전공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느 학과를 가든 내 수준을 넘는 수업을 듣긴 힘들 테니까.

의중을 캐치한 대답에 교수님의 얼굴이 살짝 편다.

"그런가? 그렇다면 대학원까지 가보겠나?"

능청스럽게 말씀하시지만 순간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다른 선배들한테 저런 얘기를 듣는 것과 교수님에게 듣는 건 질적으로 다른 압박감을 주었다.

인생의 최대 실수라고 농담조로 말씀하시는 대학원생 선배님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다 보면 절로 오금이 저릴 때가 있다.

마인드 월드도 없는 입장에서 어떻게 저렇게까지 할 수 있는지 혀가 내둘러질 정도.

"하, 하핫. 그건 천천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하. 농담이야. 1학년에게 벌써 대학원을 고민하라기엔 이르겠지. 한데, 수업을 마치고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는 건가? 혹시 실례라면 대답하지 않아도 되네."

"예. 그게, 사실. 제가 회사를 차렸습니다."

"회사?"

"예. 학교와 병행하며 회사 운영을 준비하고 있어요."

내가 전고체배터리를 개발한 사실과 별개로, 01인더스트리를 설립한 사실은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다.

회사들 사이에서나 일부 알고 있을까?

그러니 교수님은 지금 이 자리에서 내 얘기로 처음 그 사실을 알게 되신 것이다.

"그렇군. 자네의 전고체배터리를 직접 만들 생각인가 보구만."

"예, 맞습니다."

주창호 교수님이 흐뭇하게 웃으셨다.

이에 나도 씩 웃어 보였다.

"자네 같은 학생을 가르칠 수 있다니, 이거 한없는 영광이네."

"아이고, 교수님. 너무 비행기 태우지 마십시오. 교수님이 안 계셨으면 제가 어찌 그걸 만들 생각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허허."

주창호 교수님은 공모전 실시간 방송을 보셨기에 내가 전고체배터리 개발한 사실을 믿고 계신다.

또한 굉장히 놀라워하셨었고.

"자네는 이미 청출어람한 거야. 그래, 이제 오히려 내가 자네에게 배움을 청해야 하겠지."

"아이고, 교수님! 너무 과한 칭찬입니다."

나는 강하게 손사래를 치며 교수님을 뜯어말렸다.

"아니야. 진심일세. 내 일생에 자네 같은 제자를 둔 건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야. 아마 모든 교수가 나와 같길 바랄걸?"

"……."

"열심히 해주고, 보람이 되어주어 고맙네. 혹시라도 이 학교 생활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주게.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전적으로 도와주겠네."

주창호 교수님의 눈은 진심이었다.

교수님이 전고체배터리의 가치를 모르실 리 없다.

그리고 그걸 1학년인 내가 해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도 아시는 분이다.

그러니 이 정도로 치하해 주시는 것이리라.

"감사합니다. 교수님.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나는 교수님만큼 진심을 담아 감사와 경의를 보냈다.

교수님은 사람 좋은 미소를 보여주셨다.

이후 교수님은 내가 회사 운영과 학교 생활을 잘 병행할 수 있도록 편의까지 제공하겠다고 약속해 주셨다.

다른 교수님들에게도 역시 그렇게 대신 부탁해 주시겠다고까지 해주셨다.

아무래도 내가 천부적인 재능은 떨어져도, 인복은 좀 타고난 모양이다.

*     *      *

"골! 골입니다!"

"와아아아아!"

터질 듯한 함성과 동시에 성학대의 응원가가 크게 울려 퍼진다.

농구 경기 이후, 이제 축구로 넘어왔다.

"으으! 올해도 성학대의 독식이냐?!"

"말이 안 되지! 힘내라, 민국!"

농구 경기는 1위 성학대, 2위 민국대, 3위 대한대로 종료되었고, 축구 경기도 거의 말미에 다다랐다.

축구 1, 2차 경기에서 대한대는 민국대, 성학대 상대로 연패했고, 3차전에서 민국대 성학대가 만나 우승을 경쟁 중이다.

"민국! 민국!"

"성학! 성학!"

스코어 3 : 2 상황에서 두 진영의 응원전은 더욱 가열되었다.

반면, 대한대 응원단은 조용히 침묵 중이었다.

이미 패배가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크흡. 우린 언제 빛 보냐!"

"에이, 몰라~ 그리고 우리가 언제 승리 보고 삼강대회 했냐? 그냥 이따 기차놀이 때 우리 응원가나 조지게 부르자!"

"그래! 그건 우리도 안 지지!"

홈경기에서조차 들러리로 전락한 대한대지만, 경기 이후에는 아니다.

삼강대회의 백미는 경기 이후!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모두 모여 서로의 응원가를 부르며 엄청난 행렬을 이루어 대학로를 가득 메운다.

경기는 참패를 맞아 기가 죽었어도, 그땐 다시 부활할 것을 결심했다.

한편,

"와아아아!"

경기는 3 : 3.

시간을 20분 남겨놓고 경기는 결과를 예측할 수 없게 흘러갔다.

"와, 오지네. 발이 근질거린다. 용호야. 우린 언제쯤 뛸 수 있을까."

"글쎄. 아마 오늘은 아니지 싶다. 중요한 순간에 우리가 낄 순 없을걸."

성학대 후보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참석한 박종석과 심용호.

둘은 팽팽한 접전을 보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근데 그 형은 축구에도 안 나오네. 그때 축구 하는 거 보고 당연히 축구부일 줄 알았는데."

"……."

"큭큭. 그때 정환이 당황한 얼굴 장관이었는데!"

박종석은 대한대 체육대회 때 물리학과와 의예과 경기를 지켜보다 오정환이 탈탈 털린 모습을 보고 크게 웃어젖혔었다. 그 모습이 아직도 생각나 웃긴 모양이다.

한데, 심용호는 같이 웃지 않고 조용했다.

심용호는 차라리 축구 경기에 이영원이 안 나온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후보인데, 그 자식이 주전으로 뛰었으면 짜증 났을 테니까.'

심용호는 재수학원에서 이영원에게 당한 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편두통이 지끈지끈 올라온다.

뭐, 딱히 이영원이 자신에게 큰 피해를 준 건 없지만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으니까.

'그래. 오늘이 아니어도 돼. 하지만 다음엔…….'

체육대회 땐 그냥 돌아갔지만 오늘은 만나서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곧 있으면 완성된다. 내 계획이.'

1년간 쥐 죽은 듯 살며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과 관련해서 이영원에게 경고를 하려고 했다.

'난 한 번 물면 안 놓는다고.'

곧 온다.

지금까지 숨죽이며 살아온 인생을 모두 청산하고 자신의 진가를 드러낼 순간이.

그땐 이영원에게도 반드시 되갚음 해주리라.

부글부글.

그랬다.

아직도 심용호는 정신을 못 차렸다.

*     *      *

잠시 후.

축구 경기는 3 : 4로 성학대가 최종 승리를 가져갔다.

지난해에 이어 농구와 축구에서 모두 승리한 쪽은 성학대.

이어 대회를 마무리하는 행사가 이어졌다.

트로피를 차지한 성학대 선수들과 학생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방방 뛰며 승리를 자축했다.

하지만, 경기는 끝났어도 진짜 대회는 이제부터다.

짝짝짝! 짝짝짝! 짜자자작!

"민국!"

"거친 초원으로 달려 나가자!"

"으쌰라~ 즛쌰~!"

"젊음의 보리차를 마시자~!"

"으쌰라~ 읏쌰~!"

서로의 어깨를 잡은 수십 명의 무리가 고성을 지르며 목이 닳도록 응원가를 부른다.

그런데 그들만 그러는 게 아니다.

"헤이! Yo! 뜨거운 태양과~!"

"헤이! Yo! 폭풍을 지나~!"

"헤이! Yo! 우리가 왔다!"

"헤이! Yo! 성학이 뜬다!"

다른 수십 명의 무리가 똑같이 서로의 어깨를 잡고 응원가를 부른다.

그 소리들 때문에 캠퍼스는 그야말로 아비규환.

"질 수 없지! 우리도 시작해!"

우다다다!

응원가를 시작한 민국대 성학대 학생들을 본 대한대 학생들도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서로 아는 사람이냐고?

아니다. 그냥 모르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시작하는 것이다.

그럼 누구든 붙어서 한목소리를 낸다.

"대한! 대한! 대하안! 우리가 최고다!"

"대한! 대한! 대하안! 우리가 앞선다!"

한 명의 선창에 다수의 군중이 후창하는 기이한 광경.

마치 2002 한일 월드컵 응원 당시를 생각나게 하는 광기에 가까운 응원전이었다.

삼강대회가 아니면 절대 볼 수 없는 모습.

세 학교 학생들은 그렇게 서로의 어깨를 붙잡고 고성을 지르며 행진을 시작했다. 캠퍼스부터 학교 앞 대학로까지 그렇게 누구의 목소리가 큰가 대결하며 기차놀이가 시작되었다.

대한대 캠퍼스는 열광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었다.

한편, 학교가 소란해질 즈음 교수님과 이야기를 마치고 나온 이영원은 입을 쩍 벌렸다.

"이, 이게 삼강대회?!"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의 광기에 이영원은 발걸음이 주춤거릴 지경이었다. 그냥 단순히 농구, 축구로 대결하는 친교의 장인 줄 알았는데.

그때,

"이영원이다!"

"영원이 형!"

"오빠아아!"

대한대 기차놀이 행렬에 껴 있던 동기들이 이영원을 발견했다.

그러곤 한달음에 우르르 몰려와 이영원을 그대로 번쩍 들어 올리더니, 행렬 한가운데 끼워 넣었다.

"으, 으아아아! 이게 대체 뭐 하는 거야!"

"형이야말로 뭐 하는 거야! 얼른 안 오고!"

광기의 도가니.

이영원은 진정한 대학 생활을 맛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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