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7화
이영원은 좋다고 01물리학연구소에 대해 설명했다.
01인더스트리 산하기관이 될 것이며, 거길 통해 후학을 양성하고 회사에 필요한 인재를 선발하기도 할 거라면서.
"연구원이 된다고 해서 꼭 내 회사에 들어와야 한다는 부담은 가질 필요 없어. 그러니 너희 부모님께서도 흔쾌히 허락해 주실지도 몰라."
연구소에 들어온다는 게 꼭 회사 직원이 된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는 걸 굳이 강조하는 이유는 유다인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제 갓 수능을 치른 아이고, 유성그룹 후계 문제로 부모님과 갈등을 겪을지 모른다.
그러니 자기 회사에 곧장 몸담을 필욘 없고 일단 한 발만 걸쳐보라는 의미의 제안이었다.
'천천히. 서두를 거 없지. 암.'
이영원은 자신의 인단 중 반드시 잡고 싶은 사람으로 유다인을 점찍어뒀다.
자신과 정반대인 천재에, 과학자가 꿈인 녀석.
심지어 창창한 미래를 가진 갓 20살인데다 그동안 과외로 신뢰 관계까지 쌓아뒀다.
이영원의 입장에서 최고의 인재인 셈.
이영원은 유다인의 대답을 천천히 기다렸다.
그런데, 유다인의 표정이 묘했다.
'내, 내가 무슨 착각을……!'
갑자기 선생님이 자길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상상을 해버렸다. 그래서 유다인은 괜스레 부끄러워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두 손바닥을 양 볼에 갖다 대며 열기를 식힌다.
창피해서 당장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선생님과 더 오래 함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야.'
과외가 끝나면 이제 무슨 연고로 이영원을 만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내년 3월이 되면 선후배로 만나게 되기야 하겠지만, 그것만으론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곧바로 좋은 기회가 다시 주어졌다.
한편, 유다인의 생각을 모르는 이영원은 그녀가 너무 당황해서 얼굴을 가린 줄 알았다.
"미, 미안. 그렇게 난감한 요청일 줄은 몰랐어. 그럼 생각해 볼 시간을……."
그렇게 유다인을 진정시켜 보려는데,
"좋아요! 꼭 들어가고 싶어요!"
"응?"
손바닥으로 가렸던 얼굴을 들고 활짝 웃는 유다인.
눈도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다.
"언제부터 들어갈 수 있죠? 혹시 저도 숙식 제공을 받으며 지낼 수 있을까요?"
"어, 어라……."
이내 두 손을 꼭 모으고 이것저것 묻기 시작하는 유다인.
이영원은 살짝 당황스러웠다.
'이, 이렇게 바로?'
유다인에게 부담을 주진 않을까 걱정했던 자신에게 무안해질 지경.
"저기, 다인아. 그렇게 바로 결정해도 괜찮아? 너희 부모님과 상의도 해야 할 테고……."
"부모님은 걱정 마세요. 반드시 설득하고 말겠어요. 저는 꼭 영원 선생님의 회사, 아니, 연구소에 들어가고 싶어요!"
유다인의 결심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지난번 부모님과 식사 자리에서 했던 폭탄 발언은 여전히 유효했던 것.
당시 식사 자리는 애매한 분위기로 급히 종료되는 바람에 유다인이 나중에 꾸중을 들었을 거라 예상했던 터였다.
'그, 그게 아닌가? 아니면… 이 녀석.'
설마 부모님 말씀을 잘 안 듣는 타입?
살짝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이 되었다.
'유성그룹과는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가져가야 하는데…….'
혹시라도 유다인이 부모님 말을 안 듣고 자신의 연구소에 들어오게 되고, 그 문제로 유성그룹과의 관계가 악화되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였다.
이미 투자 계약까지 체결한 상태이니 말이다.
"저기. 다인아. 그래도 부모님께는 말씀드려 봐. 아직 생각할 시간은 충분하니까. 너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아도 돼. 하하……."
"네, 선생님. 오늘 바로 말씀드리겠어요. 말씀드린 뒤에 곧장 연락드릴게요!"
적극적인 유다인의 모습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 당황스러운 이영원은 멋쩍게 웃으며 뒷머리만 긁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들어가자. 너무 늦겠다."
"선생님. 오늘 즐거웠어요."
"그래. 나도 정말 즐거웠어."
이제 수능을 마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려는 제자와, 처음 제자를 사회에 내보내게 된 스승은 둘만의 즐거운 뒤풀이를 마치고 각자 집으로 흩어졌다.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이제 완연한 겨울. 11월의 막바지에 다다랐다.
그동안 세상은 할로윈데이로 떠들썩하고, 수능으로 떠들썩했고, 이제 연말 분위기를 내며 들뜨고 있었다.
"그럼, 시작해라."
"응."
그러나 이영원, 이예원 두 남매의 일상은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학교, 집을 반복하며 마인드 월드에서 각자의 일을 할 뿐. 세상 분위기 간데없는 이 무미건조한 공간에서 말이다.
헤드기어를 착용한 이예원이 진의 말에 두 눈을 감고 마나에 집중했다.
화아아-
그러자 반경 10m 공간이 일순 블러 처리된 듯 뿌예지기 시작했다.
"호오."
짙은 밀도의 마나 때문에 코앞에 있는 이예원의 모습이 관찰되지 않을 정도.
헤드기어로 말미암은 효과지만, 이것이 말하는 의미는 하나였다.
"후우……."
이예원이 뱉은 날숨에 공간이 풀어지며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진이 말했다.
"제법이구나."
"어땠어?"
"클리어다."
이내 이예원의 표정이 밝아졌다.
진이 제시했던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이제 마법을 익힐 수 있다……!'
반경 10m의 마나를 100% 통제할 것.
이 과제를 완수하면 그 뒤 마법을 익할 수 있도록 지도해 준다고 했다.
이예원은 스펠트리의 중요성에 대해 이미 배웠기 때문에 섣불리 마법을 익히지 않고 인내했다.
'아무 마법이나 익혔다간 어중이떠중이가 된다고 했으니까.'
마법 간 상성을 고려하지 않고 익혔다간 한계를 금방 맞이할 수 있고, 충분한 마나 통제력을 갖지 못한 채 마법을 익히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이제 나올 이유 때문이다.
"그럼, 네 서클의 '슬롯'을 확인해 보도록 하지."
서클의 역할 중 하나는 마법식을 기억하는 것이다.
서클에 기억된 마법식은 영구히 마법사의 마법이 된다. 그러나 서클에 기억되지 못한 마법은 아무리 마법사가 마법식에 능통하다 해도 마법을 체결하는 게 불가능하다.
마법 아티팩트나 스크롤 같은 도구로 여러 가지 마법을 부릴 수 있는 방법도 존재하긴 하지만, 그 외 서클을 통하지 않은 채 마법식에 마나를 대입해 마법을 체결하는 방법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똑같이 서클 1개를 연성한 마법사라 해도 서클의 크기에 따라 익힐 수 있는 마법의 한계가 달라진다. 아쉽게도, 그 서클의 크기는 순전히 타고나는 것이고.
진은 각오에 찬 이예원의 얼굴을 보고 씩 웃었다.
충분한 마나 훈련이 되어야 현재 갖고 있는 서클의 한계점까지 마법을 기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철저한 마나 훈련이야말로 서클을 최적화시키고 슬롯이라 불리는 마법의 한계치를 늘릴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예원은 일단 진의 첫 번째 기준점은 통과했다.
"너무 긴장할 거 없다. 그럼."
따악!
진의 손가락이 튕기자 사방에 마법서들이 번쩍 나타나 공중에서 이예원을 배회했다.
그것들에는 무슨 마법인지 나타내는 제목과 함께, 그 아래 별 하나부터 별 일곱까지 다양한 표기가 되어 있었다.
"이, 이건……!"
"너에게 맞는 위치 전용 1서클 마법들을 전부 가져온 것이다. 천천히 보고 골라봐라. 알겠지만, 별이 많을수록 고등 마법이다."
"…전부 다 고등 마법으로 고르면 좋은 거야?"
"꼭 그렇지만은 않아. 고등 마법일수록 서클의 기억 부분을 많이 차지하기 때문이지."
"……."
"그리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히든 스펠트리도 있어. 나중을 생각하면 꼭 고등 마법만 좋다고 단정할 순 없다."
하급 버프 마법 셋을 갖고 마인드 월드로 이어지는 히든 스펠트리를 발견한 루이스처럼 말이다.
이예원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사방에 엄청 다양한 마법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미 이예원이 루이스의 대도서관에서 한 번쯤 봤던 것들이었다.
텁. 텁.
이예원은 천천히, 그러나 망설임 없이 고른다.
그 모습을 본 진은 의미 모를 미소만을 지었다.
이예원이 고른 마법서는 우선 총 다섯 개.
<마스커레이드(masquerade), ★★★☆☆☆☆>
<위스퍼링 메신져(whispering messenger), ★★★☆☆☆☆>
<커스 앤 버프(curse and buff), ★★★★★☆☆>
<블러디 힐(bloody heal), ★★★★★☆☆>
<블러디 컨트렉트(bloody contract), ★★★★★★★>
"……."
"더 안 고를 거냐?"
"일단 이거만. 어차피 서클 용량은 남아도 되는 거잖아. 아직 이것도 다 될지 안 될지도 모르고."
진은 씩 웃었다.
'그래. 그거다. 나중을 위해 '혹시'라는 여지를 남겨두는 신중함과 준비성. 그것이야말로 마법사의 진짜 자질이지.'
이어 이예원이 고른 다섯 가지 마법서를 본 진이 물었다.
"이걸 고른 이유는?"
그러자 이예원이 말했다.
"그냥. 좋아 보여서."
다 생각이 있는 듯했지만, 의뭉을 떠는 이예원을 두고 진은 다시 한번 웃었다.
"후후. 잘 배웠구나. 그래. 용도는 알릴 필요가 없지. 그게 스승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좋은 자세다. 특히 위치라면 마땅히 그래야지."
이내 고른 이유에 관심을 끊은 진은 마법서를 통해 마법을 익히는 방법에 대해 말했다.
"우선, 이 마법서의 내용을 확실히 이해해야 하고, 그다음 마법식을 서클에 각인시키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하지만 이예원은 거기서부터 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마법을 익히는 방법은 이미 대도서관에서 학습한 터였다.
이예원은 오직 한 가지 생각에 닿아 있었다.
'드디어……! 나도 마녀가 되는 거야!'
꿈꿔왔던 로망이 이루어지는 순간.
소녀는 소리 없이 쾌재를 불렀다.
* * *
유다인의 부모는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가장 근심스러운 문제 때문이었다.
-영원 선생님의 물리학연구소에 들어갈래요. 허락해 주세요.
유성그룹 후계 받는 걸 관두고 이영원의 회사에 들어가겠다고 한 폭탄 발언의 충격이 아직 가시기도 전, 딸은 또 한 번 쐐기를 박았다.
유성 회장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며 딸을 만류했다.
'아무리 딸의 자유를 존중한다지만, 후계를 포기한다는 건…….'
물리학연구소에 들어가서 이영원의 회사로 이어지는 건 안 봐도 뻔한 수순이었다. 그럼 딸은 진짜로 후계 문제를 등한시하게 될 것이다.
"여보……."
근심에 찬 유성의 손을 꼭 잡는 아내.
아내의 얼굴은 딸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혹시라도 다인이가 또 집에만 갇힐까 봐 두려워요. 그냥 아이가 하고 싶다는 대로 해 줘요."
"……."
그러고 싶은 마음이야 유성이라고 다를까?
단지 사안의 중대성이 클 따름이다.
"다인이가 일탈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자기가 하고 싶은 게 있다는 거니까. 또, 마침 이영원 선생님이라면 믿을 수 있잖아요. 다인이에게도 좋은 기회일 거예요."
"당신……."
이내 유성은 아내의 손을 꼬옥 잡았다.
눈물에 촉촉히 젖은 아내의 눈.
영락 없는 한 아이를 낳은 엄마의 눈이었다.
오직 아이의 행복을 위하는 눈.
아내의 눈빛에 유성은 결심했다.
"그래요. 당신도 뜻이 그러하다면 그렇게 합시다."
이내 유성이 유다인의 방으로 갔다.
똑똑.
"다인아. 잠깐 이야기하자꾸나. 밖으로 나오거라."
스륵-
이내 문을 슬며시 열고 나오는 유다인.
유다인은 지난 토요일 이영원과 영화를 보고 곧장 집에 와서 아빠 엄마에게 물리학연구소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바로 돌아온 부모님의 반대에 실망해서 풀이 죽어 있던 참.
유다인은 아빠의 부름에 조용히 아빠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아빠 엄마의 맞은편 자리에 가서 고이 앉았다.
이내 유성 회장이 말했다.
"다인아. 네가 하고 싶은 걸 하거라. 이 아빠랑 엄마는 네가 원하는 건 뭐든 지지해 주마."
"아, 아빠… 엄마……!"
이내 확 밝아지는 유다인의 표정.
유다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와락!
그리고 아빠 엄마에게 왈칵 안겨 버렸다.
"허허, 이 녀석이……."
"흐흑… 다인아."
엄마는 글썽이던 눈물을 뚝 흘렸다.
유다인이 말했다.
"…저, 아빠 엄마 걱정하지 않게 열심히 할게요. 사랑해요."
유성은 흐뭇한 얼굴로 딸의 등을 쓸어주었다.
'그래… 네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회사가 걱정이긴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딸이 후계를 안 받으면 다른 전문 경영인을 고용하면 되는걸!
세 식구는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 깨지지 않음에 기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