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4화
그러나 지금 그를 혼란스럽게 만든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알아요. 당신이 날 옆에 두고도 잠만 재우는 걸 얼마나 미안해하는지.’
‘나한테 해 줄 수 있는 게 팔베개뿐이라고 미안해하고 자책했잖아요.’
‘……뭐?’
부부라면서 여태 왜 잠만 잤다는 거지?
부인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왜 팔베개밖에 없어?
이게 대체 다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문득 그는 얼굴에서 손을 내렸다.
짐작 가는 바가 하나 있었다.
‘설마 나, 고자인가……?’
시간이 멈춘 것처럼 생각이 멎어 버렸다.
상상도 못 한 충격에 말문이 다 막혔다.
하긴 이 몸은 원래 그의 것이 아니니까 그가 모르는 사정이 있을 수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럴 수가.’
그는 혼란스러워 다시 얼굴을 쓸었다. 방 안을 배회하며 한 손에 얼굴을 묻었다.
왜 진작 그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걸까?
몸이 달라졌어도 기본적인 기능은 별다르게 느껴지지 않았기에, 설마 그럴 거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내가 고자라니, 내가…….’
아무래도 여긴 그가 세상을 구한 뒤 받은 보상이 아닌 것 같다.
이건 또 다른 어마어마한 시련이었다.
시스템 보상이라더니 돈도 없고, 집도 없고, 작위도 잃고, 이제는 그것도…….
심지어 전생에서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데!
일단 그는 침착하게 창가에 손을 올렸다.
뭔가 착오가 있을지도 모른다.
부인이 있었음에도 일반적인 관계를 나누지 못한 무슨 사연이…….
혹 영혼이 달라지기 전에는 정말 불능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여자와 할 수 없는 동성애자?
그것도 아니면 뭐지?
알렉의 기억이 없는 그로서는 도무지 진실을 알 수 없었다.
‘빌어먹을.’
이를 악문 그는 고개를 돌려 문 쪽을 확인했다.
아무도 들어올 일이 없다는 확신이 들자 슬쩍 시선을 내려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분명……?
갑작스러운 포옹에 본능적으로 반응했었던 것 같은 느낌이 있었는데…….
“…….”
숨 막히는 적막이 흘렀다.
한번 마른침을 삼키자 불거진 그의 목젖이 오르내렸다.
이내 그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생명이 느껴지는 부피감, 자아가 있을 것 같은 맥박과 살아 있는 듯 뜨거운 온도.
‘너무나 정상이잖아……?’
그의 기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내일 아침 다시 한번 확인해 봐야겠지만, 지금까지 그가 눈치채지 못한 것도 그렇고, 지금 상태를 봐도 정상인 게 분명했다.
혹시 몰라 한 번 더 자신의 건강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그 순간 아찔한 전율이 몸서리치듯 그의 전신으로 퍼졌다.
“……!”
온몸의 감각을 동시에 자극한 듯한 예민함에 알렉은 화들짝 손을 거두었다.
이건 건강하다 못해 민감함 그 자체였다.
원래 이게 이렇게나 자극에 즉각적이었던가……?
이윽고 고개를 든 그는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며 침대로 향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스스로가 순간적으로 너무도 한심했다.
그렇게 몇 걸음도 채 옮기지 않았을 때였다.
문득 위화감을 느낀 그가 굳은 듯 멈춰 섰다.
“…….”
정말이지 순간적인 포옹.
그 짧은 포옹에 그의 피가 어디로 몰렸던가.
마치 온몸의 혈액이 일제히 쏠린 것 같을 정도로 그는 위기를 느꼈다.
자신의 몸은 웬만해서 그렇게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몸은 성욕과 관련된 자극에 그리 너그럽지 않은 편이었으니까.
아무리 아름다운 이성을 봐도 끌리지 않았다. 우연한 접촉도 그에게는 모두 돌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작정하고 그를 유혹하려는 손길도 무척 따분하고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성과 사랑을 할 수 없는 몸과 영혼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본능이 고개를 쳐올리게 하는 상대를 만나지 못했을 뿐.
그런데 지금 그의 상태는 어떠한가.
이보다 쉬울 수 없을 만큼 이성의 자극에 반응했다.
믿을 수 없는 깨달음에 알렉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 *
‘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말도 꺼내지 말걸.’
허탈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알렉이 사라진 자리를 잠시 응시하던 나는 이내 현실로 돌아왔다.
아직 다 끄지 못한 촛불들이 2층 복도를 밝히고 있었다.
‘……창피해라. 괜히 이불킥하게 생겼네.’
설마 알렉이 내 말을 그렇게 단박에 거부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내가 너무 상대는 원하지도 않는 일에 과하게 나선 것 같은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남편의 의젓한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
그럼 완벽한 남편이 되어 주겠다는 말은 왜 한 걸까.
죽어서 유령 남편이라도 될 작정이 아니라면.
나는 괜히 드레스 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이혼을 하자더니 쥐약을 먹은 그의 상황을 이해해 보려고 나도 애를 쓰고 있었다.
뜻하지도 않게 그가 집을 구해 와서 다시 잘살아 볼 생각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나와 같이 잠만 자는 것도 못 하겠다니…….
이쯤 되니 자괴감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렉. 내가 싫은 걸까?’
아니면 그냥 그동안 밖에서 집을 구하느라 너무 힘들었던 걸까?
그래. 그럴 거야.
설마 날 싫어할 리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던 내 머릿속에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여태 서로 좋아한다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잖아……?’
그와 나는 서로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표현한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그가 내 남편이고 나는 그의 부인이니, 둘 다 그 의무에 충실하려고 했을 뿐이다.
그가 나를 사랑하는지, 아니 이성적인 호감이 조금이라도 있는지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만약 우리가 결혼을 하지 않은 남이었다면, 그가 내게 눈길이라도 한 번 줬을까?
‘……모르겠네.’
휴우.
내심 무거운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그럼 나는 그를 사랑하는 걸까?’
내 남편인 그가 완벽한 내 스타일이라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었지만, 이게 사랑하는 건지 확신이 들지는 않았다.
그저 그와 결혼한 이상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알렉밖에 없을 뿐이었다.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촛불을 향해 스너퍼를 든 손을 들어 올렸다.
어서 남은 초나 다 끄고 잠이나 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촛불을 끄는 기구가 불빛에 가까워졌다.
휙.
그런데 그보다 빨리 눈앞의 촛불이 꺼졌다.
……음?
내가 팔을 올리면서 바람이 너무 크게 불었나?
나는 그냥 대수롭지 않게 몇 걸음 걸으며 다음 촛불을 향해 다가갔다.
이번에도 스너퍼를 가까이 가져가 대려고 했다.
휙.
“……?”
촛불이 또 그냥 꺼져 버렸다.
지금 어디서 바람이 들어오나?
나는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바람을 느껴 보았지만, 공기의 흐름은 고요하기만 했다.
창문이 열린 곳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나는 애써 아무것도 아니겠거니 생각했다. 다음 촛불을 향해 막 한 발을 뗐다.
그 순간 그새 잊고 있었던 알렉의 말이 떠올랐다.
‘마침 저 집에 유령이 나와서 들어오는 사람들마다 줄행랑을 쳤다고 하더군요.’
오, 미친.
설마.
설마 아닐 거야…….
나는 뻣뻣해진 목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사를 온 첫날 밤부터 자동으로 촛불을 꺼 주다니, 집안일에 특화된 살림꾼 AI 유령이 아니고서야 반갑지 않았다.
당장 알렉에게 뛰어가고 싶었지만, 굳어 버린 발은 차마 무정한 남편에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어딘가에서 바람이 새어 들어왔을 거야.’
애써 그렇게 위안하며 나는 아직 켜져 있는 촛불을 향해 스너퍼를 가져갔다.
복도를 따라 아직 다섯 개 정도의 촛불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설마 이것까지 그냥 꺼져 버린다면, 정말 유령의 짓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작은 촛불이 촛농을 흘러내리며 일렁였다.
‘제발 촛불아 꺼지지 마. 내가 끄게 해 줘.’
이윽고 스너퍼가 촛불을 감싸자 불빛이 꺼졌다.
나는 참고 있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 다행이다. 역시 내 착각이었나 봐.’
남은 촛불들도 모두 끈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갔다.
겉옷을 훌렁 벗어 버리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눈을 감았다.
얼른 자자, 얼른.
그런데 왜 이리 잠이 오지 않을까.
이 집에서 처음 자는 밤.
포근한 침대는 묘하게 낯설었고, 방 안은 남의 집처럼 어색했다.
‘호텔이라고 생각해, 그냥.’
내일 일찍 일어나서 이불부터 빨아야지.
커튼도 다 뜯어내서 세탁해야겠다.
그전에 세 식구 밥을 먹여야 하니 얼마나 바쁠까.
‘자자. 어서 자야 돼…….’
그러나 머릿속에는 생각이 너무 많고, 온 사방으로 신경이 곤두섰다.
어김없이 떠오르는 거부의 목소리.
‘죄송합니다.’
‘오늘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
그 이후로도 한참이나 나는 잠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