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84화
올리비아는 살면서 그토록 납작 엎드린 적이 없었다.
‘줄리아에게 책임을 물어 단두대에 올리겠습니다. 루이제가 무사하여 천만다행입니다, 폐하.’
황제의 심기가 불편한 것만큼 그녀를 불안하게 만드는 건 없었다.
그의 기분이 나빠지면 그녀가 황제를 자신이 유리한 대로 대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줄리아를 처형하는 대신 감옥에 가두었다.
얼마 전 카슨이 갇혔던 감옥이었다.
한 번 갇히면 음식을 먹어도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지는 기이한 감옥이었다.
그곳에서는 아무리 버려도 일주일을 넘기는 사람이 없었다.
올리비아가 직접 가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기분 나쁘고 불쾌 한 한기에 치가 다 떨렸다.
줄리아도 그곳에서 카슨처럼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끔찍한 수맥이라도 흐르는 거야, 뭐야.’
그 기이한 감옥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소문이 난다고 해서 딱히 좋을 것 같지도 않았다.
황궁에 대해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가는 황제가 불쾌해할 게 분명했고, 그런 일은 막고 싶었다.
어차피 줄리아는 죽으면 그만인 목숨.
올리비아는 줄리아보다 황제의 반응이 더 신경에 거슬렸다.
어차피 죽으라고 루이제 부부를 북부로 보낸 게 아니었나?
그곳에서 알아서 살아남든 말든 신경 쓸 것도 아니면서, 왜 루이제를 죽이려 했다는 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까?
올리비아는 자신의 심증만 더 굳혔다.
악센은 그들이 죽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굽히고 숙이도록 길들이려는 게 분명했다.
이미 온 제국이 황제를 향해 엎드리고 있는데, 루이제와 알렉시스는 늘 황제가 먼저 고꾸라뜨리던 사람들이었다.
‘줄리아가 성공했었어야 했는데.’
올리비아는 테이블 아래로 손톱이 살을 짓누르도록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루이제 부부에 대한 황제의 집착은 분명 그녀에게 해가 될 것이다.
귀부인들이 계속해서 사담을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지금쯤 눈 쌓인 산을 헤매고 있지 않을까요?”
“지도도 제대로 없을 텐데 길을 헤매고 빙빙 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 추운 날씨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어요.”
“폐하의 분부대로 무사히 성을 찾아가야 할 텐데 걱정이네요. 벌써 출발한 지 이틀도 넘게 지났죠?”
“듣자 하니 마차 다섯 대에 사용인들과 짐만 신고 간 모양이에요. 용병이라도 고용해야 했던 게 아닐까요?”
“그 말이 제 말이랍니다. 사용인들을 다시 고용할 돈으로 당연히 기사나 용병들을 사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래도 크게 도움이 됐을지는 모르겠네요. 저번에 가셨던 분들도 호위를 대동하긴 했잖아요?”
“결국 그냥 다시 돌아와서 명을 거두어 달라고 애원하겠죠. 도착하면 우리를 성으로 초대할 거라고 하더니 꼴이 우스워지겠네요.”
후후훗.
귀부인들이 낮게 웃었다.
황후의 앞에서 대놓고 다른 귀부인의 험담을 하다니, 그녀를 줄리아 대신이라고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황제의 눈을 피하려고 병약하고 자애로운 흉내를 냈더니 이제는 이런 별것도 아닌 귀부인들까지 황후를 업신여기는 분위기였다.
‘그래도 줄리아가 사교계를 제대로 휘어잡아 주긴 했는데…….’
줄리아를 대신할 만한 인재가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올리비아는 자신이 직접 나서고 싶지 않았으나, 이런 상황을 계속해서 두고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만약.
정말로 루이제와 알렉시스가 황제에게 돌아와 목숨을 구걸하면, 황제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다른 거래를 제안하지 않을까?
그 거래라는 것이 무척 불길하게 느껴졌다.
이미 황제의 관심을 잃어버린 황후의 자리를 위협받을 만큼.
이윽고 올리비아는 어지러운 듯 머리를 잡으며 일어섰다.
놀란 귀부인들이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폐, 폐하!”
“나는 갑자기 머리가 아픈 것 같네요. 이만 들어가 봐야겠어요.”
“그, 그리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폐하.”
“방까지 모시겠습니다.”
귀부인들이 양쪽에서 황후를 부축했다.
힘없이 여인들에게 의지하며 황후는 속으로 생각했다.
전 브렌트 공작 부부가 만약 이번에도 또 멀쩡히 살아서 돌아오면.
분명히 황제는 또 다른 위기에 그들을 빠뜨릴 것이다.
‘황제가 원하는 걸 쥐여 줄 수는 없지.’
올리비아는 황제가 처음으로 관심을 보인 장난감을 길들이기 전에 반드시 부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아버지라면 가능한 일이었다.
* * *
“……세상에. 이 성은 지하까지 너무 근사하네요.”
루이제는 알렉에게 안긴 채 성을 구경하다가 감탄했다.
성의 지하는 마치 성전처럼 더욱 기품 있게 꾸며져 있었다.
이제 보니 윌스브룩 성으로 이어진 길에 깔린 대리석으로 전체를 장식했다.
이곳에 수백 년간 흡혈귀가 봉인되어 있었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으며 알렉은 돌아섰다.
설산에 다녀온 이후에 알렉은 루이제가 아직 가 보지 못한 성 안의 곳곳을 안내해 주고 있었다.
물론 지금 루이제는 걷기 힘든 상태였으니 줄곧 그가 안고 있었다.
“그런데 당신 나 계속 안고 있는 거 안 무거워요?”
그의 목을 두 팔로 안은 채 루이제가 물었다.
알렉은 조금 더 든든하게 고쳐 안으며 대답했다.
“무겁다고 안 안을 것도 아닙니다.”
“…….”
그의 말에 루이제는 약간 포근하게 눈가를 접었다.
알렉은 너무 가까운 거리에 있는 루이제의 얼굴을 애써 외면했다. 또 입술만 보일 것 같았다.
“오늘은 이만 방으로 데려다드리겠습니다. 아까 찬바람까지 쐬셨으니 따뜻하게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알겠어요.”
루이제가 또다시 애틋한 눈길을 보냈다.
그렇게 다시 1층으로 올라가려는데 어디선가 와장창, 소리가 크게 울렸다.
“어머나!”
그레타 부인이 손에 들고 있던 식기들을 모조리 떨어뜨렸다.
조금 늦게 그레타를 발견한 루이제가 말했다.
“어머, 그레타. 무슨 일이에요? 괜찮나요?”
그레타는 놀란 듯 가슴을 꾹 눌렀다가 떨어진 것을 주우려 허리를 숙였지만 이내 아무것도 하지 못하며 두 손을 꼭 붙잡았다.
의아하게도 그레타의 눈에는 눈물이 조금 맺혀 있었다.
“그레타?”
루이제가 재차 묻자 그레타가 연신 가슴을 누르며 조금 다가왔다.
“두, 두 분께서 그리 친밀하신 모습을 보니 놀라지 않을 수가 있어야지요.”
“아…….”
루이제는 무슨 기분인지 알겠다는 듯 살짝 입술을 벌렸고, 알렉은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레타가 조금 더 감격에 찬 눈으로 자신의 두 손을 꼭 맞잡았다.
“못 보던 사이에 두 분의 사이가 무척 좋아지신 건가요?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고마워요, 그레타. 실은 내가 걷는 걸 조금 줄이려고 하고 있어서 알렉이 도와주고 있었어요.”
“오, 그러셨군요. 못 보던 모습이라 제가 너무 놀랐나 봅니다. 두 분께서 가깝게 지내시기를 저희들이 얼마나 바랐었는지…….”
“…….”
급기야 그레타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알렉은 점점 더 할 말이 없는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 그레타는 그가 더 머쓱해지기 전에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두 분의 시간을 방해할 수는 없지요. 저녁 식사가 준비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그레타.”
루이제가 눈웃음을 지어 주자 그레타는 서둘러 떨어뜨린 것들을 줍더니 빠르게 사라졌다.
“…….”
알렉은 조금 멈칫했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겨우 들어 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 저런 감격에 찬 반응이라니.
결혼한 지 3년이나 되었어도 원래의 알렉시스와 루이제가 얼마나 데면데면했으면 저리 놀랄까?
아무리 마나 때문에 부부 관계를 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알렉시스가 루이제에게 다가가지도 않은 것 같아 그건 좀 이상했다.
문득 루이제가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알렉?”
“예?”
“사용인들도 우리 사이가 좋아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네요.”
“……아, 예.”
“그레타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까 괜히 다 뿌듯하네요. 다른 사용인들도 그렇고 그동안 우리가 잘 되길 오죽 바랐잖아요.”
“…….”
아무리 정략결혼이라지만 사용인들이 응원할 만큼 친밀하지 않았던 걸까?
만약 그에게 이런 부인이 생겼다면 멀리하려고 해도 그럴 수 없었을 것 같은데, 역시 알렉시스는 뭔가 이상했다.
‘정말 동성을 좋아했던 게 아닌가?’
그런데 왜 루이제에게는 완벽한 남편이 되어 주겠다는 말을 했던 걸까?
어쨌든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흐음.
그런 의아한 생각을 하며 계단을 다 올라간 그는 루이제의 방문을 열었다.
계속 화로를 피워 놓아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방 안에 그녀를 눕혀 주었다.
루이제의 등이 살포시 침대에 닿으며 머리까지 내려놓는 순간,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
보랏빛 눈동자가 영롱하게 반짝이며 그를 눈 안에 가득 담았다.
알렉은 차마 그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마른침만 한 번 삼켰다.
문득 그녀가 입술을 열었다.
“알렉.”
혀를 달콤하게 움직이며 그의 이름, 아니 진짜 남편의 이름을 불렀다.
“나 당신이 점점 더 좋아지는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