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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106화 (106/168)

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06화

* * *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말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마르셀은 저택으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루이제와 알렉시스의 집에 있었는데, 눈 깜짝할 새에 그는 자신의 저택과 이어진 길을 걷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떠올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짧은 시간 동안 믿기지 않는 일들을 적지 않게 겪었기 때문이었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마르셀은 똑같은 말만 중얼거렸다.

더 이상 그는 루이제와 알렉시스를 향해 총을 겨누던 마르셀이 아니었다.

“주인님!”

마침 하워드 후작저의 집사가 마르셀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무도회에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차도 없이 터덜터덜 걸어오다니.

“혼자 오시는 겁니까? 마부는 어디로 갔고요?”

집사는 빠르게 마르셀의 모습을 훑었다.

하얗고 멀끔한 얼굴이며 깔끔하게 정돈된 옷매무새가 저택을 나갈 때와 똑같았다.

“설마 걸어오신 건 아니지요?”

“말도 안 돼. 말도…….”

집사가 걱정스럽게 되묻는 말에도 마르셀은 초점이 없는 눈으로 걷기만 했다.

집사의 목소리 같은 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주인님! 주인님!”

그 어떤 외침에도 마르셀은 반응하지 못했다.

이 릴트 제국에서 가장 하찮다고 생각했던 존재가 상상도 못 할 힘을 가졌다.

알렉시스는 그를 순식간에 죽일 수도 있었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게 치유할 수도 있었다.

충격에 충격을 거듭하느라 마르셀의 머리는 고장이 나 버렸다.

결정적으로 그를 가장 견딜 수 없게 만든 건 그들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럴 거면 차라리 죽이라고 악을 썼지만, 마르셀은 결국 알렉시스의 말을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고통과 치유의 반복을 버틸 사람이 이 세상에 또 누가 있을까?

“으흑…….”

그런 치욕을 겪느니 차라리 죽는 게 수십 배는 나았다.

루이제와 알렉시스의 눈앞에 섰을 때 차라리 혀를 깨물려고 했다.

그러나 황제 외에는 누구에게도 굽힌 적 없던 그의 무릎은 겨우 루이제의 발끝에 허망하게 무너져 버렸다.

‘어차피 당신이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아.’

‘그러니까 그냥 꿇기나 해.’

퍽!

쿵!

‘이제 너 같은 건 우리를 평생 죽일 수 없거든.’

“으윽…….”

마르셀은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서재 안 서랍을 있는 대로 열어젖혔다.

당장 약을 먹지 않는다면 이 모멸감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그를 짓밟던 루이제의 날카로운 굽.

루이제와 알렉시스의 무심한 눈길과 브렌트 공작가 사람들의 경악한 눈빛, 꼴 좋다는 앤드류의 시선.

그런 수모를 겪고도 계속해서 머리를 들고 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사교계에 소문이 나는 것도 한순간일 것이다.

“주인님!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주인님! 진정하십시오!”

“으아악!”

마르셀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손길들을 닥치는 대로 뿌리쳤다.

어서 약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외에는 보이는 게 없었다.

손에 잡히는 약병을 열어 마구잡이로 입에 넣었다.

독약인 줄 알면서도 진짜 약인 것처럼 꿀꺽꿀꺽 삼켰다.

“주인님!”

“이거 놔! 다 놓으라고!”

기겁한 집사와 사용인들이 그를 말리려고 했으나 그는 필사적으로 온갖 약을 입에 넣었다.

수치심과 모욕감,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자멸감 말고는 마르셀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짓밟았던 놈들에게 앞으로도 계속 굴욕을 당하며 사느니 차라리 사라지는 게 나았다.

* * *

“누가, 죽었다고요……?”

평범하지 않은 밤을 보낸 다음 날 오후였다.

화창한 한낮의 정원 안에서 나와 알렉, 앤드류는 브룩스를 손님으로 맞이했다.

브룩스는 그제야 의자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황궁에 다녀오고 나서야 마르셀 후작의 소식을 들었죠. 마르셀이 어젯밤 무도회가 끝나고 두 분을 해치려고 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사교계에 파다합니다.”

“……그렇군요.”

그건 데미안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어젯밤 무도회장 근처에서 쓰러진 데미안을 발견했다.

그는 목숨은 건졌지만 온몸을 붕대로 칭칭 감아야 할 정도의 중화상을 입었다.

그런데 데미안은 마르셀이 자신을 버리고 도망친 줄 알고 큰 배신감을 느꼈다.

마르셀이 무슨 일을 꾸몄는지 사람들에게 모두 말해 버리고 말았다.

그제야 나와 알렉이 위험에 처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밤늦게 우리를 찾아와 무사한지 확인했다.

그중에서는 브룩스도 있었다.

미수로 그친 두 사람의 행동이 사교계에 퍼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가 죽음이라니.

알렉은 일부러 마르셀을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말끔히 치유해서 돌려보냈다.

울긋불긋했던 멍들이 내 눈앞에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마음 같아서는 치료해 주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뒤탈이 생길까 봐 대비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알렉과 앤드류를 보았다가 말했다.

“그런데 마르셀은 어쩌다 그리된 건가요?”

브룩스가 차 한 모금을 마시며 입을 축인 후에야 다시 말했다.

“하워드 후작저의 집사 말로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독약을 마셨다더군요.”

“독약이요?”

“예. 애초에 저택에 그런 걸 가지고 있었다는 것부터 제정신이 아닌 놈입니다. 두 분께서 무사하셔서 천만다행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거네요.”

내 말에 앤드류도 놀란 듯 입을 열었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천벌을 받아도 부족하지 않은 놈입니다. 내기대로 영지와 공장을 주겠다는 말도 허영이었겠죠. 알렉시스와 루이제를 죽여서 무마하려고 했던 겁니다.”

앤드류의 말에 브룩스가 한 번 끄덕였다.

“다들 그런 거라고 입을 모아 말하더군요. 데미안이 시인하기도 했고요. 아무래도 마르셀은 일이 실패한 나머지 크게 낙담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인물 같지는 않았지만, 줄리아 일도 그렇고 원래부터 속이 말이 아니었겠죠.”

브룩스는 여전히 목이 타는 듯 다시 차를 마셨다.

심상치 않은 어젯밤을 보낸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다.

어젯밤 마르셀이 우리 앞에 끌려와 무릎을 꿇은 일은 알렉과 앤드류도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알려져 봐야 좋을 게 없을 것 같아 나도 우리 식구들에게 입단속을 시켰다.

‘그렇다고 독약이라니.’

나는 테이블 아래로 손을 말아 쥐었다.

겨우 우리에게 무릎 한 번 꿇었다고 처절하게 절망하던 마르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알렉이 그동안 놈에게 무릎이 꿇린 적은 셀 수 없이 많았는데.

사냥 시즌에는 사냥감 노릇까지 시키더니 정작 본인은 이렇게 쉽게 죽어?

놈을 죽이고 싶은 기분이야 나도 턱 끝까지 치밀 때가 많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알렉을 바라보았다.

단 한 번이었지만 마르셀이 그에게 굴복했을 때 그는 어떤 심경이었을까?

알렉의 고통을 직접 겪지 못한 나로서는 감히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읽히지 않을 만큼 감흥 없는 눈길로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브룩스가 다시 숨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도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모두 전해 들으셨습니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하워드 후작의 내기에 관한 일은 별로 관심 없으신 것 같더군요. 시시한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

“뭐 두 분께는 잘된 일입니다. 마르셀이 무도회에서 호언장담한 것도 있으니 법적 대리인이라도 고용하시면 유리할 겁니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나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렇지 않아도 내기에 걸었던 구두를 아침부터 보낸 사람도 있었다.

내기의 결과가 정해지면 늘 일어나는 일이었다.

이미 나는 의회에서 빠르게 양도 승인을 받을 수 있는 방안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걱정 마, 마르셀. 네 방직 공장은 우리가 더 잘 운영할 거니까.’

내가 살짝 이를 가는 사이 브룩스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아, 그리고 폐하께서 황궁에 오라 하셨습니다. 약속대로 자작 작위를 돌려받으실 수도 있겠습니다.”

브룩스의 미소에 나도 어색하게나마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웃을 기분은 아니었지만, 얻게 된 것들이 생겼으니 그나마 조금의 성취감이 들었다.

* * *

‘일주일 안에 성을 복구시킨다면 자작 작위라도 더 줄 수도 있고.’

‘한 달 안에 그랜드칼리를 완전히 다스리게 되면 브렌트 공작가와 영지를 모두 돌려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나는 황궁으로 갈 준비를 하며 황제에게 들었던 말들을 떠올렸다.

우리가 북부에 갔다가 돌아오는 데는 열흘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중 수도에서 북부까지 왕복한 날들을 제외하면 북부에서는 딱 일주일을 보냈다.

황제도 그 사실을 감안해 자작 작위를 돌려주려는 걸까?

그러나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별로 개의치 않았다.

황제의 말 한마디에 공작위를 잃기도 했는데 이제 작위가 무슨 소용일까?

황제를 무너뜨리는 것 말고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게 물거품 같았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홀로 내려가자 마침 나와 있던 엘로이, 시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엘로이는 무심코 나를 보았다가 움찔 놀라며 고개를 숙였고, 시어머니는 평소처럼 머리를 들고 있었지만 어딘가 묘한 낌새를 풍기고 있었다.

“……왜들 그러세요?”

그새 또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희한하게 여긴 내가 다가가자 엘로이가 어색하게 웃었다.

“응? 아, 아니야. 언니.”

엘로이는 괜히 자신의 무릎 쪽을 문질렀다.

내가 마르셀을 걷어찬 위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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