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빙의한 주인공이다 147화
* * *
알렉시스는 퀘스트가 떠오를 때마다 충실하게 성공시켰다.
실패할 때가 많았지만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건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 세계의 최종 보상에 목숨을 걸었으니까.
루이제에게 다시 돌아가 반드시 행복하게 해 줄 것이다.
‘난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그냥 죽어 버리지 않을 것이다. 브렌트 공작가의 명예를 걸고…….’
알고 보니 그가 엄청난 마력의 소유자였다는 사실도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퀘스트들은 하나같이 힘들고 괴로웠지만 점점 자신이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만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갔다.
사람들은 잠적 중이던 정이안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에 그의 등장을 손꼽아 기다렸다.
알고 보니 외신 기자들마저 정이안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가 실력만 연마한다면 이 나라, 아니 전 세계의 정상급 헌터가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마나 폭주를 일으킨 탓이었다.
불시에 생겨나는 게이트 때문에 이 세계의 사람들은 그들을 지켜 줄 영웅이 나타나기만을 학수고대했다.
알렉시스는 그런 사람들을 보며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정말 안되었군. 끔찍한 마물들이 나타나는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니. 어서 이 세계의 비극도 끝내야 해…….’
약 두 달 동안 레벨을 10까지 올린 그는 이제 실전에 나서야 했다.
그러나 게이트 전투에 합류하려면 신분증과 헌터 협회 회원증을 보여 줘야 했다.
아직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그는 어쩔 수 없이 헌터 협회장을 찾아갔다.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을 만한 위조 신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의 등장에 헌터 협회장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정이안 헌터님! 언젠가 오실 줄 알았습니다. 그동안 어디 계셨던 겁니까? 헌터님이 나타나기만을 모두가 기다렸습니다.’
‘저기-.’
‘정말 충격적인 마나 폭주였죠. 아직도 생생합니다! 주변의 빌딩들 몇십 개를 다 날려 보내지 않았습니까! 하하하!’
‘…….’
그건 웃을 일이 아니었다.
그 일로 정이안은 가족들을 모두 잃었을 뿐만 아니라 다 헤아리기도 어려운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3년이나 잠적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알렉시스는 단호하게 본론을 꺼냈다.
‘지, 지금 웃음이 나옵니까? 내 위, 위조 신분이나 마, 만들어 주시죠.’
‘예? 아니, 헌터님 말투가 원래-?’
알렉시스는 협회장의 말을 끊으며 더 위협적으로 말을 이었다.
‘아, 앞으로 게이트에 드, 들어갈 겁니다. 내, 내가 정이안이라는 사, 사실이 다른 사람들 귀에 드, 들어가는 순간…… 그, 그때는 협회장이 내 폭주에 다, 당할지도 모릅니다.’
‘……!’
도대체 이 말버릇을 언제 고칠 수 있는 건지.
협회장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속에서 무언가가 폭발할 것처럼 치밀었다.
다행히도 협회장은 그의 요구대로 F급 헌터의 위조 신분을 만들어 주었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정말 심하셨나 봅니다. 이것 참 S급도 넘어설 분에게 F급이라니 면목이 없군요. 대신 더 강해지셔서 우리들을 지켜 주셔야 합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고맙군.’
알렉시스는 신분증을 휙 받아 돌아섰다.
갑작스러운 하대에 협회장이 조금 이상한 눈으로 그를 보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날부터 알렉시스는 바로 하급 게이트 위주로 다니며 레벨을 올렸다.
게이트는 헌터 협회의 회칙상 다른 헌터들과 함께 다녀야 해서 보상으로 받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다.
정이안은 국내 1위인 대기업의 회장인 데다가 무척이나 젊고 잘생긴
탓에 이미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다행히 유성전자의 경영은 까를로스라는 CEO가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직접적으로 경영에 나설 필요가 없었다.
정이안이 잠적하기 전 그를 찾지 말라고 지시한 것도 그에게 도움이 되었다.
한동안 그는 D급이나 E급 이하의 게이트 위주로 다니다가 일이 끝나면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체력 단련 퀘스트와 검술 퀘스트로 수련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띠링!
[C급 게이트가 나타났습니다!]
[어서 다른 헌터들과 협력해서 보스몹을 처리하세요!]
[10초 뒤에 이동합니다.]
[10, 9, 8…….]
C급?
아직 C급 이상은 가 본 적이 없는 데 그곳에서 싸울 수 있을까?
어차피 다른 유능한 헌터들도 함께일 테니 괜찮을지도 몰랐다.
‘그래. 가는 거야. 내 한계를 깨뜨려야 해.’
알렉시스는 단단히 마음을 다잡았다.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절망해 봤는데 더 이상 두려울 게 뭐가 있을까?
이윽고 처음 가 본 C급 게이트는 확실히 다른 하급 게이트에 비해 범상치 않은 긴장감이 도사렸다.
C급 게이트라고는 해도 A급 헌터와 S급 헌터들이 동행할 만큼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여기선 어떤 마물이 나올까?
다른 헌터들도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문득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아악! 저, 저기!’
헌터들의 고개가 모두 그쪽으로 돌아갔다.
동시에 우두두두, 무언가 힘차고 빠르게 땅을 박차는 소리가 들리더니 머리 위로 그늘이 졌다.
알렉시스는 뭐라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검을 빼 들었다.
거미 마물들의 길고 날카로운 다리들이 사방에 섬뜩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처음부터 이렇게 큰 마물들이 나온다고?
대체 안쪽에는 얼마나 더 큰 게 있는 거지?
알렉시스는 침착하게 마물의 다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 여파로 그의 팔에 아릴 듯한 충격이 전해졌다.
엄청나게 단단한 다리였다.
목.
목을 노려야 해.
알렉시스는 눈으로 빠르게 거미의 목을 찾으며 일단 다리를 향해 다시 검을 휘둘렀다.
거미의 다리를 타고 몸통까지 올라가서 목을 찌를 생각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아악! 살려 주세요!’
가까운 거리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
돌아보니 D급 힐러 한 명이 쓰러져 있었고, 거미의 날카로운 다리가 당장이라도 그의 몸을 꿰뚫을 듯이 높게 쳐들렸다.
알렉시스는 거미의 눈을 향해 황급히 검을 던졌다.
뀌에에엑!
거미 마물이 괴로운 신음을 내며 난동을 부렸다.
명중?!
그는 황급히 힐러를 끌어안고 바닥을 굴렀다.
그러자 그의 머리카락을 스치며 거미의 다리가 땅으로 내리꽂혔다.
간담이 서늘해질 만큼 엄청난 파괴력이었다.
‘조심해요!’
문득 그의 뒤쪽에서 A급 힐러의 외침이 들리더니 뜨거운 기운이 확 퍼졌다.
동시에 거미 마물의 육체도 불에 타오르더니 잿더미로 가라앉았다.
‘……! 이게 A급 헌터의 힘!’
알렉시스는 내심 감탄했다.
그도 계속 수련을 하다 보면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이쪽 세계의 사람들이 감탄할 정도로 엄청난 마나를 지녔으니 그도 노력만 한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조, 조심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알렉시스는 D급 힐러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웠다.
그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힐러도 C급 게이트가 처음이라 그런지 무척 떨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차분하게 힐러를 다독였다.
‘우, 우린 무사히 나갈 겁니다. 거, 겁먹지 마십시오.’
‘……죄송합니다. 괜히 왔나 봐요. 피해만 끼치고 있네요.’
힐러가 한껏 미안해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게이트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몰랐다. 죽거나 돌아오지 못하는 헌터들도 꽤 되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피할 수 없을 테니 즐기지는 못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그의 머리 위로 살벌한 어둠이 또다시 덮쳐 왔다.
힐러의 뒤쪽으로 샛노랗게 빛나는 두 눈과 알렉시스의 눈이 마주쳤다.
어디서 또 튀어나온 건지, 거미 마물이 퀴엑 하는 단발마와 함께 순식간에 달려들었다.
안 돼!
알렉시스는 힐러를 휙 끌어당기고는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거미의 다리가 그의 심장을 꿰뚫는 속도가 더 빨랐다.
띠링!
[사망하셨습니다.]
……어?
이게 뭐지?
죽었다고?
제대로 손 한 번 쓸 새도 없었는데?
정말일까?
안 돼. 이럴 순 없어.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 했는데!
알렉시스는 믿을 수 없어 몸부림쳤지만 빛 한 줌 없는 어둠만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 순간 다시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사망으로 시스템 재가동합니다.]
?!
글자들을 다 읽기도 전에 알렉시스의 눈앞이 다시 밝아졌다.
물속에서 빠져나오듯 크게 숨을 헉 들이쉬자 게이트 안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깨어나셨군요!’
울음 섞인 반가운 외침이 들렸다.
돌아보니 힐러가 눈물을 흘리며 그를 치유하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신, 다신 죽지 않을 것이다.
생각보다 게이트는 훨씬 무시무시한 곳이었고, 그는 인간에게 짓밟히는 개미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 강해져야 했다.
알렉시스는 하루에 두세 시간만 자고 일어나 수련 퀘스트에 매진했다.
그러나 그는 그 후로 또 두 번이나 더 죽고 말았다.
한 번은 심하게 다친 헌터 한 명을 두고 갈 수 없어 힘겹게 부축하다가 마물에게 기습 공격을 당했다.
그다음은 게이트 안에서 헌터들끼리 싸움이 일어났는데 중재하다가 휘말려 죽고 말았다.
‘제기랄.’
그의 시스템 덕에 정말로 죽지는 않았지만 이루 말할 수 없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만큼 그가 나약하고 부족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러다 언젠가는 진짜로 죽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난 강해져야 하는데, 완벽한 남편이…….’
문득 헌터 워치에 알림이 울렸다.
이 소리는 S급 게이트가 나타났을 때 울리는 음성이었다.
동시에 그의 시스템 창도 떠올랐다.
띠링!
[도심 한복판에 S급 게이트가 나타났습니다!]
[던전 브레이크 30분 전입니다!]
[어서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헌터들과 힘을 합쳐 보스 몹을 물리치세요!]
……!
비상이다!
그는 당장 달려 나갔다.
도심 한복판에서 30분 뒤 던전 브레이크라니, 한 명이라도 힘을 보태 사람들을 어서 대피시켜야 했다.
헌터 워치에도 비상 게시글들이 쏟아졌다.
S급 게이트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금방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날 거라는 말들이었다.
뉴스 속보도 함께 시작되었다.
그가 바람 같은 스킬로 몇 초 만에 현장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런데 줄곧 그리웠던 사람의 형상이 거짓말처럼 그의 눈에 들어왔다.
……루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