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아리스는 옆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그녀가 대외적으로 웃을 때 자주 웃던 미소였다. 아리스 얼굴에 환한 웃음이 걸리자 무척 선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것이 말을 건 아가씨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전 아젤 로슨이라고 해요.”
“로슨 백작가의?”
“네, 맞아요.”
로슨 백작이라면 아버지와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다. 그리고 황태자의 타타임에 참석한 적 있는 아가씨였다. 안면이 있었기에 이야기하기가 쉬웠다.
“티타임 때 뵙고 처음 뵙네요. 옆자리에 계실 줄은 몰랐어요.”
아젤은 찰랑이는 파란 머리카락에 하늘색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무척이나 화려한 옷차림을 입고 왔다.
“옷이 예뻐요.”
아리스가 칭찬했다. 그러자 아젤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시녀가 입혀 주었어요.”
아젤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튀는 건 사양인데.”
“아, 왜요? 이런 날 튀어야 좋은 남자가 영애를 선택하잖아요.”
그러자 아젤이 곤란한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버지께서 싫어하세요.”
어떤지 익숙한 향기가 났다. 아리스는 조용히 그녀에게 물었다.
“티타임도 막으셨다가 실패한 거 아닌가요?”
이안이 그랬듯 로슨 백작 역시 그랬을 것 같다. 그녀가 듣기로는 황제 파벌에 딸바보가 많다고 들었다. 아마 로슨 백작도 그 일행 중 한 명인 것 같았다.
“맞아요. 사냥 대회에 참여하는 것 막는 것도 실패하셔서 술을 잔뜩 드시고 오셔 가지고.”
아젤은 그날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한숨부터 나왔다.
“저희 아버지도요.”
“호리슨 후작님도요?”
“네.”
그 말에 아젤이 웃었다. 아리스가 보기에 아젤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하지만 금발이 아니었기에 황태자가 가까이하지 않았다.
참고로 그날 황태자가 가까이했던 아가씨들은 모두 아리스 앞에 앉아 있었다.
오늘의 자리 배치는 신분대로가 아닌 황태자의 티타임 때 그의 눈에 띈 아가씨들을 앞에 앉히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왜요?”
“호리슨 영애.”
“네.”
“분명 황태자 전하께서 가까이하지 않으셨는데 춤을 추셨잖아요.”
“그렇죠.”
“자리도 앞자리가 아닌 제 옆이고.”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호리슨 영애의 자리를 보고 속닥거리고 있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총애하는 이와 가까이하는 이가 다른가 봐요.”
황태자의 일관성 없는 행동의 이유를 아젤이 분석하고 있었다.
‘다르긴 하지.’
귀찮은 일을 피하려고 자신을 선택하지 않았던가.
‘앞자리는 싫지만.’
아리스는 그리 생각하며 황제의 축사가 끝나고 사냥터로 떠나는 비올레를 보았다. 말을 능숙하게 모는 그녀는 어느 누구보다 빛나 보였다.
이엘 역시 비올레 옆에 서서 말을 몰았다. 그는 비올레와 루이슨,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이안과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무튼 황태자 전하의 생각을 알 수 없어요.”
“저도 그리 생각해요.”
그녀는 아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파티와 관련된 이야기로 시작해 수업과 관련된 이야기, 드레스, 기타 등등 이야기꽃을 피우며 시간을 보냈다.
멀리서 아가씨를 지켜보던 루진은 아리스가 다른 영애들과 무사히 지내는 걸 보고 안도했다. 어딜 가도 잘 어울릴 아가씨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호리슨 영애의 시녀라고요?”
다들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루진의 차례가 되어서 소개했는데 다들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아, 제가 오늘 옷을 초라하게 입고 왔나요?”
그렇게 수수한가? 시녀라서 복잡하게 꾸미진 않았지만 나름 화장도 했는데.
“그게 아니라 호리슨 가문에서 일하고 계신 게 부러워서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호리슨 가문의 이안은 인품이 좋기로 소문나 있었다. 그리고 일하기 좋은 곳이라 장기 근무자가 많다는 소문도 난 곳이었다.
아리스의 모나지 않은 성격을 생각하며 루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는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어 주세요.”
“이야기도 들어 주세요?”
“전 추천하면 싫다고 다른 거 가져오라고 하셔서 곤란해요.”
시녀 한 명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전 변덕 때문에 힘들어요.”
다들 아가씨를 모시는 고충을 이야기했다. 루진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아가씨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자신을 친구처럼 대해 주는 아가씨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근데 호리슨 영애 드레스는 어디서 구입했어요?”
“맞아. 저도 물어보고 싶었는데.”
다들 궁금한 듯 루진을 보았다. 루진은 허리를 펴고 고개를 살짝 돌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모든 사람이 루진에게 시선이 쏠리자 루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신이 나설 차례가 된 것이다.
“저희 아가씨는 뭐든 잘 어울려서 아무 것이나 상관없지만.”
이렇게 운을 띄었다.
“그렇다고 정말 아무 곳에서 구입할 수는 없죠. 호리슨 가문인데.”
“그렇죠.”
누가 이때 추임새를 넣었다. 루진은 재빨리 그녀를 보았다. 딱 봐도 눈치가 빠른 시녀 같았다.
“그래서 말인데요…….”
루진은 자신이 가진 노하우를 살짝 말했다. 그러자 시녀들이 그것을 얼른 머릿속에 저장하기 시작했다. 황태자와 춤을 춘 아리스 호리슨 영애가 구입한 곳이라고 주인에게 말한다면 주인도 더 이상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 * *
“같이 움직이는 건 어때?”
황태자가 먼저 제안했을 때 비올레는 고민해야 했다. 자신이 같이 움직이면 아버지도 같이 움직이실 것이다. 모두 다 사냥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이었다. 사냥감을 발견하면 황태자에게 양보해야만 했다.
“소소하게 사냥하고 싶다며.”
“네.”
“사냥감이 많이 나오는 곳을 알아. 거기 가서 각자 행동하지.”
비올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는 듯 황태자가 말했다. 그의 말에 비올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그의 말을 거절하기 힘들었다.
“감사합니다.”
“아니 뭐.”
황태자는 비올레와 같은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뒤를 루이슨이 따라가고 있었다.
산 중간쯤 왔을 때였다.
“여기가 산짐승이 많이 있는 곳이야.”
이제 각자 행동할 차례가 되었다. 비올레는 말을 몰았다. 그 뒤를 루이슨이 따라갔다.
루이슨은 오늘 사냥 대회에 참가했지만 사냥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가 참가한 이유는 오로지 어린 딸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황태자는 천천히 말을 몰아 자신이 지도에서 봤던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후 비올레는 토끼 한 마리를 발견했다. 들고 있던 활을 조준해 쏘았다.
화살이 토끼를 관통했다.
“잡았어요!”
비올레가 좋아했다. 루이슨이 토끼에게 다가가 화살을 뺐다.
“정확하구나.”
“검은 잘 못 써도 활은 잘 쏜다고 칭찬 들었는걸요.”
사냥에선 검보다 활을 많이 사용한다.
“맛있겠다.”
토기 고기를 먹을 생각을 하니 배가 고팠다. 비올레의 행동에 루이슨이 방긋 웃었다.
“안테가 먹게 해 줘야 할 텐데.”
안테는 케이크 가게를 다녀온 이후로 살이 많이 쪘다며 비올레에게 다이어트를 시키고 있었다.
오늘 루진은 왔지만 안테는 오지 않았다. 비올레가 꽃이 아니라 사냥하러 참여한 것이기에 루이슨이 안테 대신 온 것이다.
“한 머리 더 잡으면 언니 줘야겠어요.”
루이슨은 잡은 토끼를 망 안에 집어넣었다. 사냥한 것은 모두 이곳에 담도록 되어 있었다.
“몇 마리 잡을 거냐.”
루이슨의 질문에 비올레가 손가락으로 세 개를 펴며 말했다.
“세 마리요.”
“너무 적은 거 아니냐?”
“이 정도면 충분해요.”
사냥은 이 정도면 충분히 즐길 수 있다. 더 잡으면 좋지만 그 이상 할 생각은 없었다. 생명을 죽이는 데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세 마리 정도면 적당하다고 생각한 그녀였다.
* * *
“여기에 뭔가가 있을 거야.”
이엘은 확신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멧돼지가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반드시 와 보고 싶었다. 멧돼지를 잡아야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혼자서 멧돼지를 잡는 건 힘들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도전하고 싶었다.
처음 나가는 사냥 대회였다. 우승하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그는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멧돼지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놈은 아직 이엘은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큰 놈이다. 저놈을 잡으면 될 것 같다. 그는 웃으면서 화살을 조준했다. 그런데 그때 멧돼지가 화살을 겨누고 있던 이엘을 발견했다.
소리를 내며 그에게 달려왔다. 위험한 순간이었다. 기사들을 두고 가야 하니 위험한 일은 하지 말라고 황제가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위기의 순간, 화살 하나가 멧돼지 정수리에 박혔다. 그리고 재차 누가 화살을 날려 멧돼지를 잡았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으세요!”
뒤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황태자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비올레와 루이슨이 화살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까진 어떻게?”
“오다 보니 우연히 오게 되었어요.”
황태자가 간 방향으로 가면 더 좋은 놈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온 건데. 황태자를 구하게 될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