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다른 여자는 없습니다.”
“정말이죠?”
“네.”
로이가 다짐하듯 말했다. 그녀는 그에게 받은 상자를 열었다. 밖에서 열고 싶었지만 잊어버릴 것 같아서 열지 못한 것이었다.
“예쁘다.”
붉은 보석과 파란 보석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신발을 벗어 발을 올려놓고 발찌를 착용하려고 했다.
“제가 해 주겠습니다.”
로이가 올려둔 그녀의 발을 잡았다. 그리고 발찌를 해 주었다.
“로이?”
로이가 계속 발을 잡고 있다. 야릇한 기분이 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거기 자꾸 만지면 안 되어요!”
“왜 안 됩니까.”
“그러니까…….”
느낀다고 말할 수도 없고, 부끄러웠다. 귀가 붉어졌다.
“사랑합니다.”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리고 그녀를 끌어당겼다.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좋다.’
그와의 접촉이 좋다. 혀가 섞이는 소리, 숨소리, 신음도 모두 다 음악처럼 들렸다.
혀가 닿고 또 닿았다. 거친 소리가 들렸다.
“하아.”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숨이 다시 섞였다.
“키스 안 하고 갈 줄 알았는데.”
키스가 끝나고 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안 했으면 아쉬울 뻔했어요.”
그녀가 그의 옷깃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가 입을 맞추는 걸로 마무리를 지었다.
* * *
루진은 늦게 들어온 아리스를 보았다. 입술이 살짝 부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았지만 그냥 가만히 두었다. 연인끼리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니 말이다.
“늦었어요.”
“로이가 일찍 보내 주려고 한 걸 내가 붙잡았어.”
시간이 벌써 11시였다.
“아가씨, 피부 관리 하려면 일찍 주무셔야 하는 거 알죠?”
“알아.”
“욕실에 물 데워놨어요.”
화장을 진하게 했지만 이 정도는 아리스가 충분히 지울 수 있었다. 욕실에 들어간 아리스는 꼼꼼히 세안하고 나왔다. 루진이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로이가 사 줬어.”
아리스가 발찌를 보여 주며 자랑했다.
“예쁘지?”
“예쁘네요.”
일단 다른 건 몰라도 로이가 아리스를 아낀다는 건 보였다.
“주무세요.”
“응.”
아리스가 침대 위로 올라가는 걸 보고 루진이 불을 껐다.
내일이면 드디어 수도로 출발한다.
여행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아리스의 마차가 떠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로이가 바라봤다.
“그립겠군.”
어제의 일이 꿈만 같다. 그의 말에 더윈이 말했다.
“저희도 출발하도록 하죠.”
“그래.”
아리스가 떠난다. 이제 자신도 떠날 때가 되었다.
아리스와 있었던 일은 가슴에 묻고 혼자만의 추억으로 곱씹을 예정이었다.
말이 출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두 번째 만남은 끝이 났다. 각자의 추억을 안고서 각자의 자리로 향했다.
7. 가면무도회
여름이 지나고 있었다. 기분 좋게 아침에 운동을 하던 리삭은 자신의 옆에서 같이 검술을 연마하는 로이를 보았다.
애인을 만나고 온 뒤로 묘하게 밝아진 로이였다. 거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아도 그냥 잘 만났다는 말만 할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리삭은 뭔가 아주 좋은 일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검술 연습을 마치고 리삭이 로이에게 물었다.
“좋은 일이 있나 보군.”
“아닙니다.”
“혼자만 알지 말고 나에게도 말해 보게.”
리삭이 자꾸 물었다. 로이는 아리스를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과 살결이 떠올랐다.
“아리스가.”
“그래.”
로이가 드디어 입을 열기 시작했다.
“결혼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어린 아가씨가 사람 보는 눈이 있군.”
리삭은 로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워지고 아늑해집니다.”
“그래.”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과 미래를 꿈꾸고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리삭은 로이가 기분이 좋은 이유를 알고 축하해 주었다.
“자네가 부럽군.”
“제가 말입니까?”
“내 경우에 나는 결혼을 생각하고 있었고 아내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지. 내가 어리다는 이유로 말이야.”
그때 속앓이를 몇 번 했다.
“어떻게 결혼하셨습니까?”
“처가댁을 공략했지.”
리삭은 작위도 있었고 땅도 있었다. 돈도 많았다. 그런데 아내는 자신이 부담스럽다고, 조건이 안 맞는다고 일찌감치 애인으로만 지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상처를 받았다. 그래서 처가댁을 공략해 결혼까지 갔다.
“돈을 좀 뿌렸지.”
“아아.”
“신혼 초반에는 아내의 눈치를 많이 봤지.”
그래도 행복했다. 아내 이야기를 하는 리삭의 눈빛이 살아 있었다.
“사실 난 아내와 같이 있으면 술을 마시지 않아.”
“그럼?”
“여기 와서 마시는 거지. 아내가 술 마시는 걸 싫어해서 안 마신다네.”
그의 말은 놀라웠다. 아내가 싫어한다는 이유로 술을 안 마신다니. 그가 술을 좋아한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내도 내가 술을 참는 걸 알아. 그래서 이곳에 와서 마시는 것까진 간섭하지 않아.”
아내는 현명했다. 남편이 술에 대한 욕구를 풀 수 있도록 해 주니 말이다.
“아내가 싫어하는 걸 하지 않으면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어.”
리삭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나처럼 말이야.”
그의 말에 로이가 웃었다. 부하들에게 여자를 만나러 가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은 여자를 만나러 가지 않는다. 리삭이 오로지 아내만 보는 걸 다들 알고 있었다.
“저도 각하를 닮아야겠군요.”
아리스가 자신과 있어서 행복했으면 좋겠다. 슬퍼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리 생각하면서 로이는 검을 검집에 넣었다.
“각하!”
부하가 뛰어오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사신이 도착했습니다.”
휴전을 제의한지 얼마 안 돼서 사신이 왔다.
“항복이냐, 전쟁이냐.”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리삭은 저벅저벅 걸어 사신이 있는 곳으로 갔다. 사신이 리삭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령관을 뵈옵니다.”
“무슨 일인가.”
오란 제국의 병사는 리삭 뒤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에 파란 눈동자를 가진 남자였다. 무척이나 잘생긴 남자였다. 그래서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항복 문서입니다.”
결국 오란 제국에서 항복을 결정한 모양이다.
“군대는 곧 철수할 겁니다.”
사신의 말에 리삭이 천천히 항복 문서를 읽었다.
“전쟁에서 진 상대가 배상금과 포로 교환 비용을 감당해야 할 거야.”
리삭의 말이 맞았다. 전쟁에서 졌으니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애당초 오란 제국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제논 제국은 오란 제국과 전쟁의 뜻이 없었던 것이다. 오란 제국 황제의 팽창주의 정책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고 로이가 나서서 전쟁을 막은 것이다.
“항복 문서를 폐하께 전달하겠네.”
“그런데 말입니다.”
“뭔가.”
“총사령관님은?”
누가 총사령관의 안부를 묻는지 알 것 같았다.
“팔은 완치되었다.”
리삭은 사신이 원하는 말을 해 주었다. 그의 말에 사신이 안도했다.
사신이 떠나고 리삭은 오란 제국이 항복했다는 내용을 적은 보고서를 써서 새로 날려 보냈다. 사람보다 새가 빠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옆을 로이가 지켜보고 있었다.
“전쟁은 당분간 없겠군.”
그는 로이를 보았다.
“결심했나?”
그의 말에 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군인을 그만둘 생각입니다.”
군인은 위험에 빠진다. 아리스가 울게 될 일이 생길 것이다. 그 일은 막아야 했다. 또한 그는 전쟁에 미련이 없었다.
“야심이 없군.”
“야심이 행복을 주진 않으니까요.”
그가 원하는 것은 모두 다 가졌다. 더 이상 공을 세울 이유가 없다.
“그래, 맞아. 야심이 행복을 주진 않지.”
리삭은 로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무나도 유능한 그를 보며 쉽지 않았을 그의 선택을 존중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