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는 내가 차지한다-77화 (77/124)

# 77

“무슨 일이 있나요?”

비올레가 물었다. 그러자 리몬트리가 이엘을 힐끗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황태자 전하의 하소연을 듣느라 늦었습니다.”

비올레와 아리스가 동그란 눈을 뜨고 그를 보았다. 이엘은 힘없이 의자에 앉았다.

“내가 만나는 여자 알지.”

“아, 그분 말인가요?”

“그래.”

이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를 정부 취급 했어.”

“네?”

아리스가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나 말고도 만나는 남자가 있었어.”

황태자 말고도 만나는 남자가 있었다니!

“내가 그녀에게 정부가 되라고 하긴 했지만!”

아리스는 그녀를 떠올렸다. 은발에 육감적인 미인이었다.

“나를 정부 취급하고 있을 줄이야!”

아아, 황태자가 자신을 정부 취급 하니 그에 맞춰서 그녀도 황태자를 그렇게 취급한 것 같았다.

“내가 다른 남자 만나는 현장을 목격해서! 누구냐고 물었더니 알 필요 없다잖아. 난 알아야 한다고 하니 정부 주제에 나서지 말라고 하더군.”

황태자는 이를 갈았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그는 그녀가 준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었다.

“내가 다른 정부 두는 거 상관하지 않는다고, 그러니 자신이 남자 만나는 것도 말리지 말라고 하더군.”

이엘이 억울한 듯 차를 들이켰다. 리몬트리에게 하소연을 이미 하고 왔지만 끝이 없었다.

“난 애인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 이야기 해 보셨어요?”

비올레가 물었다. 그러자 이엘은 입을 떼지 못했다.

“해 보셨구나.”

아리스가 맞추었다. 이엘의 자존심이 금이 가는 일이었을 것이다.

“여자가 거절했습니다.”

리몬트리가 그리 말하며 차를 들이켰다. 그러자 이엘이 그를 노려보았다.

“그럼 끝난 거네요.”

아리스의 말에 이엘이 벌컥 소리쳤다.

“아니야, 안 끝났어! 헤어지잔 말은 없었어.”

“정부 취급 당하는데 계속 만나시게요?”

“만날 거야.”

이엘은 이를 악물었다.

“먼저 헤어지자는 말이 나오기 전까진 만날 거야.”

미련 없으면 바로 헤어지던 황태자가 아닌가. 아리스와 비올레는 서로를 바라보다 이엘을 보았다.

“안 보면 보고 싶단 말이야.”

다른 건 몰라도 이엘이 그 여자에게 푹 빠진 것 같았다. 정부 취급을 해도, 자존심 상할 텐데도 계속 만난다는 걸 보면 말이다.

“난 다른 정부 다 정리하고 만났는데.”

이엘은 그게 억울한 것 같았다.

“그러니 처신을 잘하셨어야죠.”

아리스의 말에 이엘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내가 어때서.”

“나쁜 남자잖아요.”

그러다 나쁜 여자를 만난 것이다. 그리고 그녀에게 푹 빠졌다. 아리스는 통쾌하기도 했다.

“만나면 잘해 줘.”

“네.”

“그런데 헤어지면 연락도 안 해.”

아아, 맺고 끊는 게 확실한 여자다. 황태자에게 매달리지도 않는 여자였다.

“친구로 두는 건데.”

하필이면 왜 연애를 시작한 걸까.

황태자는 씁쓸한 마음을 달래며 차를 마셨다. 그 모습이 딱하고 안 돼 보여 아리스는 그의 어깨를 도닥여 주었다.

“그런데 아리스.”

“네, 전하.”

“결혼은 언제 할 거야?”

비올레도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러자 아리스가 조용히 웃었다.

“전 생일 끝나고 빨리 하고 싶은데, 아버지께서 반대하세요.”

“아.”

“그래서 일을 저지를 생각이에요.”

“응?”

“생일 날 로이에게 저를 선물로 주려고요.”

그 말에 황태자가 놀랐다. 리몬트리도 놀라고 비올레도 놀랐다.

“로이는 내가 원할 때 한다고 했으니.”

그녀가 웃었다.

“일을 저지르면 아버지도 어쩔 수 없이 허락하시겠죠.”

딸바보로 유명한 이안이 아닌가. 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몸져누울 것 같았다.

“결혼을 그리 빨리 하고 싶어?”

이엘이 물었다.

“네.”

아리스는 막힘이 대답했다.

* * *

오랜만에 마을에 도착했다. 여관에서 짐을 푼 로이는 편지지와 펜을 꺼냈다. 펜은 일전에 아리스가 선물로 사 준 것이었다. 펜을 꺼낸 그는 심호흡을 하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아리스에게.]

첫머리를 이리 쓰며 그는 많은 생각을 했다.

이 말을 쓰는 데 자신이 얼마나 의미를 부여하는지 그녀는 알지 못할 것이다.

지금은 이동 중이라, 답장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하며 수도에 도착해 찾아가겠다고 적었다. 내일 이동하기 전에 빨리 우체국에 가서 편지를 부칠 생각이었다.

편지를 쓸 기회가 없었는데 지금이라도 생겨서 다행이었다.

부대는 천천히 이동하고 있다. 고향으로 내려갈 자들은 모두 중간에 떠났고 지금은 수도로 이동하는 자들과 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 인원이 꽤 되어서 이동 속도는 느렸다. 어차피 신년회까지 한 달 반 남았기에 그리 급하지 않았다.

편지를 다 쓰고 봉투를 밀봉했다. 그녀처럼 실링 도장을 사서 예쁘게 꾸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전쟁터에서 실링 도장을 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번에 수도에 가면 그녀와 같이 도장을 사러 가고 싶었다. 그녀가 사는 걸 보고 같이 사야지.

그의 목에선 목걸이가 반짝이고 있었다. 아리스에게 비싼 걸 선물받은 걸 안 동료들이 다들 부러워했다. 미래의 부인이 젊고, 예쁘고, 돈도 많고, 신분도 좋고, 거기에 로이를 위해 돈까지 쓰고 있었으니 말이다.

“자는가.”

리삭이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안 잡니다.”

로이는 편지를 서랍 안에 넣었다. 편지 쓰고 있던 걸 들키는 게 부끄러웠다. 문을 연 그는 리삭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에는 더윈이 와인병을 들고 오더니 이번에는 리삭이 와인병 두 개를 들고 서 있었다.

“거절하지 않겠지?”

“네, 각하.”

지금은 천천히 이동 중이다. 내일 숙취에 시달린다 해도 이동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수도에 가면 술을 끊어야 해서 말이야.”

리삭은 조용히 웃었다. 술을 싫어하는 아내가 떠오른 것이다.

“수도에 도착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잔 하고 싶어서 불렀네.”

그리 말하며 그가 들어왔다. 이미 다른 곳에서 한잔 한 것 같았다. 약간 비틀거리며 들어온 그가 소파에 앉았다. 로이도 그를 따라 소파에 앉았다.

병과 잔을 놓는 리삭을 보며 로이가 술을 따랐다. 와인이 가득 든 잔을 리삭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마실 잔을 따르려는데 리삭이 손을 들었다.

“내가 따라 주지.”

“감사합니다.”

로이는 리삭이 주는 잔을 받았다. 그리고 몽롱하게 눈을 뜬 그를 보았다.

“너무 과음하지 마십시오.”

“음, 이번 술이 마지막이야.”

조용히 웃던 리삭과 로이가 건배를 했다.

“수도에 가면 어딜 먼저 갈 건가.”

그의 말에 로이가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아리스를 만나러 갈 생각입니다.”

“그래?”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곧바로 아리스를 만나러 갈 생각입니다.”

폐하를 알현하는 게 먼저다. 영지와 작위를 받아야 하니 말이다. 로이의 말에 리삭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에 머물 곳은 있나?”

“없습니다.”

“아직 저택이 없겠지.”

부유한 귀족이라면 수도에 넓은 저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로이는 아직 저택이 없었다.

“우리 집에서 머물도록 하게.”

“아.”

“여관보다 나을 거야.”

그의 배려가 고마웠다 로이는 한 잔 마시고 리삭이 주는 잔을 또 받았다.

“감사합니다.”

“아내가 자네 추종자라서.”

리삭이 웃었다.

“호리슨 영애 집에 머무는 건 좀 그럴 테니, 우리 집에 묵게.”

“알겠습니다.”

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술자리는 금방 끝났다. 술에 취한 리삭을 방에 데려다준 로이는 다음 날 일찍 일어나 우체국에 갔다. 가장 빠른 우편으로 부친 다음 그는 천천히 걸었다.

편지가 빨리 도착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