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작위를 받았군.”
루이슨이 잔을 입가에 댔다. 와인이 알싸한 맛을 자아냈다. 옆에서 같이 와인을 마시던 이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작위를 받고 영지도 받았지요.”
그 광활한 평지의 절반을 받았다. 아마 평생 놀고먹는다 해도 돈이 남아돌 것이다. 그만큼 대단한 곡창 지대였다. 거기에 대대로 나라에서 육성한 기사단이 있었다. 이것도 내린다고 하시니 엄청난 일이었다.
“기사단까지 하사하실 줄은 몰랐군.”
로이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백작 가문에 기사단까지, 엄청나군.”
루이슨의 말에 이안도 공감했다. 기사단을 하나 육성하는 데는 엄청난 시간과 돈이 든다. 그런데 그것을 그냥 주겠다고 하다니.
더욱 놀라운 것은 로이가 군인을 그만두겠다고 말한 것이었다.
“젊은 나이에 그만두다니.”
루이슨은 로이를 보았다. 아리스와 이야기를 소곤소곤하고 있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딸이 허락한 선택입니다.”
이안은 그리 말하며 딸을 보았다. 남자가 원하는 걸 들어주고 싶다던 딸의 말이 떠올랐다.
“상대방을 위하는 걸 들어주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제 딸은 좋은 여자입니다.”
“로이에 한해서 말이지.”
“한 남자에게만 좋은 여자면 되었지요.”
“맞는 말이야.”
그리 말하며 그들은 로이와 아리스를 지켜보았다. 다시 춤을 추러 간 그들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 * *
춤을 추는 걸 즐기는 건 아니지만 로이와 춤을 추는 건 좋았다. 지금까지 남자들이 춤을 청해도 모두 거절했는데 로이와 함께 있으니 춤을 계속 추고 싶었다. 다른 여자가 그와 춤을 추는 것을 보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로이가 아리스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이전보다 끈적끈적한 음악이 흘렀다. 연인들을 위한 음악 같았다.
“로이는 춤을 어디서 배웠어요?”
“아카데미 다닐 적에 교양으로 배웠습니다.”
그의 말에 아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데미는 즐거웠나 봐요.”
“그냥 그랬습니다.”
그가 아카데미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궁금했다.
“어떻게 지냈어요?”
아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봤다. 아카데미 생활을 궁금히 여기는 것 같았다.
“아버지께서 막대한 빚을 지면서 학교를 보내셨지요.”
“아아.”
“그래서 일찍 돌아가셨는지도 모르지요.”
로이는 부모님이 모두 일찍 돌아가셨다.
“이전에는 검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졸업 후에는 기사단에 지원하려고 했었고요.”
“그럼 그 전에는 검을 어디서 배웠어요?”
아카데미에서 검술학부를 졸업한 로이다. 이전에 아카데미 들어가기 전에 검을 배웠을 것 같았다.
“아카데미 들어가기 전에는 검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그럼?”
“아카데미에서 처음 교양으로 검술 과목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수업에서 제가 제일 성취가 빨랐습니다.”
그러다 보니 검이 좋아졌다. 나중에는 기사로 전향할 것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졸업할 즈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빚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바로 군인이 되었습니다.”
직업 군인이 되면 나라에서 꽤 많은 돈을 준다. 로이는 그 돈을 모아 빚을 갚았다. 오란 제국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덕분에 돈을 꽤 많이 받았고, 돈을 더 빨리 갚을 수 있었다.
“빚을 갚고 나서 평범한 일상을 지내고 있을 때 아리스의 편지가 도착한 거지요.”
그 편지를 태우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운명이 달라졌다.
“대단해요. 빚을 다 갚다니.”
아리스는 그의 의지를 높게 평가했다.
“빚은 없는 게 낫습니다.”
로이는 그간의 생활을 떠올렸다. 빚을 갚기 위해 악착같이 일해야 했다.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한 것 같다. 전쟁이 지긋지긋할 정도로 말이다.
“로이가 점점 대단해 보여요.”
“음.”
아리스는 빚을 진다는 걸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예쁘게 자란 아가씨니 말이다. 그런데도 자신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려고 하고 있었다.
“아리스가 빚을 지지 않도록 일해야겠군요.”
로이는 그녀가 자신처럼 고생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영지도 있고 작위도 있으니 필요한 건 다 갖추었다. 이제 그녀를 데려와 행복하게 살게 해 주고 싶었다.
“로이는 준비된 남자인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네.”
아리스는 그의 말이 좋았다. 아리스로 빙의되기 전에 그녀도 돈 때문에 힘들었던 적이 많았다. 빚이 있던 것은 아니지만 힘들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았다. 빚을 다 갚은 로이가 대단해 보였다. 그는 무엇을 해도 잘 할 사람인 것 같았다.
춤이 멈추었다. 그녀는 로이의 양팔을 잡고 잠시 기대었다.
“로이.”
“네.”
“절 따라오세요.”
아리스가 로이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무도회장을 나왔다. 그녀가 그를 데리고 간 곳은 아름다운 꽃이 핀 봄의 정원이었다.
밖은 겨울 날씨인데 여기는 봄처럼 훈훈했다. 살랑살랑 불어온 바람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여긴 언제와도 아름답군요.”
로이는 경치에 감탄했다. 그들 말고도 다른 연인들이 봄의 정원에 와 있었다. 오늘은 특별히 신년회이기에 봄의 정원이 개방되어 있었다. 신년회에 참석한 이들이 봄의 정원에 놀러 오기도 했다.
“로이, 이쪽이에요.”
아리스가 봄의 정원을 구경하던 그를 불렀다. 그녀가 자리 잡은 곳은 프레시안 꽃나무 아래였다. 꽃나무 아래로 꽃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여기서 차를 주로 마셔요.”
“아아.”
“로이도 참석해도 된대요.”
“티타임에 말입니까?”
“네.”
오늘 모두에게 로이를 소개해 주었지만 티타임에서 그를 다시 한 번 제대로 소개해 주고 싶었다.
“가 보고 싶군요.”
아리스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고 싶다. 그녀가 편지로 적은 일상을 자신도 겪어 보고 싶었다.
“정말요?”
아리스가 환하게 웃었다.
“다음에 같이 가요.”
“알겠습니다.”
“로이가 영지로 내려가야 하니, 빨리 열어 달라고 말씀드려야겠어요.”
영지로 내려가서 정리할 일이 많았다. 백작이 하는 일은 해 본 적이 없지만 그렇다고 두려움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곳에는 이미 유능한 직원들이 있다고 한다. 그 직원들을 잘 통솔하면 될 것이다. 더윈의 자리도 마련해 주고 말이다.
“로이는 잘할 거예요.”
“아리스.”
“좋은 백작이 될 거예요.”
아리스는 방긋 웃었다. 책에서 읽었다. 로이는 군인으로서도 유능하지만 백작으로서도 나쁘지 않게 영지를 관리했었다. 그 땅은 본래 황제가 가진 땅으로서 그곳을 대대로 관리하는 사람들이 유능하다고 들었다. 그들이 로이를 진심으로 섬겼기에 별다른 잡음이 없었다고 적혀 있었다.
“곤란하면 아버지께 도와 달라고 하세요.”
아리스의 말에 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생각입니다.”
이안은 오랫동안 영지를 관리했다. 나름의 노하우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로이가 아리스가 앉은 자리에 앉았다.
“여기서 차를 마시면 기분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차가 없는 게 아쉬웠다.
“로이.”
그녀가 의자에 앉은 로이에게 다가갔다. 로이가 시선을 올렸다.
“나랑 결혼해 주세요.”
그렇게 말한 그녀가 그의 손을 잡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드레스가 바닥에 닿았다.
“아리스!”
로이가 깜짝 놀랐다. 자신이 해야 할 프러포즈를 그녀가 직접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혼하면 행복하게 해 줄게요.”
아리스가 미소를 지었다. 흩날리는 꽃잎 아래 그녀가 예쁘게 그에게 프러포즈를 하고 있었다. 반지는 없지만 말이다.
“반지는 로이가 준비해야 하니까.”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프러포즈는 내가 하는 거예요.”
생각지도 못한 이벤트였다. 이벤트를 준비한다고 하더니 이런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답은요?”
아리스가 물었다.
“행복하게 해 준다고 했는데, 어떻게 해 줄 겁니까?”
로이가 물었다.
“로이를 위해 매일 웃어 주고.”
아리스는 신이 났다.
“로이의 말을 들어 주고.”
“그리고요.”
“내가 원하는 걸 그때그때 말하고.”
오해가 쌓이지 않으려면 대화를 자주 해야 한다. 아리스의 말에 로이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좋은 방법입니다.”
그가 바라는 건 지금처럼 아리스와 다정하게 이야기하고, 그녀가 방긋방긋 웃어 주는 게 다였다. 하지만 그것을 하려면 두 사람 사이에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아리스가 조용히 말해 주었다. 그가 바라는 것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청혼을 받아들였다. 아리스는 로이의 품에 파고들었다.
“정말이죠?”
“네.”
“이제 정말로 결혼하는 거네요.”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최대한 빨리 준비하겠습니다.”
하지만 장애물이 있었다.
“후작께서는 반대하시겠지만.”
“아버지는 제가 설득할게요.”
아리스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