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뭘 선택하는 게 좋을까나.”
그저 최애에 이끌려 로그인했을 뿐, 나는 게임에 문외한이었다.
한마디로 뉴비라는 말씀.
‘선택지는 셋뿐인가?’
잠깐 망설이는데, 보일락 말락 반투명한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뭐지. 왠지 히든 느낌인데.”
호기심에 그 글자를 터치한 순간!
띠링.
신비한 알림음과 함께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헬 모드를 선택하셨습니다.
시작부터 헬 모드라니? 나 뉴비라니까.
“아니야.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으며 현실을 부정했다.
새로운 서버에 입장합니다.
“이보세요. 아니라니까요.”
그러나 시스템에 자비란 없었다.
한 번 한 결정은 무를 수 없는 모양이었다.
‘젠장….’
직접 게임을 해본 경험은 적어도 주워들은 건 좀 있었다.
예를 들면 이른바 ‘리셋 마라톤’이라는 것.
게임 초반에 원하는 캐릭터나 아이템이 나올 때까지 처음부터, ‘다시. 다시’를 연발하며 인내심을 키우는 그런 거 말이다.
“로그아웃은 어떻게 하지.”
말을 내뱉자마자 시스템 창이 떴다.
로그아웃을 추천하지 않습니다.
“왜?”
30분간 재접속이 불가하며 페널티가 발생합니다.
‘게임사의 농간인가?’
하긴 초반부터 좋은 상황으로 시작하면 캐쉬질에 인색해지겠지.
“이제 막 시작했는데….”
약간 망설였으나 곧 답을 내렸다.
‘30분이나 낭비할 순 없지.’
지금 이 순간, 바로 지금. 나는 게임이 하고 싶으니까. 그것도 아주 격렬하게.
그럼에도 페널티라는 말은 조금 신경 쓰였다.
“무슨 페널티가 있어?”
신체에 과부하가 걸릴 수 있습니다.
감각이 생생한 만큼 바로 연결을 해제하는 건 내 몸에 무리가 갈 수도 있다는 뜻 같았다.
여차하면 나중에 다시 시작해도 되겠지. 나는 소중하니까.
“게임을 시작하지.”
나는 직쏘의 명대사를 날리며 씨익 웃었다.
º º º
시스템은 똑똑했다. 머릿속으로 생각만 했을 뿐인데 알아서 척척, 게임이 진행되었다.
캐릭터를 생성합니다.
곧 따뜻한 흰빛이 전신을 휘감았다.
“오오… 신기해.”
입술이 절로 모이고 심장도 콩콩 뛰기 시작했다.
플레이어, 안 대리님의 캐릭터가 생성됐습니다.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이는데 아이콘 하나가 존재감을 뽐내듯 반짝였다.
“……?”
깜빡이는 아이콘에 손을 가져가자 여러 가지 창이 떠올랐다.
대다수는 회색빛의 자물쇠 표시가 되어 있었다. 아직 사용할 수 없는 기능 같았다.
나는 개방된 창을 살펴보았다.
스탯
손가락으로 건드릴 필요도 없었다.
시선을 주자 곧바로 창이 떠올랐다.
스탯 창을 여시겠습니까?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체력 18
지능 18
교양 18
매력 18
모럴 18
정신력 18
피로도 0
경험치 0
무려 18의 향연이었다.
심지어 일부 능력치는 0이었고.
“라이어 소프트의 정체는 욕쟁이 할멈인가.”
설마 하는 마음으로 세분화된 여러 스탯 창을 쭉 둘러봤지만, 공격력, 마력 등 다른 스탯 창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와… 스탯 쓰레기.”
뉴비인 내 눈에도 수치가 현저히 낮아 보였다.
‘그래서 헬 모드라는 건가.’
일단 간 좀 보고 리셋하기로 마음먹었다.
게임을 시작하시겠습니까?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XD
초록빛과 무지개색 간헐천이 이지러지며 약간의 울렁임과 어지럼증이 찾아왔다.
그러나 잠깐 몸이 휘청였을 뿐, 곧 편안해졌다.
º º º
“……!”
킁킁.
나는 콧구멍을 활짝 열어 공기를 흡입하다가 이내 입과 코를 봉쇄했다.
코를 찌르는 곰팡내, 제대로 마감 처리하지 않은 벽지며 허름한 가구가 눈에 들어왔다.
“허허….”
허탈한 웃음이 여과 없이 튀어나왔다.
‘갑자기 분위기 마구간….’
입고 있는 옷 또한 내부와 퍽 잘 어울렸다.
죄다 다른 천으로 기워진 누덕누덕한 드레스는 꾀죄죄하기까지 했다.
“어휴… 거지가 따로 없네.”
내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로맨스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처럼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공주님 대우를 받으며 꽃길만 걸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므로.
그나마 다행인 건, 여리여리한 백금발과 피폐한 잿빛 눈동자.
여배우 뺨치는 대단한 미모와 늘씬한 내 몸이었다.
미모 순위로 뺨을 칠 수 있다면 전 세계를 순회하다 손목과 팔꿈치가 나갈 것 같았다.
“후후.”
내 입에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거지는 맞는데 어마어마한 꽃거지니까.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그때 문밖에서 낯선 음성이 들렸다.
아가씨라고 부르는 걸 보니 내가 마구간지기는 아닌 것 같다.
마구간지기인데 내 이름이 ‘아가씨’라는 설정이 아니고서야.
“네…?”
나는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들어갈게요.”
내 대답을 들었는지 미모의 언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누구세요?”
“어머, 아가씨도 참. 농담도 잘 하신다니까.”
미모의 언니가 쿡쿡, 웃었다.
태도가 공손하면서 말투 또한 친근했다.
‘아! 이 느낌 뭔지 알겠다.’
가상현실 게임은 처음이지만 로맨스 판타지 소설은 좀 읽어본 나였다.
‘이 언니는 하녀 뭐 그런 비슷한 직업을 가지고 있겠지.’
에이프릴을 두른 단조로운 무늬의 드레스와 머리에 두른 두건이 신분을 추측케 해주었다.
그럼에도 내 옷보다는 상태가 좋아 보였다. 적어도 누덕누덕 기워진 부분은 없으니까.
‘어떻게 돌아가는 집구석이야? 아가씨보다 좋은 옷을 입고 있는 하녀라니.’
내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캐릭터 정보가 활성화됩니다.
회색의 사슬과 자물쇠가 파괴되고 색을 입은 창이 보였다.
캐릭터 정보
캐릭터 정보를 확인하시겠습니까?
‘응. 보여줘.’
곧 언니 가슴께로 탐나는 폰트가 떠올랐다.
하녀 마리아
‘이쁜 언니 이름이 마리아구나.’
이름 옆의 작은 아이콘으로 시선을 돌렸다.
상세 정보: 저택 안, 하나뿐인 내 편
‘설명이 이게 다야?’
다였다.
시스템 창은 묵언 시위라도 하는지 요지부동이었다.
마치, 게임에 집중하세요. 이런 느낌으로.
“아가씨. 식사하세요.”
마리아가 묽은 수프와 주먹 크기의 빵이 담긴 쟁반을 내 앞에 내밀었다.
“이게 뭐야?”
“어제부터 아무것도 못 드셨잖아요.”
“…내가?”
마리아의 눈가가 그렁그렁했다. 이쁜 언니가 글썽이니 좀 안쓰러웠다.
“잘 먹을게.”
배는 1도 고프지 않았지만 예쁜 언니의 성의를 봐서 숟가락을 들었다.
“음…!”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미각까지 현실적인 건 놀랍다.
그러나… 맛이 왜 이래?
“…변변치 않지만 그래도 좀 드세요.”
마리아 눈에도 이게 변변찮은 모양이었다.
“요리장이 남긴 감자껍질을 넣고 끓인 스튜예요.”
감자도 아니고 껍질을?
“그리고….”
“그리고?”
“아, 아니에요.”
그때였다.
콰콰쾅. 갑자기 지축 뒤집히는 소리가 났다.
‘마른하늘에 천둥이라니?’
나는 고개를 휙휙 돌려 창문을 찾았다.
그러나 하늘은 높고 푸를 뿐, 우중충하지 않았다.
‘뭐지?’
의아한 표정으로 시선을 원위치하자, 마리아의 얼굴이 노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리아…?”
손으로 뜯은 흔적이 뚜렷한 빵의 자태를 주시하며 물어봤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이거, 네 몫을 나눠 주는 거야?”
“서, 설마요. 저는 배 터지게 먹었어요.”
마리아가 홀쭉한 배를 문질렀고 다시 한번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쳤다.
‘당장 급한 사람은 내가 아닌 것 같은데?’
배를 곯아가며 내게 식사를 가져온 모양이었다.
감동의 쓰나미가 물결치며 나를 휘감았다.
“아가씨?”
내가 빵을 쪼개 건네자 마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다이어트 시작했거든.”
“언제부터요?”
“지금부터.”
“아가씨께서 다이어트가 왜 필요해요?”
마리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비아냥이 아닌, 정말 궁금해하는 눈빛이었다.
‘네 맘 다 이해해.’
내게 주어진 이 몸은 슬렌더 체형이었다.
목이며 팔다리가 길고 호리호리해 옷빨이 끝내줬다.
‘개이득.’
볼륨감 또한 충분하고.
“요즘 저탄 고지가 유행이잖아.”
물론 저탄수화물만 있을 뿐, 고지방은 없는 식단이었지만.
“…네?”
마리아에겐 생소한 단어인가 보다.
“아니야. 얼른 먹자.”
내 빵을 조금 더 떼 마리아의 입에 밀어 넣어주었다.
“헤헤.”
이쁜 마리아가 더 예쁘게 웃는다.
우물거리며 빵을 먹는 마리아를 보며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모럴이 5 상승했습니다.
º º º
간단히 세수를 마친 나는 허름한 거지꼴 그대로였다.
“이건 아니잖아.”
귀족 영애라면 화려한 드레스와 보석이 필수 장착 아이템 아니었나?
그때 연세가 좀 있어 보이는 언니가 등장했다.
“어머니?”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는데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두둥.
하녀장 쥬그테
‘아하….’
그런데 마리아와 달리 이름 옆에 상세 정보를 나타내는 아이콘 같은 건 붙어있지 않았다.
“옴마, 헬레나 아가씨. 아직까지 집에 계시면 어쩐대요?”
“…그럼?”
나는 눈을 끔뻑이며 쥬그테를 쳐다보았다.
‘혹시 내가 아카데미나 학술원 같은 곳에 다니는 설정인가?’
아니었다.
쥬그테가 어이가 없다는 듯 팔짱을 끼더니 한 마디 툭 내뱉었다.
“일하러 안 가세요?”
“…일?”
무슨 소리야, 나 아가씨 아니었어?
‘당장 내 정보가 될 만한 걸 보여줘.’
곧 프로필 창이 떠올랐다.
헬레나 빈텔테리
이게 내 이름인 모양이다.
‘이름 빈티나….’
빈텔테리 남작의 세 번째 딸
이로써 내 신분은 확실해졌다.
“그런데 내가 일을 해?”
귀족 영애가 무슨 일을 하냐고.
“네.”
…여기선 하는구나.
“왜?”
“허, 참… 헬레나 아가씨. 혹시 어제 뭐 잘못 드셨어요?”
쥬그테가 어이없다는 듯 눈을 희번덕 떴다.
보디랭귀지나 말투를 보건대, 쥬그테가 내게 호의를 갖고 있지 않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아. 어제 드신 게 없으시니, 그건 아닌가?”
“뭐…?”
모시는 아가씨가 굶었다는 걸 알면서도 쥬그테의 얼굴에는 한 톨의 걱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제 끼니를 포기하면서까지 내 식사를 챙겨준 마리아와는 비교조차 안 될 수준이었다.
“쥬그테, 혹시 황달 있는 거 아냐?”
누리끼리한 쥬그테의 흰자를 보며 물었다.
“네?”
생각이 얼굴로 드러나는 솔직한 타입인지, 쥬그테의 표정은 딱 이리 말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개소리예요?’
귀족과 평민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엄연한 신분제 사회에서 지금 쥬그테의 태도는 명백한 하극상이었다.
“쥬그테?”
“왜요.”
쥬그테가 팔짱을 끼며 되물었다.
“너 지금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생각했지?”
“어, 어떻게 아셨어요?”
“허….”
어이가 없어 입이 절로 벌어졌다.
당당할 거면 계속 당당하던가. 이건 또 무슨 신종 개그인가.
“네 표정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거든.”
“그럴 수도 있죠. 참, 별 시답잖은 걸로 핀잔이시라니까…. 헬레나 아가씨. 아랫사람에게 마음을 좀 곱게 쓰세요. 네?”
안면몰수에 이어 훈수까지?
순간 내가 하녀고 쥬그테가 귀족 영애인 줄 알았다.
‘내 프로필 다시 보여줘.’
빈텔테리 남작의 세 번째 딸
역시 이건 하극상이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