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미, 친….”
스카는 절로 튀어나오려는 욕을 간신히 삼키며 제 주군인 체스트의 안색을 살폈다.
유적에 도착한 두 사람의 눈 앞에 펼쳐진 건 활짝 열린 상태로 방치된 유적의 입구였다.
드래곤의 유적은 체스트가 관리한 이래 한 번도 털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부로 그 역사가 과거의 일이 되고 만 것이다.
“간덩이가 배 밖으로 튀어나온 게 아니고서야, 대체 누가 이런 짓을! 도굴꾼 짓일까요? 아니면….”
“그만. 누구 짓인지 속단하긴 일러, 확인부터 해봐야지.”
반듯한 미간을 살짝 찡그린 체스트가 저벅저벅 유적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돌계단을 내려가자마자 체스트와 스카가 보게 된 건 바닥에 널브러진 문지기였다.
스카는 기절한 문지기의 멱살을 쥐고 짤짤 흔들었다.
“야, 일어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스카는 도무지 일어날 생각이 없는 문지기의 양 뺨을 후려쳤다.
수 차례 쌍 싸대기를 얻어맞은 유적의 문지기가 게슴츠레 눈을 떴다.
“…스카 님?”
흐리멍텅한 문지기의 눈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왔다.
다음 순간, 문지기의 눈에 체스트가 들어왔다.
“커헉! 체, 체, 체스트 님?”
입에 고인 핏물을 뱉어낸 문지기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하….”
실소를 뱉은 체스트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그 표정을 본 문지기는 냉큼 돌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소, 송구합니다. 체스트 님….”
“내가 오기 전까지,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체스트가 빙긋 웃으며 물었지만 문지기의 등에선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문지기 직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체스트와 실제로 대면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분명 부드러운 목소리임에도 체스트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이 어마어마했다.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유적을 지키지 못한 제 죄를….”
유적의 문지기가 다시 한번 바닥에 머리를 찧으려 했으나 커다란 손에 가로막혔다.
문지기가 고개를 든 순간 체스트와 눈이 마주쳤다.
“…체스트 님?”
“내가 뭘 물어봤었는지. 벌써 잊은 건 아니죠?”
체스트의 금안이 낮게 가라앉은 걸 확인한 문지기의 몸이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최측근인 스카도 긴장 탄 기색이 역력했다.
체스트 스프링은 무자비하다는 소문이 자자했으니까.
문지기는 연신 마른침을 삼키며 기절하기 직전까지의 상황을 더듬더듬 설명했다.
“치, 침입자가 있었습니다. 이, 인간이었는데. 상당한 실력자였습니다….”
제 사리사욕을 채우려 유적에 발을 들인 순간 처단하지 않았다는 말은 쏙 뺐다.
물리 공격도 아니고 정신 공격에 당했다는 말도 뺐다.
“그럼 들어오는 것만 봤다는 거군요?”
“예, 예. 그렇습니다. 이,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그 인간 여자… 엄청 강했습니다. 채찍을 휘두르면서 심한 말을 막 서슴없이….”
문지기가 두서없이 말을 쏟아내자 체스트가 물었다.
“결국 유적에서 나가는 건 못 봤다는 말인가요?”
“그, 그렇습니다. 제가 기절해버리는 바람에….”
문지기는 뒷말을 마저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럼 아직 유적 안을 헤매고 다닐 가능성도 있겠군요…. 스카, 유적 안을 수색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전에 이 녀석은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스카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문지기의 처형 여부를 물었다.
“글쎄.”
체스트가 빙긋 웃자 스카가 언성을 조금 높여 반문했다.
“예? 설마 이 녀석을 살려 주시려는 건 아니시죠?”
순간 면죄부라도 받은 듯 문지기의 얼굴에 희열의 빛이 감돌았으나, 이어진 체스트의 말에 다시 사색이 되고 말았다.
“600년간, 재능 기부 정도면 괜찮을 것 같은데.”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체스트의 말을 듣자마자 스카가 반색했다.
방금 체스트가 말한 재능 기부란, 살아서 노예처럼 봉사하란 뜻이었다. 그것도 600년 동안이나.
“체스트 님. 차라리 주, 죽여주십시오!”
문지기가 눈물로 호소했다.
“죽음으로 죄를 면한다라….”
체스트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그건 벌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 벌을 정하는 게 어디 있어요.”
“잘 들었지? 너를 그냥 죽여 버리면 네가 싼 똥은 누가 치우냔 말이야. 뒤처리도 네가 해야지.”
체스트의 말에 동의한 스카가 문지기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근데 너, 수명이 얼마나 되냐?”
“2, 200년이 안 됩니다. 그건 왜 물으십니까?”
문지기의 대답에 스카가 다른 손으로 등짝 스매싱을 날리며 킥킥 웃었다.
“축하해! 그럼, 네 녀석의 아들과 손자 정도면 빚을 다 갚을 수 있겠다.”
“흑….”
문지기의 훌쩍거림과 스카의 웃음소리가 차츰 멀어져갔다.
그때,
“저어….”
유적 한 귀퉁이에서 잔뜩 주눅이 든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무슨 일이죠?”
체스트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 초록 괴물이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제가, 제가 봤습니다. 그 인간 여자가 어디로 갔는지를요.”
“좋아요. 50년은 감해 줄 테니, 자세히 말해 보세요.”
체스트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º º º
“음. 뭔가 이상한데?”
드래곤의 유적을 벗어난 지 한참 지나서야 불쑥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 허접한 창고지기가 최종보스는 아니었을 테고….’
나머지 12개의 창고 중에 최종보스가 있었던 걸까? 나는 운 좋게도 약한 몬스터를 만나 쉽게 보물 창고를 열게 된 거고 말이야.
‘아니면, 설마…?’
해츨링이 드래곤 유적의 최종보스였다. 이런 전개는 아니겠지?
나는 미심쩍은 눈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뒤에서 해츨링이 내 그림자를 밟으며 아장아장 따라오고 있었다.
마치 엄마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는 댕댕이처럼.
“……!”
갑작스런 내 행동에 놀란 건지 해츨링이 사슴 같은 눈망울로 움찔 몸을 떨었다.
“아, 미안. 혹시 내가 놀라게 했니?”
내 물음에 해츨링이 눈을 댕그랗게 뜨고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방금 전 생각은 기각.’
이렇게 예쁜 아가가 최종보스일 리 없지.
“근데 말이야. 혹시 나 쫓아오는 거야?”
“앙…?”
[번역: “누, 누가…? 누, 누구를 따라간다 그래요.”]
순진한 얼굴이었지만 세모로 삐죽 튀어나온 입술이 어쩐지 새초롬하게 보였다.
“앙!”
[번역: “우, 우연히 가는 길이 겹쳤을 뿐이에요!”]
붉게 달아오른 해츨링의 뺨이 탐스럽게 부풀었다.
‘아우. 귀여워라.’
저 볼탱이 죽, 잡아당겨 보고 싶다. 아니면 손가락으로 쿡 찔러보거나.
“그럼 어디 가는데?”
“앙….”
[번역: “그게….”]
해츨링이 당황한 듯 고사리손을 꼼지락거리며 금안을 떼구루루 굴렸다.
‘귀여워….’
입에 넣고 와랄랄라 하고 싶다.
나는 불쑥 올라오는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해츨링을 덥석 안아 올렸다.
아기용을 길들였습니다. 이런 타이틀이 붙지 않으려나.
하지만 시스템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한편, 해츨링은 몹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이분이… 내 엄마?’
곰 인형처럼 헬레나의 품에 꼭 안긴 상태로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열심히 굴려봤지만, 도저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엄마로 보이는 헬레나와 자신의 모습이 너무 다르다는 거였다.
물론 지금은 비슷한 모양새가 되긴 했다.
비록 자신의 팔다리가 헬레나에 비해 상당히 짧기는 해도.
‘하지만 그건 내가 엄마를 닮으려고 모습을 바꿨기 때문인데….’
왜 엄마랑 나랑은 서로 닮지 않은 걸까?
그러나 고민의 시간은 짧았다. 깨어있으려 해도 자꾸만 눈꺼풀이 내려왔다.
해츨링은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따스한 체온에 편안함을 느끼며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아, 귀여워. 미치겠네….’
은백색의 작은 머리통이 품 안에서 살살 흔들렸다.
나는 또 속으로만 새된 비명을 질러야 했다.
‘이거 키잡물인가.’
시스템은 침묵했고 나는 좋을 대로 해석했다.
키워서 잡아먹는 시스템을 도입하다니….
‘겁나 좋군.’
급격한 행복감이 차올라 양 엄지를 치켜세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행복 회로는 오래 돌릴 게 못 되었다.
나는 곧 번민에 휩싸였다.
‘일반 아기보다 드래곤의 성장 속도가 훨씬 빠르겠지?’
그렇지 않으면 큰일이었다.
사람과 같은 성장 속도라면 내가 불혹은 되어야 해츨링이 성인이 된다는 말이니.
“흐음….”
나는 낮은 신음을 흘리며 혹여 달아날까, 품 안의 해츨링을 꼭 끌어안았다.
안정감을 주는 체온이 기분 좋았을까? 해츨링의 무거운 눈꺼풀이 사르륵 닫혔다.
º º º
마리아가 기다리는 안락한 저택으로 귀환하기 위해 필드를 걷던 중이었다.
움막이라 착각할 만큼 누추하지만, 어찌 보면 사람이 살 수도 있겠다 싶은 곳을 발견했다.
“저기요…. 계세요?”
그냥 한 번 불러봤다.
“…누구냐, 넌?”
뜻밖에 대답이 돌아왔다.
움막 틈 사이로 빼꼼히 얼굴을 내민 사내가 길게 늘어뜨린 수염을 쓰다듬고 있었다.
약간 과대포장하면 속세를 떠난 도인처럼 인자한 관상이었다.
“저는 지나가는 행인 1이에요.”
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검지를 들어 올렸다.
저 수상한 사람 아닙니다.
내 얼굴을 힐끔 본 사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이런 외진 곳에… 혼자 왔니?”
긴 생머리에 저 대사까지 하니 잠시 유명 롹커가 뇌리를 스쳐지나 갔다.
‘근데, 저 사람은 왜 내가 혼자 왔다고 생각하는 걸까?’
해츨링은 꼼짝달싹하지 않고 내 품에 안겨 있었다.
‘내 품에 안긴 해츨링을 인형이라 착각한 건가?’
그럴 수 있지. 이렇게 예쁘니까.
“네 뭐, 그런 셈이죠. 그런데 아저씨는 여기 사시는 거예요?”
“뭐, 나도 그런 셈이다.”
사내가 내 말을 따라 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여기 산다는 건지 만다는 건지, 애매한 표현이었다.
‘나는 자연인이다’ 이런 설정인가.
“이런 곳에서 혼자 살면 적적하지 않으세요?”
사내가 신령처럼 기른 긴 수염을 쓸어내리며 대꾸했다.
“나는 대자연을 느끼는 중이다. 심심할 겨를이 없지.”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현대인들에게 힐링과 참된 행복의 의미를 전하던 그 방송처럼, 사내는 자연을 만끽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혹시?’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눈을 번쩍 떴다.
자연인은 출연진에게 자연에서 채취한 식재료로 만든 ‘美味’한 요리를 대접하지 않던가!
나는 그걸 볼 때마다 입에 침이 고였었고.
‘어쩌면,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사내가 불쑥 물었다.
“그래. 너는 무슨 일로 여기까지 굴러온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