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대공의 행동에 의문을 품다 이내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마리아는 이전에도 귀족가에서 일한 경험은 있으나 고위 귀족들의 생활상은 잘 몰랐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반면 어텀 대공은 황족에 버금가는 신분이니 귀족들의 생활상을 잘 알 듯 싶었다.
“대공 전하. 일단은 옆에 계시니 뭐 좀 물어볼게요.”
“일단은?”
어텀 대공이 눈동자만 굴려 나를 힐끔 쳐다본다.
일단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보였으나 나는 내 할 말만 하기로 했다.
“상대가 누군지 모를 때, 어떤 선물을 하는 게 가장 무난할까요? 상대는 아마도 고위 귀족일 거라 생각해요.”
“모르는 사람에게 선물은 왜 하지?”
어텀 대공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 왜, 친해지고 싶은 것까지는 아니어도… 뭐랄까. 일종의 예의 같은 걸 차리고 싶다고나 할까요.”
이사 왔으니 옆집에 떡 돌린다고 말하는 게 빠를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없는 문화에 대해 떠들어 봤자 내 입만 아플 테니 빙빙 돌려 말할 수밖에 없었다.
“흠… 청탁을 위한 뇌물을 말하는 건가?”
“…….”
기가 차서 말문이 막혔다.
어텀 대공은 내 작은 성의를,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걸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사고 회로가 나와는 다른 사람인가 보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어텀 대공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신상템 돌려줘.
“무거울 텐데, 혼자 들 수 있겠나?”
대공은 기사도를 발휘하려 내 짐을 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대공의 배려와는 별개로 나는 담보 잡힌 기분이었다.
‘그냥 아이템 창에 넣어버리면 그만인 것을.’
그때 화려한 장식에 날렵한 재규어 문양이 박힌 마차가 내 앞에서 멈춰 섰다.
‘백마 탄 왕자님 컨셉이야?’
백마 네 필이 몰고 있는 걸 보니 고위 귀족의 마차 같았다.
그런데,
‘어?’
마차 문이 열리고 미청년이 내리더니 대공에게 예를 취한다.
“대공 전하. 여기 계셨습니까.”
“…폴른, 무슨 일이지?”
“외출 중에 죄송합니다만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러면서 미청년이 대공에게 귀엣말을 건넸다.
“알겠다. 이만 돌아가지.”
고개를 끄덕인 어텀 대공이 날 힐끔 돌아보더니 마차 쪽으로 턱짓했다.
“저더러 마차에 타라고요?”
“아직 더 살 물건이라도 있나?”
딱히 그런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내 직감이 말했다. 저 마차를 타지 말라고.
“그럼요. 이제 시작인 걸요.”
“그렇군….”
어텀 대공이 자안만 굴려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더는 따져 묻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 물건 주세요.”
나는 다시 대공 쪽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건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어텀 대공이 내 신상템들을 자신의 마차 안으로 밀어 넣어버렸으니까.
“대공 전하…?”
“이 물건들은 영애의 저택으로 보내도록 하지.”
제멋대로 결정을 내린 어텀 대공이 재빨리 마차에 올랐다.
“네?”
저기요? 대공 전하?
당황한 나는 급히 마차를 세우려 했다.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어디서 전쟁이라도 일어난 건지 마차는 총알택시처럼 사라졌다.
“…….”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나는 연신 눈을 끔뻑였다.
눈뜨고 신상템을 강탈당했다.
급작스러운 상황에 잠시 멍했으나 곧 분노가 치밀었다.
‘하…, 승질나네?’
스트레스가 18 상승합니다.
어김없이 시스템 창이 요동쳤다.
나는 팔짱을 끼고 잠시 심호흡을 했다.
‘그래. 대공씩이나 되는 사람이 그깟 아이템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탐내겠어.’
그런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등 뒤에서 기이한 시선이 느껴졌다.
‘……?’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뜻밖의 생명체와 눈이 마주쳤다.
가게 간판에 거꾸로 매달린 박쥐였다.
‘희한하네.’
도심에서 흔히 닭둘기를 볼 수 있듯이, 여공남수의 세계에선 박쥐를 흔히 볼 수 있는 것일까.
그런데 어쩐지 감시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설마, 내 착각이겠지….
º º º
터덜터덜 마차로 돌아가는 길에 유리창 너머로 진열된 물건에 시선이 꽂혔다.
‘오, 이거 예쁘다. 장식품인가?’
손바닥 반절만 한 크기였으나 매우 반짝이고 고급스러웠다.
그걸 보는 순간 딱 촉이 왔다.
‘이사 선물은 너로 정했다!’
고급지게 선물 포장을 하고, 아이템 창에 넣은 뒤 막 마차에 오르려던 참이었다.
“거기, 아가씨! 잠깐만 나 좀 봐.”
걸걸한 목소리에 나는 주변을 살폈다.
목소리의 주인은 골목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노파였다.
노파는 수정구 위에 손을 올린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저요?”
“그래, 으음. 기운이 아주 좋아. 영혼도 맑고 말이야. 그런데….”
노파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느 순간 눈을 번쩍 떴다.
“이런! 한 가지 문제가 있군!”
아, 깜짝이야.
뭐지? 여기도 도를 아십니까 이런 게 있나.
노파는 떨떠름한 내 반응엔 아랑곳하지 않고 한껏 미간을 모았다.
“최근에 꿈을 꿨을 거야. 그렇지?”
꿈은 누구나 꾸잖아.
그런데 갑자기 저런 말을 내게 하는 이유는… 혹시 콜드 리딩인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만한 고민 중 한 가지를 건드리면 ‘그래. 이건, 내 얘기야!’하고 믿게 되는 그런 종류 말이다.
역시나 점쟁이 아니면 사기꾼, 둘 중의 하나라 생각하며 다시 마차를 타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들려온 노파의 한마디가 내 발목을 붙잡았다.
“행운의 여신에게 가호를 받는다라, 이거 아주 드문 경우인데.”
“…네?”
이건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언제부턴가 나한테 재복이 터지기 시작했으니까.
“우호호. 이제야 내 이야기를 들어볼 마음이 들었나 보오.”
노파가 걸걸한 목소리로 요상한 웃음소리를 냈다.
“지금 내 정체를 궁금해 하는 모양인데, 그렇지?”
노파의 물음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노파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점성술사라네.”
“점술가. 뭐 그런 건가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점성술사가 말했다.
“최근에 생면부지의 남자가 꿈에 나왔을 거야. 그렇지?”
그 말도 맞다.
처음 보는 초미남이 등장하는 야한 꿈을 꾼 적이 있었으니까.
‘의외로 용한 사람인가.’
어쩐지 점성술사의 말에 빠져들 것 같았지만 겉으로 티내지 않으며 여상히 물었다.
“왜 제게 그런 말을 하시는 거죠?”
“아가씨에게 악마가 붙었어!”
이제는 뜬금없이 저주까지 퍼붓는다.
“…….”
나는 팔짱을 끼고 점성술사를 관찰하듯 훑었다.
점성술사가 입은 옷은 거적때기였다.
그러나 팔에 두른 장신구나 귀걸이는 평민이 쉽게 가질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알겠다.’
나는 금방 상황 파악을 끝냈다.
내 차림새를 보면 누구나 부유한 귀족이라는 걸 금방 눈치챌 것이다.
점성술사는 아마 악마를 쫓아주겠다며 내게 루비를 요구하려 들 것이다.
“안 사요.”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런데 점성술사가 다시 요상한 웃음소리를 냈다.
“우호호. 그거 아주 진귀한 물건인데.”
점성술사가 장신구를 찬 내 손목을 가리켰다.
“…….”
이 세계에선 그저 값비싼 장신구로 보일 테지만 이건 게임에 접속하기 위한 기기였다.
“우호호호…. 그 꿈을 꾸고 왠지 모르게 기분이 언짢고 몸이 무거웠을 거야, 그렇지?”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하려는 말이 뭔가요?”
“그대로 둬서는 안 돼! 꿈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º º º
쇼핑을 마치고나니 내 아이템 창에 새로 들어온 건 마지막에 구매한 선물, 딱 하나였다.
‘내 신상템….’
자연스레 내 물건을 강탈해간 어텀 대공이 떠올랐다.
바람 같이 나타나서 바람 같이 사라진 바람 같은 사람 같으니라고.
내가 두 주먹을 부들거리며 집안으로 들어가자 마리아가 나를 반겼다.
“아가씨 어서 오세요.”
“마리아.”
나는 쓴 눈물을 삼키며 마리아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가씨 어디 다녀오셨어요?”
“쇼핑.”
“뭘… 사셨어요?”
마리아가 내 빈손을 보며 큰 눈을 깜빡였다.
“그게 말이지?”
나는 오늘 있었던 일을 마리아에게 간략히 말해주었다.
“와! 대공 전하께서 아가씨에게 관심을 가지신 걸까요? 저번에는 집사님을 보내셨잖아요.”
아, 맞네. 그런 일이 있었지.
‘어텀 대공의 호감도 좀 보여줘.’
데쏠레이: 파란색
여전히 파란 하트였다.
그런데 왜인지 호감도가 조금 커진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정말이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를 사람이란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옆집에 보낼 선물이 떠올랐다.
나는 고급스럽게 포장된 상자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마리아 옆 저택에 이걸 좀 갖다 주고 올래?”
“이게 뭔데요?”
“이사 선물.”
“아… 전에 말씀하셨던 거구나. 네. 알겠어요. 그런데 오늘 아기님이 말이죠….”
마리아의 낭랑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안락한 응접실로 들어갔다.
º º º
마리아는 작은 상자를 안고 저택을 나섰다.
선물을 전해줄 곳이 바로 옆 저택이라고는 해도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숨이 가빠질 무렵 마침내 화려한 저택이 가까워졌다.
“와….”
동화 속에나 등장할 법한 으리으리한 정원의 풍경에 탄성이 절로 새어나왔다.
“우리 저택에도 꽃을 심으면 좋을 것 같은데….”
저택 한가득, 흐드러지게 피어난 붉은 꽃을 보며 마리아가 중얼거릴 때였다.
“무슨 일이냐?”
조금 전까지 아무도 없던 저택 입구에 기골이 장대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저는 저 옆 저택에 이사 오신 귀족가의 하녀입니다.”
“…그런데?”
사내가 마리아를 훑어보며 그게 어쨌다는 거냐는 표정을 지었다.
“저희 아가씨께서 이 저택에 사시는 귀족 분께 선물을 보내셨거든요.”
마리아는 빙긋 웃으며 선물을 들어 올렸다.
“대… 대체 이곳에 어떤 분이 사시는 줄 알고?”
“그러게요. 이 저택에 어떤 분이 살고 계시는지 물어도 아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마리아의 말에 사내가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치켜세웠다.
“이곳에 사시는 대단한 분의 존함은 알아서 뭐하려고?”
역시 대귀족께서 살고 계시는 구나.
“이제 이웃이 되었으니 환영 선물을 보내신다고 하셨거든요. 저희 아가씨께서 워낙 마음 씀씀이가 세심하고 고우신 분이시라….”
마리아는 제 주인을 향한 애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보였다.
마리아가 끊임없이 주인을 찬양하자 사내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만, 그만. 되었다. 선물을 주고 그만 돌아가거라.”
“네. 그럼 잘 전달해 주세요.”
헬레나의 명을 충실이 이행한 마리아는 저택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