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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34)화 (34/166)

<34화>

고트 백작은 처음 편지를 받았던 때를 떠올렸다.

편지 내용이 음란하기 짝이 없어 더할 나위 없이 흡족했다.

한껏 달아오른 기분으로 바로 답장을 썼고 그 편지에 대한 답장이 금방 돌아왔다.

자신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나는 편지였다.

그렇게 음란한 편지를 주고받다가 고트 백작은 상대에게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그래서 만사를 제쳐놓고 수도로 향했다.

실제로 본 헬레나는 상상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러나 제 턱에 검을 들이대는 여자와 어떻게 안심하고 침실에 들겠는가?

고트 백작은 순종적인 여성을 선호했고, 자신의 영지로 데려가면 그렇게 만들 자신도 있었다. 이전에도 그러했듯이.

고트 백작이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손님이 오셨어요.”

“누군데?”

“체스트 님이요.”

“…….”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체스트는 내게 동거를 제안한 뒤,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쩌면 이럴 운명이었을지도 모르겠네.’

운명론을 들먹이며 나는 미뤄두었던 결정을 확고히 했다.

“들어오시라고 해.”

말을 맺기 무섭게 듣기 좋은 저음이 응접실을 메웠다.

“오랜만이네요. 헬레나. 잘 지냈어요?”

체스트가 싱그러운 미소로 내게 인사했다.

고트 백작 때문에 오염되었던 눈과 불쾌감이 한순간에 정화되었다.

“고트 백작님, 따로 묻지 않아서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얼른 체스트의 곁으로 다가가 친한 척 팔짱을 꼈다.

“저, 이 분과 함께 살아요.”

그러고는 배시시 웃으며 체스트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

체스트의 금안이 크게 흔들렸다.

갑작스럽고도 친근한 헬레나의 신체 접촉에 한 번, 자신을 보며 눈을 찡긋하는 모습에 두 번 놀랐다.

체스트는 빠르게 응접실 안에 흐르는 공기를 읽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헬레나가 자신의 제안에 동의하는 이유가 눈앞의 인간 때문인 건 조금 불쾌했지만….

“그랬죠. 여기가 저와 헬레나가 사는 집이죠.”

체스트의 표정이 빠르게 갈무리되었다.

뒤이어 평범한 인간이 보면 눈이 멀어버릴 듯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체스트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내 뺨에 손을 얹었다.

농밀한 스킨십이 이어질 듯, 묘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할 때였다.

“이, 이런… 이렇게 음란할 수가!”

고트 백작이 기함할 듯이 놀라며 소리쳤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영애가 도, 동거라니. 사교계에 돌 추문이 두렵지 않은 게요?”

분노를 이기지 못한 고트 백작이 뒷목을 붙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때.

“앙.”

[번역: “헬레나.”]

삼등신의 귀요미가 뽀르르르 응접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빙판 위의 요정처럼 매끄러운 다리 놀림과 귀여운 표정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앙.”

[번역: “안아주세요.”]

해츨링이 허공에 손을 들어 올리며 나와 시선을 맞췄다.

은백색의 작은 머리통과 보석 같은 금안의 아기는 누가 보아도 체스트와 판에 박은 듯 닮아 있었다.

자연스럽게 해츨링을 안아 든 나는 눈으로 말했다.

‘봤나? 고트 백작.’

순간 고트 백작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내 의도대로 단단히 오해한 것 같았다.

“내 참… 이만 돌아가겠네. 남편과 아이까지 있는 여자를 나와 혼인시키려 했다니.”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고트 백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꼴이 조금 우스워 보였다.

자신도 아이와 정부를 뒀으면서 새로 들이려는 부인은 정숙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나가시는 문은 저쪽이에요. 고트 백작님.”

나는 긴 설명 대신 축객령을 내렸다. 그리고 해츨링의 보들보들하고 말랑한 뺨에 쪽 뽀뽀한 뒤 해사하게 웃었다.

누가 봐도 우리 세 사람은 화기애애한 가족처럼 보였으리라.

º º º

“빌어먹을, 감히 내 뒤통수를 쳐? 아오, 열 받아!”

빈텔테리 남작가로 향하는 내내 고트 백작은 뒷목을 잡고 씨근덕거렸다.

그리고 남작가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저택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빈텔테리 남작 부인! 나와 보시오.”

노기등등한 호통소리가 2층까지 울려 퍼졌다.

“이게 무슨 소리야? 가서 무슨 일인지 확인 좀 해보렴.”

“네. 아가씨.”

아나스타시아의 말에 냉큼 1층으로 내려가던 하녀가 쥬그테와 맞닥뜨렸다.

“이게 웬 소란이냐?”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나스타시아 아가씨께서 확인해 보라고 하셔서 내려가보던 중이었거든요.”

그때 저택 입구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트 백작님. 약속도 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막무가내로 들이닥치시면….”

집사 패도로가 고트 백작을 만류하는 소리였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평민인 패도로가 귀족인 고트 백작의 몸에 손을 대었다가는 귀족 모독죄로 투옥될 수도 있었으니.

“비키게. 지금 당장 빈텔테리 남작 부인을 봐야겠으니.”

한층 험악해진 얼굴로 고트 백작이 엄포를 놓았다.

“왜 이리 소란스러운 거야?”

때마침 편한 드레스 위에 숄만 걸친 차림새의 남작 부인이 등판했다.

빈텔테리 남작 부인은 막 저택 안으로 들어서는 고트 백작을 보고 찌푸려진 미간을 풀었다.

“어머. 고트 백작님? 혹시 오늘 저와 만나기로 약속을 했었던가요?”

남작 부인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고트 백작과의 약속을 떠올리려 애썼다.

“누가 내게 거짓을 고했는지 그 범인을 찾아야겠소!”

고트 백작이 남작 부인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택 입구에서부터 이어진 고함 소리에 고트 백작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뒤집어져 나왔다.

“거짓말이라니요?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도통 모르겠네요.”

영문을 몰라 빈텔테리 남작 부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남작 부인! 사람을 바보로 만들 작정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소?”

“고트 백작님.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제가 백작님을 바보로 만들었다니….”

“이제 와서 발뺌할 생각은 마시오. 남작 부인, 내게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거요?”

“대체… 무슨 연유로 심기가 불편하신 건지 모르겠지만, 다짜고짜 소리치지만 마시고 왜 이러는지 속 시원하게 말씀 좀 해보세요.”

그 말에 고트 백작이 두 손가락으로 부릅뜬 자신의 눈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왔소. 몰랐다고 발뺌할 생각은 마시오. 남작 부인. 헬레나에게 남편과 아이가 있더군?”

“……!”

빈텔테리 남작 부인은 너무 놀라 당황한 속내를 감추려 얼른 시선을 떨어뜨렸다.

고트 백작이 직접 헬레나를 찾아갈 거라고는 예상치 못한 까닭이었다.

“백작님께서 뭔가, 오해를 하신….”

“오해는 무슨! 또다시 나를 기만할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남작 부인은 위기를 직감했다.

‘이걸 어쩌지….’

헬레나가 이 결혼을 반대하는 건 괜찮았다.

결혼식장에만 들어가게 하면 그만이니.

헬레나가 검을 들고 난동을 피운다 해도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헬레나에게 이미 남편과 아이가 있고, 고트 백작 쪽에서 결혼을 깨려 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뭐… 백작님께서도 자식을 여럿 두신 걸로 알아요. 거기다 이번이 네 번째 혼인이시죠?”

일이 틀어질 기미가 보이자 빈텔테리 남작 부인은 곧바로 본색을 드러냈다.

“세 명의 부인 모두 단명하셨다 들었는데 말이죠.”

“흥,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판명이 난 일이오.”

사근사근하게 굴던 빈텔테리 남작 부인이 태도를 바꾸자 고트 백작도 더 이상 참지 않았다.

“남작 부인, 이제 와서 옛일을 들추는 이유가 뭐요? 협박이라도 할 셈이요?”

“어머나, 협박이라니요. 말씀도 참 무섭게 하시네요. 저는 그저, 헬레나에게만 약간의 결함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통에 조금 속상해서 말이죠.”

“이제 와서?”

고트 백작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흘렀다.

빈텔테리 남작이 손대는 사업마다 족족 망한다는 소문은 고트 백작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 편지를 보낸 상대가 빈텔테리 남작가의 영애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다른 몰락 귀족가들처럼 제 재산을 노리고 딸을 팔아치우려는 속셈이 아닐까 의심했었다.

하지만 편지 내용을 보니 자신을 연모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철석같이 믿었는데, 모두 거짓이었다니.

배신감에 휩싸인 고트 백작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듣자하니 미리 보낸 지참금도 전부 사용하고 빚까지 얻은 모양이더군.”

“지금 금전적인 부분에 대해 논하러 오신 건 아니잖아요?”

“날 속인 건 사실이잖소. 이 결혼은….”

한마디 더 쏘아붙이려던 고트 백작의 눈에 문득, 초상화가 들어왔다.

순간 고트 백작의 머릿속이 환해졌다.

「빈텔테리 남작가에는 아직 혼인도, 혼약도 하지 않은 영애가 두 명이나 있죠. 그리고 매력적인 귀부인도 있고요.」

헬레나가 했던 말이 떠오른 것이다.

“그렇지. 일을 어렵게 만들 필요는 없지. 헬레나 이름으로 편지를 쓴 사람을 내 아내로 맞이하겠소.”

“네에? 지금 그, 그 말씀은….”

“사교계에 이미 빈텔테리 남작 영애와 혼인을 하는 것으로 소문이 났으니 굳이 헬레나 영애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뜻이오.”

테이블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들이킨 고트 백작이 엄포를 하듯 말했다.

“내 말뜻 알아듣겠지, 남작 부인? 내 요구대로 하지 않으면 재판부에 소송을 넣을 것이오. 혼인 빙자 사기죄로.”

“…….”

빈텔테리 남작 부인은 창백한 얼굴로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º º º

고트 백작이 떠난 저택에는 다시금 평화가 찾아왔다.

스튜어드가 준비한 향긋한 차와 요리장이 만든 크렘 브륄레의 달콤한 냄새만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내 권유에 잠시 차와 디저트를 즐기던 체스트가 지나가듯 물었다.

“조금 전 일에 대해 말해 줄 수 있어요?”

체스트의 조심스런 질문에 나는 가감 없이 상황을 설명했다.

고트 백작의 편지에서부터 시작해서 조금 전의 방문까지.

“…그랬었군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자신을 이용했다며 기분 나빠할 법도 한데 체스트는 무덤덤했다.

아니, 되레 기분이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

‘역시, 남자의 미모와 인성은 정비례하는 건가.’

내 믿음에 확신을 주는 체스트의 얼굴을 힐끔거리는데 가슴을 몽글몽글하게 만드는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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