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검 실력만 믿고 당차게 모험 길에 올랐고 장렬히 전사했었다. 드래곤의 기습을 받아서.
마력의 경우라고 다르지 않을 거 같은데.
“마법 쪽에도 방어에 해당할 만한 게…. 그래, 항마력!”
나는 곧장 항마력을 올리기로 했다.
“교육.”
검술 마스터
마법 마스터
폴 댄스 500 루비
예법 400 루비
.
.
그러려고 했다.
그러나 여러 선택지 중에 항마력과 관련성이 있는 과목을 찾기 어려웠다.
“항마력을 올리려면 뭘 배워야 해?”
신학 500 루비
모처럼 루비를 들이부으려는 내 열의에 힘입어 시스템이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그렇구나, 고마워.”
내 물음에 정상적인 대답을 내놓는 시스템에 감사 인사를 전한 후 지시를 내렸다.
“그럼 이제 신학을 배우러 가보실까.”
마차 바퀴가 다시 구르기 시작했다.
º º º
퀘스트: ‘신실한 자의 가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무사히 신전에 도착한 나는 시스템 창에 떠오른 퀘스트를 수락하려 했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서늘해 보이는 벽안의 남자와 시선이 얽히기 전까지는 말이다.
‘성기사 단장, 엘지드 윈터!’
나는 단박에 남자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당연했다.
미남 선호 사상의 칭송을 받던 주인공이니까.
그런데, 삽화와 실물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키!
찬란한 금발에 서늘한 벽안.
냉소를 머금은 입술.
떡 벌어진 넓은 어깨!
가까이에서 본 엘지드 윈터에게선 삽화가 채 담아내지 못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훈륭하다….’
물론 체격만 보자면 체스트나 데쏠레이도 그에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엘지드가 기사 갑옷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더 거대하게 느껴졌다.
“제게 용건이 있으십니까?”
듣기 좋은 음성, 그러나 날이 선 것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엘지드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런, 너무 빤히 보고 있었나 봐.’
상대가 잘생겼다고 하여 지나치게 쳐다보는 건 확실히 실례일 수 있었다.
“성함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내가 미처 사과를 하기도 전에 그가 이름을 물어왔다.
“저는 헬레나라고 해요.”
나는 절로 히죽여지는 입꼬리를 단속하며 얼른 대답했다.
네 눈부신 미모에 시선을 빼앗겼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최애의 등장에 놀랐다는 말도.
‘없어 보이잖아.’
대신 얼른 사과의 말을 건넸다.
“실례했어요. 제가 너무 빤히 쳐다봤네요.”
“…저는 성기사 단장 엘지드 윈터라고 합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처럼 차가워 보이는 외모와 달리 엘지드는 성실하게 본인 소개를 했다.
인성도 준수해 보인다. 나이스!
“아, 저도 알고 있어요. 그쪽이 누구인지 정도는.”
“…저를 아십니까?”
엘지드가 고개를 살풋 기울이며 반문했다.
제 유명세를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냉기 풀풀 풍기는 생김새와는 달리 다소 순진해 보이는 표정을 보니 기대감이 몽글몽글 차올랐다.
“제국에서 성기사 단장인 윈터 경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요.”
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저 첩자 아니에요.”
펄시스 제국에서 성기사단장 엘지드 윈터를 모르면 첩자라는 뜻으로 가볍게 던진 말이었다.
그런데, 엘지드의 얼굴에서 서서히 표정이 사라졌다.
“첩자라….”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싶던 엘지드가 곁에 있던 기사에게 눈짓했다.
“……?”
“같이 좀 가주셔야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기사들이 내 팔을 결박했다.
나는 흡사 호송되는 죄수처럼 양팔을 붙잡힌 상태가 되었다.
‘뭐, 뭐야.’
분명 얼마 전에도 같은 일이 있었더랬지.
‘데자뷔인가.’
지랄 맞은 두 언니에게 붙들렸던 경험을 떠올리며 나는 발작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이거 놔요. 이게 무슨 짓이에요?”
나는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기사들을 쳐다보았다.
내 눈빛 공격에 기사들이 움찔거리자 엘지드가 엄포를 놓았다.
“얌전히 계신다면 위해를 가하진 않겠습니다.”
“…….”
나는 최대한 험상 굳은 표정을 지으며 도전적으로 엘지드를 노려봤다.
엘지드가 무감한 표정으로 내 눈을 직시했다.
‘해보자 이거냐?’
나는 지지 않고 눈을 부릅떴다.
내 눈에 핏대가 오를 즈음,
“풋.”
엘지드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뭐야?
“당신… 지금 이게 웃겨요?”
내가 항의하자 엘지드가 냉큼 표정을 갈무리했다.
냉기 뚝뚝 흐르는 얼굴로 신속 정확하게 되돌아간 엘지드가 말했다.
“우스워서 웃은 건 아닙니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이름만 밝혔던 조금 전 상황을 후회하며 나는 내 신분을 밝히기로 했다.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저 귀족이거든요.”
내 입으로 나를 존중해 달라는 말을 하자니 조금 창피했지만, 지금 내 눈에는 뵈는 게 없었다.
귀족 모독죄라는 게 있잖아.
“말하지 않아도 당신이 귀족이라는 것 정도는 예상 가능합니다.”
엘지드가 내 화려한 드레스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귀족이라 해도 상황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가시죠.”
“제가 뭘 어쨌다고 이러는 거죠?”
이대로 질질 끌려갈 수는 없기에 목소리를 높였다.
왜 이러는지 이유라도 좀 알자.
“안에 들어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 난 죄가 없다니까?
그러나 엘지드는 묵묵부답, 날 연행하는 이유를 알려줄 의사가 없어보였다.
할 수 없이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내 발로 갈 테니 이건 좀 놓죠?”
“단장님. 보는 눈이 많습니다.”
내 팔을 붙잡은 기사 중 하나가 엘지드에게 속삭였다.
과연 신전에 모여 있던 몇몇 이들이 이쪽을 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럼 도망치지 않는다고 약속해 주시겠습니까?”
“약속한다고 하면, 저를 믿을 수는 있으시고요?”
“…좋습니다.”
커다란 덩치의 기사들에게 붙잡힌 내 가냘픈 팔이 애처로워 보여서일까.
엘지드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양팔의 자유를 얻은 나는 재빨리 주위를 곁눈질했다.
혹시라도 빠져나갈 곳이 있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벽안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만 깨달을 뿐이었다.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어?’
결국 도망치길 포기한 나는 얌전히 성기사들의 뒤를 따르기로 했다.
‘여기가 성기사단장의 집무실이구나.’
딱 필요한 가구와 물품만 갖춰진 심플한 내부를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사는 곳과 이름을 알려 주십시오.”
엘지드가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불쾌한 속내를 드러내기 위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이름이라면 조금 전에 알려 드렸을 텐데요.”
“…….”
돌아온 대답이라곤 고요한 정적 뿐이었다.
“…….”
결국 침묵을 이기지 못한 내가 입을 열었다.
“제 아버지는 빈텔테리 남작이세요.”
“그렇군요. 헬레나 빈텔테리.”
엘지드가 내 이름을 곱씹으며 종이에 무언가를 기록했다.
이 남자의 반응을 보건대, 빈텔테리 남작가의 위세가 대단치는 않아 보였다.
“그럼 사시는 곳은 빈텔테리 남작저가 맞습니까?”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다 정정해 주었다.
“저는 빈텔테리 남작저에서 살지 않아요.”
서류에 고개를 묻었던 엘지드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혼인하신 거라면 굳이 빈텔테리 남작의 이름을 댈 필요가….”
무심코 말하다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엘지드의 미간이 조금 좁아졌다.
“혹시, 고트 백작과 혼인을 앞두신 영애십니까?”
차갑기만 하던 엘지드의 얼굴에 약간의 연민이 어렸다.
‘아놔….’
성기사단장인 엘지드까지 알고 있는 걸 보면 고트 백작과의 결혼 소문이 퍼질 대로 퍼진 모양이었다.
‘근데 지금 나를 동정하는 거야?’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건 아니에요.”
“……?”
“전 동의한 적이 없으니 고트 백작과의 혼인을 앞둔 건 제가 아니죠.”
“…그렇습니까.”
딱딱한 말투로 일관하며 엘지드가 다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럼 영애께서 현재 지내시는 곳은 어딥니까?”
“저는 빈텔테리 남작저에서 분가했어요. 현재는 유령이 출몰한다는 저택에서 살고 있죠.”
“…그렇습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내내 표정이 없던 엘지드의 얼굴에 수심이 묻어났다.
“질문할 게 더 있다면 어서 하세요.”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남자와 막 대면했을 때와 달리, 내 태도는 상당히 삐딱해진 상태였다.
튀어나가는 목소리 또한 뒤틀린 내 심사를 반영했다.
“그럼. 마지막 질문을 하고 보내드리겠습니다.”
“……?”
내 눈썹이 절로 삐뚜름해졌다.
사람을 죄인 취급하며 붙잡아 올 때는 언제고, 이렇게 빨리?
“최근에 타국민과 교류한 적이 있습니까?”
그 순간 나는 직감했다. 이쪽이 본론이라는 걸.
“타국민이라….”
내가 헬레나의 몸을 입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따라서 누가 타국민이고 누가 제국민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동안은 알 필요도 없었고.
“글쎄요.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겠죠.”
물론 ‘그런 사람 없습니다’ 이 한마디면 좀 더 빨리 풀려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것 같았다.
“최근 들어 영토 분쟁 때문에 인접국과 예민한 시기라는 건 알고 계시리라 사료됩니다만.”
몰랐는데요, 그런 사정이 있었는지는?
신문에서는 일언반구도 없던 이야기였다.
“…….”
나는 이 남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좀 더 들어 보자는 심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앞으로 언행에 주의하십시오. 특히, 신전같이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면 더더욱 말입니다.”
아니,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나는 조금 전 일을 되짚어봤다.
최애를 만나서 기뻐했고… 너무 빤히 보다가… 너무 빤히 보다가?
‘첩자…!’
그 단어가 지금 이런 상황을 초래한 거라고?
“더 질문할 건 없으니 이만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엘지드가 싸늘한 목소리로 축객령을 내렸다.
‘싫은데요.’
순간 이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어린아이처럼 생떼를 부리는 대신 이 냉혈한에게 풍파를 일으키고 싶다는 묘한 충동을 느꼈다.
“윈터 경.”
책상 위에 놓인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엘지드가 딱딱한 어투로 되물었다.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만약. 제가 윈터 경이 생각한, 그 타국의 첩자가 맞다면요?”
“…….”
다분히 도발적인 발언에 엘지드가 고개를 들고 나와 시선을 맞췄다.
“어떡하실래요. 만약 그렇다면 절 지하 감옥에라도 처넣으실 건가요?”
시종일관 딱딱한 말투와 표정 없는 얼굴.
그에 어울리는 차가운 벽안이 내 눈을 직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