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데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
놀란 마리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바람에 찻잔이 떨어진 거였다.
“이런, 이런. 아가씨 괜찮아?”
창가에 있던 그림자가 훅 가까워졌다.
조금 전 목소리는 환청이 아니었다.
뒤태도 좋지만 앞태는 더 좋은 그 남자였다.
“잠깐! 움직이지 마. 둘 다 그 자리에 멈춰.”
마왕의 목소리에는 사람을 조종하는 힘이라도 있는 걸까?
왜 때문인지 나와 마리아는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춰서 플러드를 바라보게 되었다.
“…….”
무언가에 집중하는지 말없이 테이블 위를 응시하던 플러드가 이내 검지와 엄지를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딱!
그러자 시간을 역행하기라도 하듯 부서졌던 찻잔 조각들이 서로 엉겨 붙기 시작했다.
꼭 영상을 뒤로 감기 하는 것처럼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순식간에 테이블 위에는 예쁜 색의 찻물을 품은 찻잔이 원상 복구되었다.
‘오….’
나는 플러드의 묘기 대행진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러자 플러드가 화답하듯 커튼콜에 등장한 뮤지컬 배우처럼 가슴 한쪽에 손을 얹고 무릎을 살짝 굽혔다.
과한 몸동작이었지만 플러드가 하니, 상당히 우아해 보였다.
“마음에 들었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맞은편에 앉은 플러드가 초콜릿이 잔뜩 박힌 쿠키를 집어 입에 넣었다.
그 모습이 원래부터 여기 앉아 티 타임을 즐기던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플러드?”
그러나 나는 휘말리지 않았다.
어떻게 문과 창문이 열린 적도 없는데 이곳에 들어왔느냐는 물음은 무의미했다.
마치 영상 편집이라도 한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지는 걸 이전에도 보았으므로.
그럼에도 여기 왜 온 건지는 물어봐야 했다.
“응. 잘 지냈어? 못 본 사이에 더 예뻐졌네.”
테이블 위에 양손으로 꽃받침을 한 플러드가 히죽 웃는다.
‘어여쁘고 어여쁘구나….’
나도 양손으로 꽃받침을 하고는 가만히 플러드의 미모를 감상했다.
그때 마리아가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마, 마왕님…. 쿠키와 잘 어울리는 차를 준비해 드리고 싶은데, 제가 몸을 좀 움직여도 괜찮을까요?”
…이런! 휘말릴 뻔했다.
아니, 벌써 플러드에게 휘말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얼른 집 나갔던 정신줄을 붙들고 마리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리아는 플러드의 마법 쇼를 보기 이전과 같은 부동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눈도 깜빡이지 않았던 건지 흰자위가 약간 충혈되어 있었다.
“찻잔의 잔해에 다칠까 봐 가만히 있으라고 했던 거였어.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움직여도 괜찮아.”
플러드가 얼어있는 마리아에게 손짓했다.
그제야 숨통이 트인 듯 마리아가 숨을 몰아쉬었다.
“…예. 마왕님.”
마리아가 떨리는 손으로 플러드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내 고개가 갸웃 기울었다.
‘분명 마왕보다는 이름으로 불러주기를 원한다고 했었는데?’
그러나 플러드는 나에게 그랬던 것과 달리, 마리아에겐 호칭을 정정해 달라는 요구를 하지 않았다.
“고마워.”
짧은 인사를 건넨 플러드가 차를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차 향을 음미하는지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살짝 내려앉은 속눈썹이 무척 예뻤다.
잠든 얼굴도 엄청 예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헬레나, 왜?”
내 시선을 느꼈는지 플러드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날 바라본다.
나는 미모에 홀리지 않은 척 물어봤다.
“여긴 왜 온 거야?”
플러드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 질문이 딱 적절해. 쉽게 설명할 수 있거든.”
플러드가 양손으로 꽃받침을 만들고는 적안이 사라질 만큼 눈매를 휘어뜨렸다.
“내가 좀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세컨드라도 괜찮을 것 같더라고.”
세컨드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미간을 모으자 플러드가 덧붙였다.
“헬레나에게 아이와… 그래, 남편이라고 하는 그런 게 있다는 건 잘 알겠어. 그래도 괜찮아.”
“…….”
상관없다니?
이건 되게 용감한 발언이었다. 그리고 모럴이 고갈된 말이기도 했다.
플러드의 모럴 수치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지만.
‘지금 플러드의 말은 그냥 불륜이잖아?’
나와 체스트가 정말로 부부라는 전제가 주어진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런 리스크를 동반하면서까지 세컨드가 되어도 괜찮다는 플러드의 말에 묘한 충족감이 일었다.
“플러드. 그건 오해야.”
“무슨 말이야?”
나는 플러드가 잘못 짚은 부분을 정정해 주었다.
“그런 거였어?”
잠깐 기뻐하는가 싶던 플러드가 이내 별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럼 계속 헬레나를 보러 와도 되는 거지?”
“오는 건 상관없는데. 적어도 기별은 해 주고 오지 않을래? 또 찻잔을 부숴서 마리아를 놀라게 할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야.”
“그럴게.”
플러드가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간 나와 대화를 나눈 플러드는 만족스러운 얼굴이 되어 당당히 저택 정문으로 걸어 나갔다.
나는 멀어지는 플러드의 뒤태를 바라보며 그의 호감도를 확인했다.
플러드: 주황색
하트 무늬의 1/3 정도가 메워져 있었다.
‘뭐지?’
공략 캐릭터들의 호감도 시작점이 대체로 낮은 걸 고려하면 플러드의 호감도는 시작부터 대단히 높다고 볼 수 있었다.
‘주황색 하트인데 세컨드라도 괜찮다는 말을 할 정도로 열의를 보이다니… 풀 하트가 되면 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끝이 몹시 피폐해진 엔딩이 그려졌다. 감금이 된다거나 어딘가에 묶인다거나….
‘생각하지 말자.’
나는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망상을 얼른 떨쳐냈다.
º º º
“주인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또?
그런데 평소보다 스튜어드의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나는 좋지 않은 소식임을 직감하고 편지를 건네받았다.
‘역시나…’
봉투에는 익숙한 인장이 박혀있었다.
“염치도 없이 아가씨께 편지를 보냈네요.”
옆에 있던 마리아가 불퉁하게 내뱉었다.
‘그냥 찢어서 태울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읽어는 보기로.
편지는 청첩장이었다.
신부 이름은 아나스타시아라 적혀 있었고.
나름 탈출 방법을 귀띔해주었음에도 끝끝내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빈텔테리 남작 부인 같은 어머니 밑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나스타시아의 삶이 조금쯤 달라졌을까?’
모를 일이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가정해 본들 의미 없고.
‘자승자박이지 뭐.’
그리고 아나스타시아의 불행을 도와야 할 의리 따위는 내게 없었다.
“헬레나 아가씨. 설마 결혼식에 참석할 생각은 아니시죠?”
마리아가 나를 염려하고 나섰다.
마치 내가 불구덩이 속으로 더덩실 춤을 추며 뛰어 들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나는 약간의 장난기가 발동되어 반문했다.
“왜? 언니의 결혼식에 가면 안 돼?”
“물론 가셔도 되죠…. 되긴 되는데 혹여 남작 부인께서 음모를 꾸미고 계신 건 아닌지. 저는 조금 걱정이 돼요.”
마리아의 의심은 꽤 타당했다.
어찌 보면 나보다 빈텔테리 남작저에서 더 오래 머문 셈이니 그곳 실정에 대해 훨씬 더 잘 알 테고.
나는 마리아의 미간을 검지로 살포시 누르며 빙긋 웃었다.
“뭐, 굳이 내가 갈 필요는 없겠지.”
“그래요. 아가씨. 가지 마세요.”
마리아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러니까 정말 빈텔테리 세 모녀가 악의 근원같이 느껴진다.
“그래도 결혼 선물 정도는 보낼까?”
“아이 참…. 아가씨는 마음이 너무 고우시다니까요.”
마리아가 나를 판단하는 것과 달리 내 속은 곱지 않았다.
나를 지옥으로 떠밀려 했던 언니에게 진심으로 축하를 보낼 생각 따위는 없으니까.
그때였다.
퀘스트 발생!
퀘스트: 결혼식에 참석하세요.
‘뭐?’
자율성을 중시하는 시스템이 나를 위험 상황으로 밀어 넣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왜 이러실까?’
내가 불쾌감을 드러내자 시스템 창에 보상 내역이 올라왔다.
보상: 명성 상승 및 아이템
명성은 그렇다 치자. 어쨌든 언니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거니.
그래도 보상 아이템은 조금 궁금했다.
‘아이템 뭐 줄 건데?’
부케: 캐릭터의 호감도를 향상시켜 주는 아이템, 1회 사용으로 소멸합니다.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아이템이기는 했다.
그렇다고 직접 결혼식에 참석하는 건 여전히 꺼려졌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검은 종이를 꺼내 글을 적어 내려갔다.
º º º
헬레나가 결혼식 참석을 놓고 마리아와 대화를 나눌 무렵.
태어나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있었다.
‘진짜 시간이 없는데….’
아나스타시아는 제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초조한 마음을 달랬다.
‘어머니께서 정말 나를 고트 백작에게 팔아넘기시려는 걸까?’
문득 헬레나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뱅뱅 맴돌았다.
「언니를 곱게 키워준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을 가져 보는 건 어때?」
아나스타시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턱을 감아쥐었다.
‘그런 말을 했던 이유가 뭘까… 단순히 내 불행을 즐기려고?’
그렇다고 하기에는 당시 헬레나의 눈에 그런 경멸의 빛은 담겨 있지 않았었다.
‘뭔가 나름대로 힌트를 준 거 같기도 하고….’
갈피가 잡힐 것 같으면서도 잡히지 않았다.
아나스타시아는 답답한 마음에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리다 눈을 번쩍 떴다.
“……!”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헬레나가 했던 말과는 전혀 상관없는 방법이었지만.
‘당일에 신부를 바꿔치기하는 거야.’
자신이 결혼식을 치르더라도 고트 백작의 영지에 헬레나를 보내버리면 된다.
‘그러려면 일단 헬레나가 결혼식 날 참석하는 게 전제 조건인데….’
아나스타시아는 침대에 큰 대자로 누워 거듭 생각했다.
유일한 약점인 마리아는 이미 떠나고 없다.
“그래!”
뒤늦게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오른 아나스타시아는 서둘러 침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