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48)화 (48/166)

<48화>

“어머니. 시간 괜찮으세요?”

소파에 누워 양미간을 꾹꾹 누르던 빈텔테리 남작 부인이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래. 무슨 일이니?”

“저는 고트 백작과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그게 무슨 소리니? 네가 고트 백작과 결혼을 한다니….”

남작 부인의 눈매가 잠시 찡그려졌으나 아주 잠깐이었다.

“숨기려 하셔도 소용없어요. 어머니께서 쥬그테와 대화하는 걸 엿들었거든요.”

남작 부인은 빨래처럼 널려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쥐새끼처럼 남의 말을 훔쳐 듣다니, 귀족으로서 해서는 안 될 행동이구나.”

남작 부인의 반응은 무언가 훔쳐 먹다 딱 걸렸을 때 보이는 여러 반응 중 하나였다.

그것도 상대를 탓하는 좋지 않은 쪽으로.

“일부러 엿들은 건 아니었어요. 그래도 어머니 말씀대로 몰래 들은 건 맞죠. 그 부분은 죄송해요.”

아나스타시아는 티 나지 않게 표정을 주의하며 말했다.

고트 백작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항의하러 온 줄 알았건만 뜻밖에 순종적인 딸의 태도에 남작 부인은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래. 귀족이라면 귀족답게 행동해야 하는 거란다.”

반면, 아나스타시아의 기분은 더 진창에 틀어박혔다.

“그래서 말인데요. 어머니, 고트 백작은 빈텔테리 남작가의 영애를 신부로 원하는 거죠?”

“그래. 이미 들었다고 하니 어쩔 수 없구나.”

사실 아나스타시아의 희생을 기반으로 가문을 재건할 생각을 해본 건 맞다.

그러나 곧 아니다 싶었다.

제 딸을 고트 백작 같은 작자와 살도록 둘 생각은 없었다.

“이 어미가 설마 너를 그 지옥 불구덩이 속에 내버려둘 거라 생각했니?”

“그럼요?”

“일단 길길이 날뛰는 고트 백작의 분노를 잠재운 다음 후일을 도모하려고 했단다.”

아나스타시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입술을 짓씹었다.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그럼 나 대신 어머니가 가시던가요.’

아나스타시아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꾹 삼키고 한 번 더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결점이 없는 완벽한 계획 같았다.

“제게 좋은 생각이 있는데, 들어보시겠어요?”

여느 때보다 총기가 도는 딸의 눈을 보며 남작 부인은 제 젊을 적을 떠올렸다.

생쥐도 코너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었다.

“그래. 얼마나 좋은 생각일지 한번 들어는 보자꾸나.”

º º º

시간이 흘러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

“아가씨, 정말 가실 거예요?”

머리치장에 열을 올리면서도 마리아의 고운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다.

“그렇게 걱정되면 함께 갈래?”

분주히 움직이던 마리아의 손이 현저히 느려졌다.

“왜?”

마리아가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아가씨께서 위험에 처했을 때 제가 어떤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걱정하지 마. 내게 생각이 있으니까.”

흔들림 없는 내 눈을 바라보며 마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º º º

그 시각 헬레나의 옆 저택에선 울트라마린 블루 염료를 사용한 크라바트를 고급지게 두른 데쏠레이가 마차에 올랐다.

원래라면 고트 백작 같은 인사의 결혼식 따위엔 참석하지 않았다.

청첩장에 적힌 이름이 신경을 거슬리게만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평소 데쏠레이는 사교계 가십에 그다지 관심을 두는 편은 아니었으나, 살롱에서 호사가들이 떠들던 말을 듣고 충동적인 선택을 했다.

계약 결혼을 제시하는 것으로.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의 예상을 간단히 깨뜨려버렸다.

데쏠레이의 인생 180년간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취향이 아니라니….’

그 정도 거절에 꺾일 만한 자존심이 아니었지만, 충격이 전혀 없는 건 또 아니었다.

그 덕에 한 가지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동안 자신이 먼저 여성에게 접근해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항상 돌진해 오는 이성 중 하나를 선택했을 뿐, 자신이 먼저 들이대 본 역사가 없었던 거다.

청첩장을 한 번 더 확인한 데쏠레이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취향 한번 독특하군. 정말 그런 노인네가 취향이라 이건가.’

한쪽 미간을 들어 올리던 데쏠레이는 무심코 마차 창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그 바람에 옆 저택의 마차를 보게 되었다.

“마차를 돌린다.”

그 말을 끝으로 바퀴의 궤적이 바뀌었다.

º º º

백마 네 필이 모는 호화로운 마차가 저택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누구지?’

이윽고 내 앞에서 마차가 멈췄다.

마차의 주인은 어텀 대공이었다.

나는 마차에서 내려 내 쪽으로 걸어오는 어텀 대공을 보았다.

어텀 대공은 금실로 자수를 넣은 화려한 연미복을 입고 있었다.

‘황궁에 가는 건가?’

그에게서는 확실히 고위 귀족다운 기품이 묻어났다.

물론 어텀 대공이라면 거적때기를 입혀 놓아도 예쁠 것 같기는 하다만.

“대공 전하?”

나를 한 번 훑듯이 바라본 어텀 대공의 눈썹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시비 털려고 온 건가?’

자연스레 내 눈썹도 삐딱선을 탔다.

“외출하는가 보군.”

“네. 그런데 대공 전하께서 여긴 어쩐 일이세요?”

“그것 참. 이상한 일이군.”

“뭐가요?”

“오늘 결혼하는 신부가 어째서 웨딩드레스 차림이 아닌 건지 궁금하군.”

“네…?”

그게 무슨 개똥 같은 소리냐고 물으려는 찰나 어텀 대공이 품에서 봉투를 꺼내 내게 건넸다.

나는 얼른 내용을 확인했다.

‘허….’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청첩장 내용은 내가 받았던 것과 동일했으나 딱 한 줄이 달랐다.

신부의 이름에 헬레나라고 적혀 있었다.

빈텔테리가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어텀 대공과 같은 청첩장을 돌렸으리라.

신부 이름이 바뀌어 있는 건 내 청첩장뿐이고.

제3자의 눈에도 함정이라는 게 훤히 들여다보이는 얕은 수작이었다.

“그러게요. 참, 이상한 일이네요.”

내 앞으로 온 청첩장을 어텀 대공에게 건넸다.

내용을 확인한 어텀 대공도 조소했다.

이내 돌아가는 상황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로군. 그런데도 결혼식에 참석할 생각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어텀 대공이 물었다.

“그럼요. 언니 결혼식인데 제가 못 갈 이유가 있나요.”

“내게 그대를 에스코트할 기회를 주겠나?”

자연스럽게 내 손을 끌어당긴 어텀 대공이 손등에 입을 맞췄다.

“마침 빚을 갚을 기회가 찾아온 듯한데.”

저번에 내 마차에 허락 없이 올라탔던 일에 대해 말하는 거였다.

‘뭐, 이웃사촌끼리 카풀 정도는 해도 되겠지.’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호의를 받아들였다.

“좋아요.”

마차에 오른 나와 어텀 대공은 서로를 보았다.

잠시 시선이 얽혔다가 떨어졌다.

“출발하지, 코치먼.”

“네. 전하.”

걸걸한 마부의 목소리가 울리고 마차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º º º

“어휴…. 터지지는 않겠지.”

아나스타시아의 몸에 꽉 들어맞는 드레스를 보며 빈텔테리 남작 부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고트 백작은 결혼식을 약식으로만 치르고 영지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촉박한 일정에 맞추려면 새 드레스를 맞출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래서 아나스타시아는 빈텔테리 남작 부인이 입었던 드레스를 고쳐 입게 되었다.

아쉽게도 남작 부인의 드레스가 아나스타시아에게는 몹시 작았다.

“허리를 더 꽉 죄렴. 이렇게.”

빈텔테리 남작 부인이 손수 시범까지 보여주며 코르셋을 바짝 조였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하녀에게 더 죄라고 지시를 내렸다.

“예, 마님.”

하녀 둘이 매달려 낑낑대며 코르셋을 당기느라 진땀을 뺐다.

아나스타시아는 후후 흡, 소리를 반복하며 복부가 압박되는 고통을 참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드리젤라가 태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헬레나가 올까요?”

“오지 않아도 상관없단다.”

한 마디 덧붙이려던 드리젤라가 이내 관심을 잃은 듯 제 옷차림을 점검했다.

“아가씨. 이제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아나스타시아는 드레스 자락을 쥐고 조심히 걸음을 내디뎠다.

무리하게 움직였다가는 드레스가 터지는 볼썽사나운 연출을 하게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아나스타시아는 마른 여자만 아름답다 칭송하는 세상이 잘못된 거라 생각하며 정면을 응시했다.

“……?”

중앙 홀로 나오자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아나스타시아는 고개를 숙인 채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설마 얼굴을 알아본 사람이 있나?’

촘촘한 면사포를 사용한 덕에 얼굴 생김이 눈에 확 들어오지는 않을 터였다.

거기다 데뷔탕트를 치른 적이 없었기에 손님 중 헬레나의 얼굴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

그때 아나스타시아의 시야에 어텀 대공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옆에 헬레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순간 아나스타시아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하… 참. 뻔뻔스럽기도 하지.’

정당한 결혼을 하지 않고 정부를 들인 것도 모자라 어텀 대공의 옆을 꿰차다니.

‘지금이라도 실컷 웃어두라고. 그 낯짝을 유지하는 것도 오늘까지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끔찍한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았다.

막 신관 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아나스타시아는 웃음이 터지려는 걸 꾹 참았다.

전신을 흰색으로 두른 고트 백작을 보니 헬레나가 이전에 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깐 달걀 맞네.’

이번만큼은 헬레나의 말에 동의했다.

팔다리는 가늘면서 몸체만 풍선처럼 부푼 외형이 정말 그렇게 보였다.

º º º

김빠진 탄산수처럼 특별할 것 없는 시간이 흘렀다.

‘그럼 조심해야 할 때는 결혼식 이후인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와인 어떠세요?”

하녀가 다가오더니 트레이 위의 와인을 권했다.

“고맙지만 사양할게.”

“곧 조카를 보시겠네요.”

거절 의사를 밝혔음에도 하녀가 물러서지 않고 여러 개의 와인 잔 중 하나를 응시했다.

‘본 적 없는 얼굴인데.’

그러나 상대는 내가 누군지 아는 것처럼 굴었다.

“선물로는 예쁜 신발이 어떨까요?”

조카. 신발.

분명 길드의 패스워드였다.

‘이 사람인가?’

어둠의 자식들을 통해 고용했던 세작 말이다.

“개나리색으로 말이지?”

내가 묻자 하녀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맞아요.”

나는 하녀의 시선이 닿았던 와인 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와인 잔 아래에 깔려있던 냅킨 위의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짐 꾸린 흔적 없음>

나는 곧바로 하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럼. 좋은 시간 되세요.”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인 하녀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와인을 권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어텀 대공을 힐끔 본 뒤 테라스로 걸음을 옮겼다.

원래대로라면 결혼식을 치른 아나스타시아는 고트 백작의 영지로 가게 될 거다.

그렇다면 짐을 챙길 테고.

‘그런데 짐을 챙기지 않았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