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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77)화 (77/166)

<77화>

“무상으로 다량의 약초를 지원해 주겠다 하셨습니다.”

나는 마구 물개박수를 치고 싶어졌다.

‘양아버지, 파인 플레이!’

아무리 가족 간이라 해도 귀족 사회에서 무상으로 무언가를 제공하기는 쉽지 않다.

심지어 빈텔테리 남작과 나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이가 아닌가.

수로 공사와 치료제 구매. 그리고 아버지의 약초 모종을 사들이며 많은 루비를 소모할 거라 생각하던 차였는데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메이어. 먼 길 달려오느라 피곤하실 테니, 성기사 분들을 편히 쉴 만한 곳으로 안내해주겠어?”

이전보다 병의 전염 속도가 늦춰진데다, 완치자도 생기다 보니 성안에 조금 여유가 생긴 참이었다.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꾸벅 목례한 메이어가 홀을 나섰다.

그 뒤를 따라 성기사들도 홀을 나갔다.

그런데 엘지드만이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윈터 경?”

“쉬는 건 괜찮습니다. 그보다, 이번에도 혼자서 바쁘셨다 들었습니다.”

엘지드가 심해처럼 푸른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나 또 뭐 잘못했어?’

나는 영문을 알 길이 없어 눈만 끔뻑였다.

“게다가 상당히 무모하시더군요.”

“윈터 경, 그게 무슨 소리에요?”

“마을 근처에 주둔한 마물을 싹 다 정리하셨다 들었습니다. 그것도 혈혈단신으로 말입니다.”

내 미행 전담이라는 그 성기사.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데 아직까지 내 뒤를 쫓으며 미주알고주알 다 일러바치고 있나 보다.

‘그렇다면?’

상당히 유능한 인재잖아? 이참에 스카웃 제의를 해버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자신의 몸을 소중히 하십시오. 카스텔른 남작.”

엘지드의 반듯한 미간이 깊어졌다.

그 희귀한 표정이 너무나 보기 좋은 것과 별개로 엘지드가 이러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싶으면서도 나는 떠오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윈터 경. 혹시… 내가 다칠까 봐 걱정했어요?”

“그렇다고 하면. 남작께 실례가 됩니까?”

“…….”

엘지드가 진득하게 시선을 얽어왔다.

얼음처럼 차가워 보이는 벽안이 저렇게 뜨겁게 들끓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며 나는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다.

“…아뇨. 걱정, 뭐 할 수도 있죠.”

“그렇다는 말씀은?”

“윈터 경께서 제 걱정을 하는 건 윈터 경의 마음이니, 마음대로 하시는 게 당연하잖아요.”

내 자유를 막는 게 아니라면 걱정 정도야 하면 어때.

그리고 나는 내 자유를 소중히 생각하는 만큼 타인의 자유도 소중히 생각하는 편이었다.

‘네 마음대로 해.’

엘지드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갑자기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뭔데, 왜?’

지금 어딜 봐서 호감도가 오를 타이밍이란 말인가.

그런데 내 물음과 상관없는 답이 돌아왔다.

엘지드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동시에 엘지드의 뺨이 보기 좋게 예쁘게 물들었다.

‘혹시…?’

전염병 증세가 고열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윈터 경, 열 있는 거 아니에요?”

나는 서슴없이 엘지드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엘지드의 푸른 동공이 커졌다.

‘이마가 좀 뜨거운 것 같기도 하고…. 전염병이 옮은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절로 미간이 모였다.

엘지드도 자신의 의지로 블랭크로 왔고, 치료제가 있긴 하지만, 혹여 그가 병에 옮는다면 내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완쾌한다고 해도 혹시 후유증이 있을지도 모르고.

그때였다.

“……?”

이마에 올려둔 내 손에 엘지드의 손이 닿았다.

이내 내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뺨을 감싸 쥐게 만들었다.

“윈터 경, 지금 뭐 하는….”

그러자 믿을 수 없게도 주변이 장밋빛 배경으로 도배되었다.

묘하게 엘지드 주변이 반짝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더니.

어프로치 모드 돌입!

무지개색의 귀여운 폰트가 빈 허공을 메우고 시스템 창이 요동쳤다.

엘지드가 당신의 스킨십에 반응합니다.

엘지드를 터치해주세요.

어프로치 모드 제한 시간 00:00:15

스킨십 허용 범위는 호감도의 총량과 비례합니다.

플러드 때와는 조금 다른 연출이었다.

묘하게 제한 시간도 짧은 것 같고?

어쨌든 시스템이 호감도 상승의 기회를 알렸으니 기회였다.

‘지난번에는 시간을 너무 낭비했었지.’

나는 애써 마음을 다스렸다.

그럼에도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넘어오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어프로치 모드 제한 시간 00:00:14

나는 밀려오는 긴장을 억누르고 침착하게 상황을 살폈다.

찬찬히 뜯어보니 엘지드의 몸이 미약하게 반짝였다.

뺨과 귀, 입술 그리고 몸 이곳저곳이….

나는 머쓱함을 이겨내려 노력하며 엘지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내 엘지드의 고집스럽게 꾹 다물린 입술에 시선이 닿았다.

엄지로 엘지드의 아랫입술을 살살 쓸어 보았다.

“…읏.”

엘지드가 억눌린 신음을 토했다.

‘어울리지 않게, 아니 어울리나?’

내가 가만히 엘지드의 입술에 시선을 두자 엘지드의 눈가가 벌게졌다.

어프로치 모드 제한 시간 00:00:10

빠르게 카운팅 되는 시스템 화면을 힐끗 바라보는데.

‘뭐야…?’

그러니까 손대면 기분이 좋아지는 곳.

엘지드의 신체 중 몇 군데가 반짝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내 담력을 깨달았다.

‘난 어쩔 수 없는 소녀인가 봐….’

시스템한테 공식적으로 스킨십 허락을 받긴 했다.

그럼에도 마음이 오가지 않은 상대의 몸을 마구 더듬어도 괜찮은 건가 싶은 의문이 드는 것이었다.

속으로 108 번뇌의 구렁텅이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엘지드와 시선이 마주쳤다.

‘뭐, 뭔데.’

차가워 보이기만 하던 엘지드의 푸른 눈이 내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 같다면, 지나친 착각일까?

그에 용기를 얻은 나는 몸을 살짝 밀착시켰다.

엘지드가 피하지 않고 되레 몸을 붙여왔다.

서서히 얼굴과 얼굴이 가까워지고, 코끝이 닿을 만큼 거리가 가까워졌다.

그때.

“…실례합니다.”

상냥하지만 살짝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문가에 라피스가 서 있었다.

‘언제 온 거지?’

엘지드의 큰 체구에 가려 내 쪽에서는 문가가 보이지 않았던 터라 라피스가 언제부터 저기 서 있었던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라피스, 무슨 일 있어요?”

불장난치다 딱 걸린 어린아이가 된 심정이었지만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엘지드 경이 돌아오셨다고 들어서요.”

그제야 줄곧 나만 바라보고 있던 엘지드가 문가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 들끓듯 뜨겁던 엘지드의 눈빛은 언제나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메트릭 영애, 제게 용건이 있으십니까?”

목소리 톤은 물론이고, 언제 다정했었냐는 양 말투도 서늘했다.

어프로치 모드 제한 시간 00:00:6

여전히 시스템 창은 카운팅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의 접촉은 어려울 듯싶었다.

제길.

“…치료제, 치료제에 대해 엘지드경과 대화를 나눴으면 해요…. 혹시 지금 바쁘신가요?”

엘지드가 나와 시선을 맞췄다.

내 생각은 어떠냐고 묻는 듯이.

“가 봐요.”

“…알겠습니다. 그게 남작의 뜻이라면.”

약간의 실망감이 어린 눈으로 엘지드가 맞닿은 몸을 담백하게 떨어뜨렸다.

여전히 귀에 달린 듯 심장 뛰는 소리가 거센 나와 달리, 엘지드는 감정을 추스르는 속도가 매우 빨랐다.

멀어지는 엘지드의 너른 등을 보며 생각했다.

‘기사라서 그런가?’

스위치를 켜고 끄듯이 제 마음대로 감정이 조절되는 모양이다.

밖으로 나온 뒤 라피스는 엘지드를 힐끔거리다 시선을 떨어뜨렸다.

“무탈하게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그런데 정말 빨리 돌아오셨네요. 족히 2주는 걸릴 거라 예상했는데.”

“…….”

그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라피스는 엘지드의 얼굴을 쳐다봤다.

속눈썹을 드리운 엘지드가 입술을 엄지로 쓸고 있었다.

“엘지드 경. …제 말 듣고 있어요?”

미간을 모은 라피스가 살짝 목소리를 높이며 채근했다.

“실례했습니다. 메트릭 영애.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무슨 말을 했는지 듣지 못했습니다.”

입은 사과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엘지드의 표정은 전혀 죄송해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푸른 눈은 어딘지 조금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아버지의 약초, 이번에 가져온 양이 전부인가요?”

라피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급히 가져올 수 있는 양은 그게 전부입니다. 빈텔테리 남작께서 새로 채집하는 대로 더 보내주기로 약속하셨습니다.”

“…….”

라피스는 약간 울분이 섞인 눈빛으로 엘지드를 쏘아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메트릭 영애.”

저를 바라보는 엘지드의 표정은 평소처럼 무감했다.

그럼에도 라피스는 엘지드의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 전… 제가 방해된 건가요?”

“무얼 말씀하시는 겁니까?”

“엘지드 경의 기분이 조금 언짢아 보여서 말이에요.”

“그렇게 보였습니까? 저는 평소와 같습니다만.”

엘지드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살짝 풀어져 있었다.

º º º

‘대체 왜 사업을 말아먹었나 했더니….’

빈텔테리 남작은 아버지의 약초만 달랑 보낸 게 아닌, 모종과 함께 약간의 인력까지 보내주었다.

‘설마 막 퍼주다가 사업을 다 말아 먹은 건가…?’

하지만 내가 먼저 베풀면 더 크게 돌아온다고 하지 않던가.

‘이쯤 되면 양아버지에게 마가 끼었다고 보는 게 좋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복도를 걷는데 이쪽으로 걸어오던 살비르산과 마주쳤다.

“남작님, 마침 찾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버지의 약초가 병에 탁월한 효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완치자도 늘어나고 있고, 신규 감염자의 수 또한 줄어들고 있습니다.”

“다행이네. 살비르산도 아버지의 약초를 잘 챙겨 먹고 있지?”

“물론입니다. 이대로만 가면 전염병 종식도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살비르산은 무척 기뻐했지만 나는 그가 좀 안쓰러웠다.

왜냐면, 블랭크에 오기 전까지 오동통했던 살비르산의 볼이 상당히 홀쭉해진 탓이었다.

턱선이 선명해지면서 미모에 물이 오르긴 했지만.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고생해줘.”

나는 옅게 웃으며 그를 독려했다.

‘일 마무리 되면 보너스 많이 챙겨줘야지.’

포상 계획도 잊지 않았다.

“용건은 경과보고였어?”

내가 묻자 그제야 살비르산이 탄식하며 말했다.

“아, 참! 병상에서 일어난 사람들이 남작님께 감사를 표한다며 저렇게….”

살비르산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창밖에 산처럼 잡동사니를 쌓아둔 나무 수레가 보였다.

무상으로 전염병을 치료한데다 세수의 변동 없이 수로 공사까지 한다고 하니, 영지민들의 호감도가 치솟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블랭크 영지민: 초록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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