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흐흥.’
나는 비죽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단속했다.
영지민들의 호감도 색깔이 거무죽죽한 보랏빛에서 푸릇한 초록색으로 거듭난 상태였다.
“영지민들이 황제 폐하께서 블랭크에 은총을 내리셨다는 소리를 하더군요.”
재주는 내가 부렸는데, 칭찬은 황제가 듣다니.
그런 사회라는 걸 알면서도 속이 쓰렸다.
그러나 대놓고 불평을 토로하지는 않았다.
“살비르산이 유능한 덕분이야.”
내가 칭찬하자 살비르산이 머리를 긁적였지만, 우쭐한 표정을 숨길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오랜 시간에 걸친 연구가 이번 기회에 결실을 맺게 되어 다행입니다.”
살비르산은 적은 양의 약초를 희석시켜서 많은 양의 약을 생산하는 독보적인 기술을 갖고 있었다.
한마디로 버프 같은 효과, 그 덕을 이번 기회에 톡톡히 본 셈이었다.
‘진짜 운이 엄청 좋은데?’
헬모드라 하더니 계속 좋은 일만 생기는 것 같아 무서울 지경이었다.
“남작님. 그런데 말씀드리지 않은 게 하나 있습니다.”
한참을 우쭐해하던 살비르산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뭔데 그래?”
“자리를 좀 옮기는 게 좋겠습니다.”
사람들이 오가지 않은 곳에 도착하자 살비르산이 잔뜩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다른 치료제가 없어서 그대로 사용하고 있지만, 아버지의 약초에는 독성이 있습니다.”
“독성? 부작용을 말하는 거야?”
그의 표정은 전에 없이 진지했다. 덩달아 내 표정도 조금 굳었다.
“맞습니다. 약초학을 공부하셨다더니 역시 박식하십니다.”
별것도 아닌 말에 칭찬을 하는 살비르산 때문에 나는 붕어처럼 입술을 뻐금거렸다.
약에 부작용이 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건만, 이딴 걸로 약초학을 들먹일 줄은 몰랐다.
매번 얼굴을 붉힐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얼른 칭찬에 익숙해져야 할 것 같았다.
“어떤 부작용이 있는데?”
“뭐, 심각한 건 아니지만…. 직접 보시지요.”
살비르산을 따라나선 나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심각한 게 아니라고?’
아이를 낳고 붓기가 빠지지 않아 고민이라던 부인이 몰라볼 정도로 늘씬해져 있었다.
아버지의 약초 덕에 병상에서 털고 일어난 사람 중 부작용을 겪은 사람이 몇 있었는데 대부분 증상이 비슷했다.
무려 살이 빠지는 것이었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요?”
“전혀요. 병을 앓기 전보다 훨씬 좋아요. 호호. 이전에는 관절통이 좀 있었는데 그것도 씻은 듯이 나은 걸 보면 신통방통하기 짝이 없다니까요.”
“그 외에도 다른 불편한 곳은요?”
“옷의 사이즈가 줄어버려서, 새로 옷을 지어 입어야 하는 게 조금 불편한 일이에요. 호호.”
계속 웃음이 나는지 부인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호오….’
비슷한 부작용을 겪고 있는 완치자 몇을 직접 만나고 나자 살비르산이 운을 뗐다.
“약초의 부작용에 관해 연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 꼼꼼하게 살펴봐야겠지요.”
살비르산의 말이 내 귀에는 이렇게 들렸다.
‘연구비 지원이 절실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살비르산이 첨언했다.
“물론 평민들 사이에서는 조금 넉넉한 편이 부유함을 상징한다고 하지요. 그러나….”
살비르산이 뒷말을 흐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곧바로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다.
“연구비 지원을 계속할게. 걱정 말고 아버지의 약초에 관해 꼼꼼히 살펴봐 줘.”
손대는 사업마다 족족 망하는 빈텔테리 남작의 마이너스의 손을 미다스의 손으로 바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º º º
환자들을 만나보고 회의장에 돌아오니 문 앞에 버틀러가 서 있었다.
“날 기다렸어?”
“아닙니다. 방금 전에 도착했습니다.”
“그래? 무슨 일인데?”
“남작님 앞으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버틀러가 아이보리색의 꽃무늬가 들어간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편지에서 풍기는 옅은 꽃향기에 발신인의 정체가 조금 궁금해졌다.
“고마워. 버틀러.”
“아닙니다. 성 안팎의 일로 피곤하실 텐데, 피로회복에 좋은 차를 대령할까요?”
“부탁할게.”
허리 숙여 인사하고 떠나는 버틀러의 뒤통수를 보자 스튜어드가 떠올랐다.
‘집사 아카데미의 교육 방침이겠지?’
스튜어드도 항상 내게 애프터눈 티를 내놓고는 했다.
신기하게도 스튜어드는 그날그날의 내 기분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맞는 차를 준비해주었다.
가령.
-주인님. 계속 하품을 하시는군요. 졸음을 쫓는데 좋은 차를 준비했습니다. 악마의 유혹이라는 이름의 수입차입니다.
-주인님. 오늘따라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히비스커스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얼마나 떨어져 있었다고….’
벌써 향수병이 돋는 건지 스튜어드를 시작으로 룸메이트들이 그리워졌다.
얼른 블랭크의 일을 마무리 짓고 돌아가야겠다 생각하며 편지 봉투를 뜯었다.
귀족 영애가 보낼 법한 편지 봉투 안에는 검은 봉투가 들어 있었다.
봉투 안에 봉투인 셈이었다.
쓸데없는 자원 낭비라 볼 수 있었지만 어둠의 자식들답게 독특하긴 했다.
‘최근 길드에 의뢰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일인지 궁금해 얼른 편지를 읽었다.
<새로 전할 소식이 있습니다.>
첫 번째 소식은 아나스타시아가 고트 백작가에서 쫓겨났다는 이야기였다.
‘이건 아나스타시아한테는 잘된 일이 아닌가?’
그런데 몰랐던 사실이 추가로 적혀 있었다.
<고트 백작 혼자만 독을 먹은 게 아닙니다.>
집사와 하녀장을 비롯해, 백작가의 고용인들 대다수가 독을 먹었다고 했다.
여기저기서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이들을 보고 하필 그 자리에 있던 아나스타시아가 큰 충격을 받았단다.
<그녀는 약간, 그러니까 아주 약간 정신을 놓은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돌려 말했지만, 이건 머리에 꽃을 달았다는 소리였다.
‘이걸 좋은 일이라 해야 할지, 나쁜 일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네….’
다음 소식은 빈텔테리 남작 부부에 관한 이야기였다.
<빈텔테리 남작 부인이 비밀리에 이혼 소송을 준비 중입니다.>
‘진짜?’
대외적으로는 합의 이혼처럼 보이도록 했으나, 이는 남작 부인이 빈텔테리 남작을 버리는 것과 진배없었다.
왜냐하면 쫄딱 망한 빈텔테리 남작 몰래 아나스타시아를 고트 백작에게 넘긴 뒤 예전에 약속했던 지참금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이건 잘된 일이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버틀러입니다.”
“들어와.”
잠시 후 테이블 위에 트레이를 내려놓으며 버틀러가 물었다.
“편지에 좋은 소식이라도 적혀 있는 겁니까?”
“왜?”
김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물을 찻잔에 따르며 버틀러가 말했다.
“평소답지 않게 남작님께서 깨소금 맛이라는 듯 웃고 계셔서요.”
나는 얼른 트레이에 비친 내 표정을 살폈다.
확실히 고소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뭐, 조금?”
“혹시 무슨 일인지 여쭤도 괜찮을까요?”
섬세한 동작으로 차를 우리는 버틀러를 잠깐 바라보다 편지 내용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설명이 끝날 즈음 버틀러가 주홍 찻물이 담긴 찻잔을 내밀었다.
나는 차를 홀짝이며 생각했다.
‘빈텔테리 세 모녀. 이를 어쩌나.’
빈텔테리 남작은 곧 플러스 손이 될 예정인데.
º º º
다음날 아침.
머리 손질과 옷매무새를 점검하고 홀을 나설 때였다.
“수도로 돌아가신다 들었습니다.”
홀 입구에서 엘지드와 딱 마주쳤다.
“맞아요.”
영주 미션도 해결된 참이라 계속 블랭크에 머물 이유가 사라졌다.
“윈터 경도 성 밖으로 나가는가 봐요?”
은회색 갑옷을 갖춰 입은 엘지드를 보며 물었다.
“교구에서 복귀하라는 전언이 있었습니다.”
“그럼 성기사단도 수도로 돌아가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나는 싱긋 웃으며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번에 윈터 경께 많은 신세를 졌네요.”
그러자 가만히 나를 쳐다보던 엘지드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자는 거겠지?’
나는 엘지드의 커다란 손을 마주 잡고 살짝 흔들었다.
검을 쥐는 사람답게 커다랗고 굳은살이 박인 손이었지만 따뜻했다.
엘지드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시스템 창이 떠올랐지만 이어지는 엘지드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기가 없다는 뜻이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이런 행위는 어느 나라의 문화입니까?”
엘지드의 물음에 조금 당황했지만, 나는 태연히 대답했다.
“저… 먼 나라 어딘가요.”
“카스텔른 남작께서는 그리 먼 나라까지 가보셨습니까?”
엘지드가 대충 둘러댄 말을 물고 늘어졌다.
“그럼요. 제 꿈이 세계 일주라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이제는 거짓말이 술술 나온다.
하지만 이곳이 게임 속이라는 사실을 밝혀 엘지드의 호감도를 대폭 하락시키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이러다 피노키오처럼 코가 길어지는 건 아니겠지.
“제게 그런 말씀 하신 적 없습니다.”
여전히 무뚝뚝한 어투로 엘지드가 말했다.
“지금 말했잖아요.”
아재 개그로 화술 스탯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되어 시스템 창을 살피는데, 엘지드가 쿡쿡 웃었다. 어깨까지 살짝 들썩여가며.
올라가는 입매를 단단히 단속하려는 노력이 가상했다.
“윈터 경?”
“죄송합니다. 카스텔른 남작.”
엘지드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는 듯 길어진 입술을 말아 물었다.
시원한 입매와 뭉그러진 입술이 꽤 보기 좋았다.
동시에 어프로치 모드로 돌입했을 때가 떠올랐다.
저절로 빛나던 엘지드의 신체 부위로 시선이 내려갔다.
“카스텔른 남작?”
내 시선 처리를 본 엘지드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벌써 다 웃었니?’
기사라서 그런가, 감정을 갈무리하는 게 참 빠르다.
“수도로 돌아가면 저택으로 초대해도 될까요? 식사대접을 하고 싶은데.”
“그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면 됩니까?”
내가 어려운 말이라도 했던가.
엘지드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왜 또?’
갑자기 떠오른 시스템 창의 메시지를 보며 의아해하고 있는데 버틀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작님, 출발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럼 조심히 돌아가세요. 윈터 경.”
못 박힌 듯 서 있는 엘지드에게 눈인사를 건넨 뒤 돌아섰다.
º º º
영지의 전반적인 일은 버틀러에게 일임하고, 전염병에 관한 일은 살비르산을 책임자로 정했다.
이후의 일은 시스템상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기에 나는 저택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환송하는 영지민들을 일별하고 마차에 올랐다.
얼마쯤 마차 안에서 흔들리다 환기를 시킬 요량으로 마차 창을 열었을 때였다.
“……!”
바깥 풍경 대신 푸른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