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따사로운 오후의 태양같이 해사하게 웃고 있는 체스트가 서 있었다.
“오늘은 체스트도 저택에 있었네요?”
“네.”
고개를 끄덕이며 체스트가 내 쪽으로 다가올 때였다.
얼굴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개를 들어보니 해츨링이었다.
그런데,
“……!”
몸체에 비례해서 작은 날개 때문일까.
계속 허공을 나는 게 힘에 부쳤는지 해츨링이 힘없이 바닥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나는 해츨링의 추락을 막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추락하는 해츨링을 체스트가 자연스럽게 안아들었다.
“아가, 괜찮니?”
나는 재빨리 체스트 곁으로 다가갔다.
해츨링의 가늘어진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안쓰러워 저절로 내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체스트가 그런 나를 안심시키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작은 날개로 너무 날아서 그래요. 오늘은 이만 쉬게 하는 게 좋겠어요.”
“그래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해츨링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자꾸 감기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린 아기용의 입이 벌어졌다.
“먀….”
그 목소리가 너무 귀여운 것과 별개로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아기 용 번역기 드래곤인 스카를 쳐다보았다.
“아기가 헬레나에게 잘 했냐고 물어봤어요.”
체스트가 대답했다.
“응. 엄청 잘 했어. 세상에서 최고로 멋졌어.”
내가 마구 칭찬을 쏟아내자 그제야 아기 짐승처럼 미약한 그르렁 소리를 내며 해츨링이 눈을 감았다.
커다란 체스트의 품이 편안했는지 잠이 든 모양이었다.
‘진짜 기면증인가?’
내가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자 체스트가 웃으며 대답했다.
“모습을 바꾸는 폴리모프는 기력을 많이 사용하게 돼요. 오늘은 죽은 듯이 잘 거예요.”
“아….”
나는 짧게 감탄하며 아기용의 뺨을 쿡 찔러 보았다.
인간형일 때의 감촉과는 조금 달랐다.
조금 더 단단했지만, 체스트가 드래곤 본체였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말랑말랑했다.
º º º
아기 침대에 해츨링을 잘 뉘여 놓은 다음 방을 빠져나왔다.
“체스트, 혹시 시간 괜찮으면 저와 차 한잔할래요?”
내 제안에 약간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체스트가 바로 승낙했다.
“그럼요.”
해츨링의 침실에서 응접실로 향하는 짧은 시간 동안 체스트의 잘생긴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예뻐라….’
나는 잠깐 체스트의 얼굴에 홀려 있다가 응접실에 도착해서야 정신줄을 붙잡았다.
그리고 익숙하게 커피를 내려 체스트에게 건넸다.
체스트가 흙탕물 같은 색의 찻잔 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이게 뭐예요?”
“루왁 커피인데, 취향에 맞지 않으면 스튜어드에게 홍차를 준비하라고 할게요.”
내가 다른 대안을 내놓자 체스트가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이걸 꼭 마시고 싶어요.”
그러더니 냉큼 커피를 들이켰다.
다음 순간 기품 있게 커피를 머금은 체스트의 미간이 좁아졌다.
커피를 처음 접하거나 싫어할 때 나오는 반응이었다.
“……!”
나는 체스트의 표정 변화를 살피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체스트가 커피를 처음 마셔보았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왜냐면, 체스트가 평소 달콤한 디저트를 즐기지 않는 편이라고 마리아가 귀띰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연히 쓴 커피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예상했는데….
“쓰죠?”
“…좀요.”
그렇게 대답한 체스트가 다시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취향에 맞지 않으면 마시지 말아요. 다른 차를 준비하라고 할게요.”
“괜찮아요. 조금 색다른 맛이라고 생각한 것뿐이에요.”
그러면서 계속 커피를 들이켰다.
“헬레나가 준비해 준 차인데, 전부 마셔야죠.”
나는 그런 체스트를 가만히 응시했다.
‘빛깔은 비슷하더라도 그건 사약이 아닌데?’
게다가 저 루왁 커피는 일전에 플러드가 가져다 준 것으로 상당히 고가였다.
“체스트, 입맛에 맞지 않으면 억지로 먹지 않아도 돼요.”
“루왁 커피라고 했던가요? 이건 헬레나가 좋아하는 건가요?”
“네. 저는 커피 중독자거든요. 제가 커피를 엄청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기호에 맞지 않는 걸 체스트가 억지로 마시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진심어린 눈으로 체스트를 응시했다.
그러자 체스트가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처음 맛을 봤을 때는 조금 놀랐어요.”
“그런 것 같았어요.”
나는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삼키며 커피를 들이켰다.
“음… 뭐라 그럴까. 빛깔도 흙탕물 같고. 솔직히 말하면 맛도 비슷했어요.”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나마 다행인건 저번처럼 머금고 있던 커피를 입에서 분출하는 일만큼은 면했다.
“그렇다고 흙탕물을 마셔봤다는 건 아니에요.”
체스트가 말을 덧붙였다.
“…알아요.”
나는 한 템포 느리게 대꾸했다.
조금 전 그런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흙탕물 맛을 어떻게 알아? 마셔 본 게 아닌 이상.’
그런 내 속내를 읽은 듯 체스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서운하다는 눈길로 날 쳐다봤다.
“정말이에요.”
“알겠어요. 믿을게요. 그래서 다음부터는 입에도 안 댈 맛이었나요?”
“그렇진 않았어요. 헬레나가 좋아하는 건 저도 좋아하고 싶으니까요.”
“…….”
체스트의 말에 머금고 있던 커피가 느리게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체스트가 유혹적인 눈빛으로 쳐다보니 자연히 긴장이 되었다.
적막한 응접실 안에 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더 마시고 싶어도 줄 수 없어요.”
나는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그러자 체스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왜죠?”
나는 루왁 커피가 고양이의 배설물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플러드가 보내준 귀한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순간 체스트의 눈썹이 미약하게 꿈틀거렸다.
나는 그 찰나의 반응을 놓치지 않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체스트?”
체스트가 소파 팔걸이에 우아하게 턱을 괴며 물었다.
“더 고급스러운 종류는 없나요?”
“커피 원두 말이에요?”
“네.”
“음… 글쎄요.”
나는 눈을 도르륵 굴리며 생각했다.
‘루왁 커피보다 비싼 커피가 뭐가 있더라?’
체스트가 생각에 잠긴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지난번에 그 검은 마음에 들어요?”
갑자기 대화 주제가 바뀌었지만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네. 아직 사용해 보지는 않았지만, 꽤 마음에 들어요.”
“…….”
이번에는 체스트가 긴 다리를 꼬며 미간을 살짝 좁혔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 그보다, 해츨링의 몸집이 계속 자랄 텐데 이 저택이 너무 비좁은 게 아닌지 걱정이 되서 체스트와 상담을 하고 싶었어요.”
그제야 나는 체스트와의 면담 목적을 떠올렸다.
“…그렇겠네요. 확실히 날갯짓하고 싶어 할 시기가 곧 오겠네요.”
어릴 적을 떠올리는 듯 조금 느리게 체스트가 말했다.
“역시 그렇겠죠?”
나는 해츨링과 함께 지내면서도 아기가 마음 편히 날아다닐 방법을 생각했다.
한 마디로 해츨링의 성장과 나의 사심 두 가지를 충족시킬 무언가를 말이다.
“헬레나의 영지가 상당히 넓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맞아요.”
블랭크 영지라면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가 많다.
“거기라면 몸집이 불어난 해츨링도 마음껏 날아다니기에 적절하겠네요! …다만.”
“저택과의 이동거리가 걱정인가 보네요?”
체스트가 정확하게 핵심을 짚어냈다.
“맞아요.”
이참에 영지로 터전을 옮겨야 하나 잠깐 고민할 때였다.
“헬레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이 있어요.”
그렇게 말한 체스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데요?”
“영지와 저택을 연결하는 워프를 이용할 수 있게 해둘게요.”
“……!”
체스트의 말에 내 눈이 번쩍 뜨였다.
유레카!
“역시 체스트는 천재예요.”
나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체스트를 올려다보았다.
“워프가 마음에 들면….”
싱긋 웃으며 말을 뱉던 체스트가 뒷말을 흐렸다.
“마음에 들면요?”
“…아니에요. 최대한 빨리 저택과 헬레나의 영지를 오갈 수 있는 워프를 설치해 둘게요.”
잠시 입술을 달싹인 체스트가 응접실을 나갔다.
나는 멀어지는 체스트의 뒷모습을 보며 남은 커피를 들이켰다.
‘역시 최애구만.’
얼굴뿐만 아니라, 내 마음에 쏙 드는 예쁜 말만 하는 걸 보면 말이다.
º º º
체스트의 행동력은 정말 빨랐다.
정오가 갓 지났을 즈음 했던 말을 저녁 시간이 되기도 전에 지킨 것이다.
“헬레나, 워프를 설치하고 싶은 곳을 알려줘요.”
나는 짧은 고민 끝에 내 로망을 실현하기로 결정했다.
“잠깐만 기다려줄래요?”
“얼마든지요.”
나는 얼른 사용인들에게 달려가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얼마 뒤.
나는 미소를 머금고 응접실로 돌아와 체스트에게 말했다.
“준비됐어요.”
마음이 급해서인지 걸음도 빨라졌다.
짧은 시간에 저택 이곳저곳을 뛰어다녀서 그런지 내쉬는 호흡도 가빴다.
체스트는 경보와 다름없는 내 속도에 맞춰 걸었는데, 호흡도 흐트러지지 않고 편안해 보였다.
‘역시 드래곤이라 그런가?’
내가 신기한 눈으로 체스트를 바라보자 그 시선을 느꼈는지 체스트가 물었다.
“왜 그래요?”
“신기해서요.”
“뭐가요?”
“거의 뛰는 것과 다름없이 걷다 보니, 헉헉… 이것 보세요.”
나는 연신 가파르게 오르내리는 가슴께를 가리킨 후 체스트를 곁눈질했다.
체스트가 기분 좋은 듯 낮게 웃으며 물었다.
“안아줄까요?”
“…네?”
내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을 깜빡이자, 체스트가 힐끔 나를 내려다보며 대꾸했다.
“지난번처럼요.”
“아….”
이전에 체스트와 산책을 하다 발목을 접질렸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체스트는 솜 인형이라도 들듯 가볍게 나를 안아 들었었다.
나는 약간 갈등하다 말했다.
“괜찮아요. 허억. 헉. 넓어 봐야 저택인데요 뭐.”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요.”
체스트가 질척거리지 않고 담백하게 물러났다.
그런데,
“왜 그래요?”
“아, 다리가….”
순간 몸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응?’
갑자기 높아진 시야에 눈을 깜빡이며 현 상황을 되짚어보았다.
‘저택 안을 동분서주하며 오간 통에 근육이 뭉친 다리에 쥐가 났고….’
나는 부쩍 가까워진 체스트의 얼굴을 보며 살짝 뺨을 붉혔다.
또 공주님 안기였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고 했잖아요.”
나는 몇 번 눈을 깜빡이다 모른 척 체스트의 목에 팔을 둘렀다.
‘편하고 좋구만.’
안정감 있고 빠른 이동 속도.
거기다 걱정스럽게 내 종아리를 주물러주는 체스트의 손길을 가만히 내버려 두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