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날것 3화
“저 하녀…… 일걸요? 아마도?”
“…….”
나는 또 말끝을 흐렸다. 아까 전에 안나가 나를 ‘이벨리나-’ 그 비슷한 이름으로 부른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소설 속에 그런 이름 따윈 등장한 적도 없었다.
아니, 잠시만. 그럼 나는 이름조차 안 나온 엑스트라로, 그것도 하녀로 빙의를 한 거야?
“이것 놓아라.”
“또 시작이시네……. 도련님 눈 잘 안 보이는 거 지나가는 똥개도 알고 있을 텐데 대체 무슨 소리세요? 욕실까지 데려다 드릴 테니 걱정 마시고 기대세요.”
“놓으라고 했다!”
리안드로가 빽빽 소리치며 몸부림을 쳤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이만하면 짜증도 수준급이었다. 이러니까 서브남에서 반란까지 일으키는 악역이 되지.
나는 리안드로의 무릎 아래로 손을 넣어 그를 번쩍 안아 들었다. 체구가 작은 데다 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해서인지 쉽게도 들어졌다.
“너……! 무례함에도 정도가 있다는 걸 모르나!”
“도련님, 너무 악쓰지 마세요. 머리 울리시겠다. 욕실까지 별로 멀지도 않은데 그렇게 벽 짚고 더듬거리면 언제 도착하려고 그러세요?”
“내려놓아라! 내려놔! 이런, 망할!”
굴욕도 이런 굴욕이 없는지 리안드로가 성을 냈다. 소리치는 와중에도 그는 자신의 드러난 다리나 손이 내 몸에 닿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작은 주인의 몸에 닿기만 해도 그 저주가 옮는다더라.’
사용인들이 그렇게 수군거렸기 때문이리라.
전염이 되는 저주는 아닌데…… 이미 전개를 다 알고 있는 나는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리안드로만이 사용하는 별관 건물에는 사용인이 많지도 않았다. 기껏해야 청소를 담당하는 하녀 여러 명 정도. 기본적으로는 모두 가주가 머무르는 본관에서 생활을 했다.
그래서일까, 욕실로 향하기 위해 나온 복도는 인적이 없어 침묵만이 가득했다. 리안드로는 저를 안아 들고 성큼성큼 걷는 나를 드디어 포기했는지 입을 다물고 고개를 획 돌렸다. 정말, 앙탈쟁이가 따로 없지 않은가…….
“이제 좀 나가.”
욕실에 도착해 리안드로를 내려놓자 내게 건네는 첫마디가 그거였다. 또 무언가를 깨뜨리고 싶지는 않은지 제 앞을 더듬어 대는 손길이 더욱 조심스러웠다.
한데 그때-
“아악!”
바로 앞에 있는 욕조를 보지 못하고 한 걸음을 내디딘 리안드로가 소리를 지르며 주저앉았다. 단단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욕조에 그만 발가락을 찧고 만 것이다. 혼자 할 줄 아는 것 하나 없는 귀한 도련님이면서, 부러 나를 밀어내려고만 하는 것이 이제는 야속하기까지 했다.
가만 놔두면 또 어딘가에 부딪치거나 넘어지겠지. 안 그래도 흉 많은 몸에 더 상처를 낼 필요가 있나?
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소매를 걷어 올렸다.
“만지지 마라.”
“싫어요. 만질래요. 도련님 하는 꼴을 보아하니 오늘 안에 목욕하기는 그른 것 같단 말이에요.”
“말버릇 고약한 것 좀 봐라.”
“……헤헤.”
“칭찬 아니다.”
뿌듯해하며 웃자 리안드로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내게 경고했다. 그러다 머뭇머뭇 질문을 던졌다.
“너…… 나를 동정하나? 그래서 지금 이래?”
“그럼요. 도련님이 가여워요.”
선뜻 나온 내 대답에 리안드로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그는 정신을 어디에 내다 놓은 사람처럼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봤자 제대로 보이는 얼굴은 겨우 반쪽뿐이어서 알아보기는 쉽지 않았지만.
언제까지 저러고 있나 싶어 나는 욕조 안의 물도 휘휘 저어 보고 그의 잠옷 윗도리도 슬쩍 잡아당겨 보았다.
“……내 몸은 만지지 마.”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다시 한번 그를 일으켜 세웠다. 드디어 포기라는 걸 한 것인지, 그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팔을 늘어뜨렸다.
목을 덮는 단추를 톡톡 풀어내자 드러난 앞가슴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어쩐지 깃털처럼 가볍더라니, 손바닥만큼이나 얄팍한 몸이었다.
왼쪽 얼굴에서부터 시작된 저주의 흔적은 이미 어깨를 덮고 내려오고 있었다. 피부에 박힌 듯한 부분도 있고, 피부를 찢어서 뚫고 나온 듯한 부분도 있었다. 어째서 항상 고통에 시달리는지 자세히 보니 바로 알 것 같았다. 이렇게나 조그마하고 어린아이인데…….
마지막 단추를 풀자 리안드로는 나를 뒤로 물렸다. 그러고는 저 혼자 윗도리를 벗고 바지도 벗어 던졌다. 그는 속옷만 입은 채로 내게 제 손바닥을 내밀었다.
“네?”
“수건.”
“아…… 어디에 있죠?”
“……됐다. 말을 말자.”
이번에는 발을 찧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가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속옷을 입은 채였다.
“춥지 않으세요?”
“쓸데없는 소리.”
무슨 말을 못 하게 해…….
어린 도련님의 어마어마한 싸가지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하기야 온종일 몸에서 열이 펄펄 끓을 테니 차가운 물이 오히려 시원하고 좋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넓은 욕조 안에서 굳이 몸을 웅크려 말고 있는 작은 리안드로를 멀뚱멀뚱 감상했다. 그의 흐릿한 두 눈이 스르르 감기고 있었다.
저주가 몸의 영양 공급을 막아 먹어도 살이 찌지 않고, 면역력 없이 여리고 창백한 몸. 그 몸에 젖은 머리카락이 밤하늘처럼 새카맣게 구불거렸다.
엘레오노라가 저주를 풀어 주었던 17살의 봄, 성장이 멈추었던 앙상한 소년은 제 몸에 새겨진 글자들이 사라짐과 함께 급작스러운 성장통을 맞는다.
그의 외관을 기괴하고 흉물스럽게 만들었던 저주가 사라지자, 울퉁불퉁했던 피부는 도자기처럼 반질반질 하얗게 빛을 뿜어냈다. 툭 치면 쓰러질 것처럼 야리야리했던 골격이 굵어지고, 키는 평균을 웃돌아 버리고, 부옇게 떴던 흐린 눈은 사파이어처럼 새파랗게 반짝이고.
역사서에 기록이 남을 만큼이나 아름다운 미남자라고 했는데.
“도련님, 목욕 용품은 어디 있어요?”
“……세면대 아래.”
“어디요? 아, 찾았다. 수건은요?”
“눈이 있으면 봐라. 그 옆 칸에 있다.”
“아, 네. 그런데 도련님 같은 사람을 성격 파탄자라고 하는 거 알아요?”
“……너,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리안드로가 짜증을 내며 차가운 물로 얼굴을 적셨다. 흉이 진 왼쪽 얼굴과 어깨는 소설로 읽으면서 상상했던 것보다는 덜 징그러웠다. 확실히 아플 것 같아 보이기는 하나 괴물이라고 불릴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리안드로를 처음 괴물이라고 불렀던 엘레오노라는 그때 당시 겨우 8살에 불과했으니 그런 꼬마 아이가 보기에는 좀 무섭기도 하겠지만.
만약 그때 엘레오노라가 그렇게 겁을 내면서 뒷걸음질을 치지 않았다면 리안드로의 미래는 조금 달라졌을까? 상처 가득한 외관이었어도 마음은 그렇게 굳게 닫아 놓지 않았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순간 리안드로가 엘레오노라에게 버림받고 반란을 일으키는 결말 부분이 생각이 나 울적해졌다. 날을 바짝 세운 채 웅크리고 있는 이 작은 짐승 같은 소년의 인생이 너무 서글프다. 이왕 빙의된 것, 나라도 잘해 줘야지.
나는 약초 물에 손바닥만 한 수건을 적시고는 거기에 비누를 문질렀다. 내가 무얼 하나 싶었는지 리안드로의 귀가 토끼처럼 쫑긋거렸다. 사람의 귀도 저렇게 움찔거릴 수 있구나. 처음 알았다.
한참을 부스럭대던 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인기척을 느낀 리안드로의 몸이 잔뜩 굳어 버렸다. 그는 뿌연 눈을 휘둥그레 뜨며 소리를 질렀다.
“만지지 마!”
“만지는 거 아니고 닦는 건데요?”
“저리 가라! 저리 가! 만지면 너도 옮는다!”
“아, 정말……!”
나는 뼈밖에 남지 않은 리안드로의 팔뚝을 그러쥐었다. 내게서 멀어지려 팔다리를 허우적대던 그의 움직임이 순간 뚝 멎었다.
어안이 벙벙한 듯 그가 입을 열었지만 밖으로 흘러나오는 말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도 같았다. 나는 울상을 지으며 소리쳤다.
“저주 옮는다는 거, 다 헛소리잖아요! 도련님도 알고 계시잖아요……! 어찌 그런 헛소리를 믿어요? 의사도, 마법사도 다 아니라고 그랬잖아요…….”
정말 이렇게 자랐단 말인가? 겨우 3살 된 나이에 저주를 받아 사경을 헤매고, 제 부모마저 멀어져 저에게 다가오는 사람 하나 없이, 몇 년을 그렇게, 몇 년을…….
마치 세상으로부터,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된 것처럼…….
사무치는 소년의 고독이 한순간 파도처럼 밀려와, 감정이 격해지고 코가 시큰해졌다.
“……네가 그걸 어찌 알고 있나.”
“……그냥 알아요, 그냥.”
꾹 감고 있던 리안드로의 눈이 떠졌다. 시력도 거의 없는 그 흐린 시선을 나는 어물쩍 피했다. 손 뻗으면 곧 닿을 만큼이나 가까운 거리. 나는 침입하듯 그의 울타리를 부수고 안으로 들어섰다.
리안드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나 더 이상 내가 쥐고 있던 팔을 빼내려고 하거나 발버둥을 치지는 않았다.
붙잡은 팔뚝이 홧홧할 정도로 뜨거웠다. 이게 평소의 온도라고? 나는 혀를 내둘렀다. 어떻게 미치지 않고 이제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일까? 열이 너무 높아도 정신이 나갈 수 있다고 들었다.
리안드로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가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그에게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눈이 또다시 둥그렇게 뜨였다.
“이 정도면 보이나요?”
“……흐릿하게.”
리안드로는 사람과의 접촉이 여태껏 거의 없었을 것이다. 망설이는 기색이 컸지만 그는 처음으로 용기를 내보이려 하고 있었다. 새로운 것은 언제나 어렵고, 두려운 법이다. 나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인내를 보이기로 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고요하게 가라앉은 침묵 속에서 철벅대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리안드로는 힘없이 늘어뜨리고 있었던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아주 느릿느릿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또 한편으로는 주저하면서, 내게 손을 뻗어 왔다.
“……만져도, 되나?”
“그러세요.”
그가 묻자마자 숨 돌릴 새로 없이 곧바로 튀어나온 대답이었다.
거북이도 그것보다는 빠르겠다. 저 밀가루 같은 손을 잡아채고 싶었지만,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잡아 올리며 기다렸다.
“저주에 걸릴지도 모르는데…….”
“또 그 소리세요?”
얇고 기다란 손가락이 드디어 내 뺨을 간질였다. 뜨거운 온도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저 다른 사람의 피부를 만지는 것일 뿐인데도, 그에게는 많은 용기가 필요한 듯했다. 드디어 한 발자국을 내디딘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