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날것 6화
* * *
다음 날은 리안드로를 찾아갈 틈도 없이 바빴다. 별관 청소뿐만 아니라 안나를 도와 빨래방 하녀들의 일을 도와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주방에서 양파 껍질을 까면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이렇게 바쁜 게 다 공작 부인이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공작 부인은 자선 파티, 경매, 오페라 등의 구경거리를 찾아다니며 밖으로 나돌아 다녔고, 공작 또한 제 정부와 여행을 떠나는 등 돌아가는 상황이 그리 좋지 못했다.
그래도 곧 새로 고용한 하녀들이 들어올 것이라고 하니 이 고생도 며칠 뒤면 끝이었다. 리안드로를 자주 볼 수 없다는 것을 제외하면 일 자체는 꽤 할 만했다. 내가 하녀로서 이렇게나 유능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오늘도 그렇게 해가 저물었다. 나는 일을 끝마치고 노을 색으로 물든 대저택의 전경을 구경하며 식당으로 향했다. 내 몫의 식사를 받아 와 식탁 앞에 앉자, 같은 구역에서 일을 했던 안나 역시 내 옆에 앉아 있었다.
“안나, 이벨리나.”
“부인.”
“이레네 부인.”
이레네 부인이 다가왔다. 그녀는 벨라비티 공작가의 하위 가문 출신으로, 공작 부인을 대신해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한창 바쁜 몸이었다.
“요즘 좀 정신없지? 곧 하녀들이 더 들어올 테니 힘내렴.”
이미 알고 있는 얘기였다. 나는 빵을 조금씩 뜯어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힘을 내라.’ 그 한마디를 위해서 우리를 찾아온 것일까? 싶었는데,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그녀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크흠, 헛기침을 해서 우리의 시선을 모았다. 이레네 부인은 도수가 높아 보이는 알이 굵은 안경을 위로 들어 올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인사이동이구나. 안나, 너는 그대로 별관 청소 담당. 그리고 이벨리나는…….”
그녀가 말끝을 늘이며 뜸을 들였다. 이레네 부인이 선이 얇은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너는 내일부터 작은 주인님의 시중을 들도록 해. 식사를 가져다 드리거나, 목욕 시중을 들거나. 항시 대기하고 있다가 부르시면 올라가렴.”
“……말도 안 돼요!”
대답은 내가 아니라 안나에게서 나왔다. 안나는 자기에게 불리한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그녀는 주근깨가 가득한 볼을 부풀리며 외쳤다.
“대체 왜요? 작은 주인님은 따로 시중 안 받으시지 않나요?”
“안나, 진정해. 난 별로 상관없는걸.”
“작은 주인님 지시란다. 뭐 별수 있겠니?”
이레네 부인 또한 길게 숨을 내쉬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이 사람들이 왜 이래? 난 정말 상관없다니까? 오히려 이 소식에 기쁘기까지 했다. 며칠 전 그렇게 나가 버린 뒤로 리안드로에게 찾아가지 못해 언제 또 그의 얼굴을 보겠나 싶어서 초조하던 차였다.
아무래도 이들은 내가 이미 한번 리안드로의 목욕 시중을 든 적이 있다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 하긴, 별관 건물이 워낙 조용한가. 복도를 지나가면서도 마주친 사람 하나 없었으니.
“너희 사이에서 들리는 소문 때문에 그러지? 사실이 아니다. 작은 주인님과 닿는다고 해서 병이 옮거나 피부가 썩지는 않아.”
“그럼요.”
나는 대번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모두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정보였다. 리안드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하녀들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쏠렸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주목을 받은 것도 상관하지 않고 안나는 여전히 의심 가득한 눈초리였다.
“확실한 거 맞아요?”
“그래, 아마…….”
이레네 부인의 애매모호한 말이 또 안나를 들쑤신 모양이었다.
“아마라니요? 아마, 라니요?”
“안나, 나 정말 괜찮다니까? 이미 작은 주인님이랑 피부 닿은 적도 있는걸. 그렇지만 봐, 아무렇지도 않잖아.”
“……뭐? 너 뭐라고 했니? 부인, 저 숙소 바꾸면 안 되나요?”
이레네 부인이 한심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나 역시 작게 인상을 구겼다. 나는 안나가 내 걱정이라도 하는 줄 알았지. 저밖에 모르는 녀석 같으니라고.
“진정해. 너는 무슨 작은 주인님을 전염병 환자처럼 생각하나 본데-”
“넌 잠복기라는 말 모르니? 이제 큰일 났다!”
“그만 좀 해.”
나는 안나의 볼을 잡아 늘였다. 그녀는 얼른 제 몸을 빼내고 신경질적으로 볼을 닦아 냈다.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젓다가 다시 이레네 부인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럼 내일부터 저는 작은 주인님 지시를 기다리고 있으면 되는 거예요?”
“그렇지. 네 청소 구역으로는 다른 하녀를 보낼 거야. 안나도 내일은 복도 청소 담당이란다.”
안나가 나를 노려보며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나는 그것을 못 본 척하기로 했다.
이레네 부인은 할 말을 마친 뒤, 들고 있던 차트에 무언가를 슥슥 써 내려갔다. 이윽고 그녀가 자리를 떴다.
맡은 청소 구역이 더 늘어난 안나가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는 그녀의 손에 내 손을 올리며 말했다.
“자주 도와줄 테니까 얼굴 좀 펴라, 응?”
“어디 손을.”
안나가 내 손을 쳐 냈다. 거참, 나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녀가 음산하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진짜, 이놈의 집구석을 떠나든가 해야지. 봉급만 많으면 뭐하니? 저택 안에 괴물이 사는데. 일부러 도련님 호출 피하려고 나다니는 것도 지쳤어.”
나는 안나의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 굳이 그녀를 붙잡고 구구절절 리안드로는 괴물이 아니고 가엽게도 저주를 받은 것이니 그렇게 못된 말을 하지는 말아 달라, 충고할 생각 따위는 이미 저만치 사라져 버렸다.
나는 내 몫의 식사를 끝마친 뒤 먼저 별관으로 돌아갔다. 앞으로 4년 뒤면 저주가 풀려 엘레오노라를 보러 황궁에 눌러앉을 텐데, 그 전에 예쁜 리안드로 얼굴이나 자주 봐 둬야지.
반쪽 얼굴은 이미 피부가 우그러들었지만 그런 모습도 나는 애정을 가지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 * *
13년 생애 처음으로 병수발을 들어 주는 하녀를 두게 된 도련님은 도대체가 그걸 써먹을 줄을 몰랐다.
아침 식사를 할 시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종을 울리지 않는 것이 그러했고, 기다리다 못한 내가 아침 식사를 들고 찾아가자 ‘이게 대체 무슨-’ 하는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것이 그러했다.
리안드로의 담당 하녀가 된 날이 벌써 3일째였다. 그런데 3일째! 그는 단 한 번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항시 대기하고 있으라는 이레네 부인의 말을 듣고 밤낮으로 종소리가 울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물론 나도 시중을 드는 일은 해 본 적이 없으니 익숙하지 못했다. 그래서 미련하게 집 지키는 번견처럼 리안드로의 침실 근처를 서성이기만 했었다.
그러다 결국 나는 아침 일찍 눈이 떠진 오늘, 방금 구워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끈따끈한 크로와상과 야생 딸기로 만든 잼, 우유 등을 챙겨 왔다.
“입맛 없다.”
“말도 안 돼요. 도련님이 이 크로와상에 윤기가 좔좔 흐르는 걸 못 봐서 지금 그러시는 거예요. 분명히 값비싼 버터를 썼을 거라고요. 자, 눈 감고 딱 한입만 먹어 보세요.”
나는 주절주절 리안드로를 설득했으나, 그는 귀찮게 굴지 말라며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정 그러면 네 입에 처넣든지.”
하지만 정말로 내가 내 입에 넣고 오물오물 빵을 씹어 먹을 줄은 몰랐던 모양인지, 리안드로는 헛웃음을 살짝 내뱉었다.
“너 같은 하녀 처음 본다.”
“저도 도련님 같은 분 처음 봐요.”
“얼씨구.”
“자, 그러지 말고 한입 드세요. 잼도 발랐단 말이에요.”
“너 성가셔서 내가 먹는다.”
도련님 돌보기는 처음 예상했던 것처럼 쉽고 간단하게 척척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비쩍 말라서는 식사 시간마다 입맛이 없다 고개를 돌리는 걸 반강제적으로 먹이고, 그새 또 먼지가 일어나 지저분해진 방도 매일 청소해야 했다. 내 숙소 정리도 잘 하지 않는데, 이렇게 남의 방을 성의를 다해서 치우고 있다니…….
“도련님, 솔직히 저 같은 하녀 둬서 좋죠?”
나는 침대 시트를 갈아 끼우다 물었다.
“시끄럽다. 머리 울려.”
내가 침대를 치우는 동안 리안드로는 소파에 쿠션을 베고 누워 있었다.
“별로 말 많이 하지도 않았는데요?”
그렇게 물으며 그에게 다가가자, 정말 두통이 이는 듯 그는 창백한 손으로 제 작은 머리통을 붙잡고 끙끙 신음을 뱉어 내고 있었다.
“열나요?”
“항상.”
“어디 봐요.”
“너 자꾸 함부로……!”
어느 부분에서 울컥한 것인지, 또 되레 성질을 부리는 리안드로를 무시하고 나는 내 이마를 그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확실히 열이 있었다.
그는 몸부림을 치며 나를 밀어내려다가 멈칫거렸다. 내가 ‘어엇…….’ 소리를 내며 뒷걸음을 치자, 리안드로의 얇은 손가락이 내 소매를 붙잡아 다시 제게로 당겼다. 놀라움도 잠시,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그가 말을 건넸다.
“……저번에는…… 미, 미안.”
“…….”
“……어찌 이번에는 대꾸가 없어……. 꼬박꼬박 건방진 소리 잘만 해 대더니.”
리안드로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은 마치 자그마한 새끼 고양이나 토끼를 연상시켜서- 나는 내 볼을 부비며 꼬옥 그를 껴안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나는 감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에, 우리 도련님이…….”
“또 비꼬려거든 그만둬라.”
“그런 거 아니에요! 기뻐서 그래요.”
“……무엇이.”
“방금 저한테 사과하셨잖아요. 웅얼웅얼 잘 안 들렸지만.”
“웅얼웅얼……?”
“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주시면 안 돼요?”
“……싫다.”
“쳇.”
“얼씨구.”
“쳇.”
“…….”
“왜 얼씨구, 안 해 주세요?”
“입 아파서.”
애늙은이 같기는. 나는 눈을 흘겼다. 그러고는 리안드로의 손을 잡아 내렸다. 내가 그에게서 멀어지자 리안드로는 미세하게 입술을 씰룩였다. 나는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약 드실래요? 침대 옆 서랍에 있죠?”
“됐다.”
“네? 왜요?”
“네 손이나 머리 위에 올려놔라. 시원하니 좋다.”
의외였다. 리안드로가 먼저 만져 달라는 요구를 하다니. 역사적인 순간이 아닌가. 이제까지 줄곧 거부만 당하다가.
나는 기꺼이 소년의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그러자 그가 눈에 보일 정도로 몸을 움찔거렸다.
“얼마 뒤면 의사가 오겠군.”
“상태가 좀 나아졌으면 좋겠네요.”
“……나를 걱정하고 있나?”
“그럼요.”
리안드로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안개 낀 흐릿한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쳤다. 그는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게 어려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냥 슬퍼 보이기도 하고, 또 무엇인가를 참고 있는 듯해 보이기도 했다.
“나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본 적 있지만…… 걱정한다 말해 주는 사람은 없었어.”
“저는 도련님이 걱정되는 걸요. 진심이에요.”
“……그 정도는 알아.”
그의 내면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저 감정은 무엇일까. 시시각각 바뀌어 가는 그의 얼굴은 아무런 설명도 해 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무쪼록 좋은 방향이기를 나는 소망했다.
불쌍한 사람. 가엽고 가여운 사람. 아무래도 좋으니 적어도 시력만큼은 좀 나아지면 좋으련만. 그렇다면 이렇게까지 답답하게 살지 않아도 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