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날것 7화
어느 순간 리안드로는 깜빡 잠이 든 듯해 보였다. 검고 긴 속눈썹이 잠꼬대라도 하는 것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눈두덩이에 손끝을 가져다 댔다. 운 적도 없는데 그의 눈가는 붉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리고 거칠게 제 눈을 비비기 시작했다.
“으…….”
리안드로가 내 소매를 붙잡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너.”
내가 소파 아래에 주저앉아 멀뚱멀뚱 그를 지켜보기만 하자 리안드로는 혼자 난리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는 제 손을 여러 번 접었다 펴기도 하고, 멍하니 천장을 노려보기도 했으며, 마지막에는 내 에이프런 어깨 부분의 끈을 그러쥐어 나를 끌어당겼다.
“뭐, 뭐 하세요?”
“이상해. 약도 안 먹었는데 어찌 네 얼굴이 또렷하지?”
“그거야 도련님 눈앞에 있으니까요.”
내 말을 듣고 그가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그러고는 소파 안으로 깊숙하게 몸을 묻었다. 리안드로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아니, 이렇게 해도 보여……. 천장에 저런 그림이 그려져 있었나? 저것도 보이는데.”
“잘된 일 아닌가요? 약이 효과가 좋은가 봐요!”
나는 손뼉을 쳤다. 그야말로 축하할 일이 아닌가.
“방금 약 안 먹었다고 했잖아.”
“아하.”
“돌 터지는 소리를 하고 있어.”
“그럼 이제까지 먹었던 약들이 드디어 힘을 내고 있나 본데요?”
“그럴 일은 없다. 약은 평생을 먹어 왔지 않나.”
“……흐음, 그럼 눈곱이 빠져서…….”
“헛소리.”
리안드로가 대번 미간을 찌푸리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력을 잠시 되찾는다고? 그런 사건이 소설에 나왔던가? 하지만 아무리 소설 내용을 떠올리려 애를 써도 겨우 몇 장으로 간추려진 리안드로의 어린 시절 외전에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혹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어찌 됐든 시력을 되찾았다면 분명 이제까지 먹어 왔던 약이 잘 들어서이기 때문 같은데, 저 고집불통 소년은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들어 먹지 않았다.
그는 다시 몸을 일으켜 내 옷깃을 쥐고 나를 잡아당겼다.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너, 내게 무슨 짓을 했어.”
“제, 제가 뭘 어쨌다고 이러세요?”
급격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리안드로의 감정 변화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어리둥절하여 눈만 깜빡였다. 어느 장단에 맞춰 주어야 하나. 나는 고민하고 있었다.
그 순간, 스멀스멀 리안드로의 왼쪽 얼굴에 그려진 글자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뭐? 내가 잘못 봤나?
나는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만져 보려고 했다. 그러나 손끝이 닿기도 전에 리안드로는 괴상한 짐승 울음 같은 소리를 내며 뒤로 몸을 뺐다. 그가 엎어지듯 소파 뒤로 넘어갔다.
콰당탕!
“도련님! 안 다쳤어요?”
내 질문도 무시하고 그는 구부정한 자세로 몸을 안쪽으로 굽혔다.
잠시,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기만 했다. 아니, 리안드로는 나를 뚫어 버릴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열렸다. 그르륵- 거친 숨소리를 내며 그가 말했다.
“……나가. 너, 내 방에서 나가.”
“아니, 왜 그러시는…….”
나는 답을 요구했지만 그는 묵묵부답, 그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내가 움직이지 않자 리안드로는 기어코 내 치맛자락을 잡아끌어 나를 문 앞까지 데려갔다. 시력이 갑자기 좋아졌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었는지, 그는 벽을 더듬지도 않고 제 발에 걸려 넘어지지도 않았다.
“도련님, 잠시, 도련님, 잠시만요. 저 아직 청소도 다 안 했고-”
쾅!
침실의 창문이 열려 있었던 탓에 문소리가 거칠었다. 나는 몇 번이고 닫힌 문을 두드렸지만 들려오는 답은 없었다.
* * *
딸랑딸랑-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 멍하니 쉬고 있는데 위에서 종소리가 울려 왔다.
그렇게 내보냈어도 당신은 내가 필요한 모양이지? 나는 기세 좋게 저녁 식사가 담긴 쟁반을 들고 그의 방문을 노크했다.
똑똑.
“…….”
두드려도 답이 없자 이번에는 개의치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리안드로는 이불을 목까지 덮고 누워 덜덜 떨고 있었다. 무리하게 움직였던 탓이리라. 가까이 다가가 확인한 소년은 열에 들떠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도련님?”
여름이 한창이어도 그렇지, 환자의 몸으로 오랫동안 바람을 쐬면 좋지 않은데. 나는 얼른 창문부터 닫았다.
그리고 약 봉투를 집어 들어 해열제를 찾았다. 꼬부랑글자는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가 전에 말해 주었기에 분홍색 시럽의 해열제는 곧바로 찾아낼 수 있었다.
“아픈 것 알지만 잠시만 일어나 보세요. 빈속에 약만 먹으면 나중에 더 아파요.”
“……싫어.”
나는 그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불덩이가 따로 없었다. 다행히도 차가운 손이 닿자 벌벌 떨리던 그의 몸은 약간 진정이 된 듯했다.
“그러면요. 스프만 떠먹여 드릴게요. 딱 다섯 스푼만.”
“싫다니까…….”
열에 들뜬 리안드로의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뿌연 시선이 내게 못 박혔다. 나는 마호가니 탁자에 올려 둔 스프를 가지러 가려고 그에게서 손을 떼어 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가 이불 밖으로 손을 빼내 내 팔에 매달리듯 달라붙은 것이다.
“……도련님?”
“……싫다고 했잖아. 싫어. 먹기 싫다. 약도 필요 없어. 그냥 좀 가만히 있어.”
“가만히…… 도련님 옆예요?”
“그래! 꼭 말로 해야만 너는 알아듣나?”
그가 다그쳤다. 내 팔에 달라붙은 리안드로의 피부가 뜨거웠다. 나는 이내 그의 침대맡에 주저앉았다. 그제야 리안드로는 다시 제 눈을 감았다.
“이 방 되게 덥네요.”
“……조용히.”
붙잡힌 손아귀의 힘은 아주 여린 것이었지만 차마 그것을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 잡히지 않은 다른 쪽의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리안드로 역시 서늘한 내 손길이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고통에 일그러져 있던 그의 얼굴이 조금씩 펴지고 있었다.
두꺼운 암막 커튼을 친 탓인지, 리안드로의 침실은 땀이 비죽비죽 나올 만큼이나 더웠다. 나는 에이프런을 펄럭이며 땀을 식히다가 리안드로 또한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
하루도 온전한 날 없이 이렇게 아파하며 평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언젠가는 엘레오노라가 저주를 풀어 줄 테지만, 지금의 리안드로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눈을 뜨고 있는 순간순간이 끔찍이도 고통스럽다고 했다. 대체 이 어린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기에 이런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이러니 내가 어찌 당신을 안타까이 여기지 않을 수 있겠어. 이러니 내가 어찌 당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어.
활자로만 읽었던 장면을 실제로 바로 옆에서 지켜봐야 하는 내 입장 역시 영 편치 못했다. 미래를 알고 있으면 뭐 하나. 리안드로가 이렇게 괴로워하는데도 나는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이렇게 그가 원할 때 그의 곁에 머무르는 것밖에는.
* * *
그날 저녁 이후, 리안드로의 성질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것은 크나큰 변화였다.
물론 그 거칠기 짝이 없는 언사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적어도 식사를 하기 싫다 떼를 부리지 않았으며, 말없이 제 이마에 내 이마를 대어도 더 이상 울컥울컥 성질을 부리지 않았다.
드디어 내 존재를 받아들여 준 것이리라, 그리 생각했다.
나는 오늘 리안드로에게 아침을 먹이고-먹기 싫다 기를 쓰지는 않았지만 채소를 편식하는 유치한 식습관이 있었다- 간밤에 비 오듯 흐른 땀으로 적셔진 그의 몸을 식히기 위해 목욕 준비를 했다.
욕조에 차가운 물을 받아 놓고 침실로 돌아가자, 희한할 정도로 그는 기운이 넘쳐 보였다.
“뭘 봐. 이리 안 와?”
“……제가 보이세요?”
“네가 무슨 유령이라도 되나?”
“아니, 그 뜻이 아니잖아요.”
한 폭의 그림처럼 소파에 늘어지듯 앉아 있던 리안드로가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어제 저 가고 나서 약 챙겨 드셨어요?”
“아니.”
“그러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나는 리안드로를 일으켜 실내화를 신기고 부축했다. 욕실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옷을 벗겼지만 리안드로는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속옷만 걸친 그가 욕조 안에 몸을 담갔다. 나는 약초와 물을 잘 섞기 위해 욕조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휘휘 저었다.
리안드로는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제 다리를 길게 뻗었다.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마르고 긴 다리가 녹색으로 물든 욕조 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할아버지 같아요.”
“너는 못하는 말이 없구나.”
그가 나를 노려보았다. 우리 둘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거리가 있었는데도 그의 눈동자가 정확히 나를 향하고 있어 나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련님. 시력이 정말 좋아지고 있는 거예요?”
“…….”
“아닌가요?”
“어찌 알아. 이런 일은 전에 없었기에 함부로 말하기 어렵다. 어쩌면 네 말대로 약이 드디어 효력을 보이고 있나 보지.”
리안드로는 퉁명스럽게 답했다. 한마디 했다고 또 무슨 따발총처럼 쏴 대네. 나는 입술을 비죽이며 그의 팔을 들어 올려 비누 거품을 칠해 주었다.
“너 왜 자꾸 허락도 없이 내 몸에 손을 대?”
“엇…… 싫으셨어요?”
나는 얼른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리안드로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언제 싫다고 했나.”
“그럼 한번 튕겨 보신 거예요?”
으이구, 농을 건네며 팔꿈치로 그를 툭툭 건드렸다.
“튕…… 뭐? 시정잡배도 그런 말투는 안 쓰겠다.”
그가 획 고개를 돌렸다. 나는 다시 리안드로의 등에 거품을 묻혀 가며 씻겨 주었다. 물론 오늘도 제 상처 자국에 손을 대는 것만큼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밀어냄 없이 시중들 수 있는 게 어디야. 목욕을 마친 뒤 나는 그를 침실로 다시 데려갔다.
점심도, 저녁 식사도 리안드로는 군말 없이 먹어치웠고, 밤이 깊어질 즈음에는 또다시 끓어오르는 열 때문에 해열제를 마셔야 했다. 그가 잠이 들 때까지 침대맡에서 머물다가 나는 숙소로 돌아왔다.
밤이 늦어 하늘에 총총 별이 박히고 노르스름한 달이 둥글게 떠 있는데도 안나는 돌아오지 않았다.
‘많이 바쁜가?’
나는 별생각 없이 잠이 들었다. 그러다 바깥에서 들리는 소란에 일어났다.
무엇인가가 떨어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였다. 나는 벌떡 일어나 숄을 걸치고 숙소를 나섰다.
옆방에 머무르는 하녀들과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며, 놀라지는 않았냐며 서로를 다독이면서 함께 별관 계단을 올라갔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바닥에 어지러이 흐트러진 빳빳한 주홍색 머리칼이었다. 나는 보자마자 ‘아!’ 하고 탄식했다.
결국 안나가 리안드로의 장신구를 훔치는 그 사건이 일어나고야 만 것이었다.
그녀는 리안드로가 던진 촛대를 맞고 발을 헛디뎌 층계참을 험하게도 굴렀다. 내가 들었던 소리는 안나가 바닥으로 추락할 때 났던 소리였다. 아차, 싶었다.
리안드로와 하루하루를 보내느라 안나의 존재 자체를 깜빡 잊고 있었다. 네가 기어코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구나. 계단을 구르고 떨어진 충격으로 그녀는 정신을 잃은 듯했다.
그 와중에도 안나의 손아귀에는 리안드로의 목걸이가 쥐여 있었다.
리안드로는 스스로 걸어 나와, 계단 아래 다른 하녀들 옆에 서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도련님, 무슨 일입니까?”
젊은 하인 하나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별일 없다.”
리안드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눈앞에 벌어진 상황은 굳이 설명이 없더라도 명백했다. 하녀들은 그제야 안나가 넘어지면서 놓쳐 버린 리안드로의 반지며 보석 등이 계단 사이사이에서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 보세요! 안나가 도련님 보석을 훔치려고 한 것이 틀림없어요!”
“얘, 너 본관으로 가서 이레네 부인을 불러와. 나는 이 아이 상태를 확인해 볼게.”
나는 다른 하녀를 도와 안나를 계단 위로 눕혔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달려온 듯 머리에 말린 구르프조차 정리하지 못한 이레네 부인이 등장했다.
“세상에! 세상에, 이 계집애가 정신이 나갔구나!”
이레네 부인은 아직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안나의 뺨을 찰싹 때렸다. 그러고는 이런 일은 우리 선에서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며 공작 부부를 깨웠다. 나는 처음으로 리안드로의 부모님을 보게 되었다.
“별 소란이구나. 하녀 하나가 도둑질을 좀 한 것 갖고. 물을 뿌리든 해서 일으켜 내쫓아 내렴.”
리안드로의 어머니는 금발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화려한 미인이었다. 그녀는 숄로 몸을 감싸며 제 아들을 휙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마주치기조차 싫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리안드로의 시선을 피했다.
“리안드로. 별것도 아닌 일 가지고 난리 피우지 마라. 네 선에서 직접 처리할 수 있는 문제 아닌가.”
공작은 생판 남을 대하듯 차가웠다. 보는 내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제 핏줄을 바라보는 시선이라고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보았다는 양, 그는 대놓고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꼴이 말이 아니로군. 이 이상 시끄럽게 굴지 말고 네 방으로 돌아가도록 해라.”
아무리 그래도 사용인들이 보는 앞이었다. 공작이 제 아들을 대하는 태도에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이러니 안나처럼 제 주인을 공경하지 않는 사용인이 나오는 게 아닌가.
“별일 아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리안드로는 담담한 반응이었다. 부모라는 작자들의 무관심에 경악하여 입을 떡 벌리고 있는 것은 나 하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