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것-22화 (2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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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것 22화

* * *

속이 좋지 않다는 것이 괜한 핑계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리안드로는 줄곧 내 곁에 붙어 앉아 손을 만져 달라, 등을 두드려 달라 칭얼거리고 있었다. 엄지와 검지 사이를 꾹꾹 눌러 주자 그는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뭐 하는데?”

“여기 누르면 소화가 잘된대요.”

“누가?”

잘 알려진 정보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에서는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나는 다른 손으로 리안드로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여전히 허리를 웅크린 상태로 그는 내 손길을 얌전히 받아들였다.

그러는 것도 잠시, 내가 손을 거두어들이자 그가 ‘벌써?’하며 나를 제게로 끌어당겼다.

“……이제 어리광 피우실 나이는 아니지 않나요? 어째 가면 갈수록 더 어려지시는 것 같아요.”

“…….”

리안드로는 불만스럽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가 느릿느릿 내게 더 가까이 제 몸을 숙였다. 그의 따뜻한 손가락이 내 목덜미에 닿았다. 그는 길게 땋아 늘어뜨린 내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심술쟁이.”

“흥.”

그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나는 리안드로에게서 벗어나려 몸을 비틀었다. 그러자 그가 심술궂은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아, 아파요.”

“거짓말은 나쁜데.”

“진짜예요.”

“…….”

끙끙 앓는 척을 하니 그제야 리안드로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늘어진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새파란 눈이 내 마음을 읽으려고 하는 것처럼 가늘게 휘어졌다.

하여간 이 인간 참, 어디서 저런 요사스러운 짓거리를 배워 왔담.

“도련님, 오늘은 이제 수업 없어요?”

“있다. 3시에 검술 훈련.”

“……벌써 3시 넘었잖아요. 어쩜 이렇게 느긋하실 수 있어요?”

“너는 오후에도 일이 많아?”

“말머리를 돌리시려면 자연스럽게 하셔야죠…….”

“그래서 바쁘냐고.”

리안드로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나는 잠시 할 말을 골랐다. 사실을 고하자면 나는 바쁜 적이 거의 없다.

리안드로와 붙어 있는 시간이 줄어들자 할 만한 일이 없나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 일손을 거들고 다닐 뿐, 내가 직접 책임을 지고 해야 하는 업무는 없었다.

“따로 할 건 없어요. 빨래방도 이미 다녀왔고.”

“잘되었다. 그럼 너, 내 검술 수업에 따라와.”

“……네?”

“왜?”

“제가 거길 왜 가요.”

“밥 먹고 오면 옆에 딱 붙어 있어 주겠다면서?”

내가 언제……?

그건 당신이 혼자 신나서 붙인 조건이지, 내 동의를 구한 적은 없었잖아. 귀족 가문 후계자로서 수업을 듣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거늘, 어찌 저리도 한량 놀음을 즐기시는지. 불량한 태도로 수업을 받던 그의 모습이 기억나 나는 절로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아니면 선생더러 수업을 물리라고 해야겠다. 속도 더부룩한 것이.”

시계는 벌써 3시가 한참 지난 시간을 가리키고 있는데, 본인은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리안드로는 앉아 있던 소파에 더욱 깊숙하게 몸을 묻었다. 길쭉하게 뻗은 다리를 소파 위로 올리며 그는 낮잠 잘 채비를 했다. 베개나 좀 가져다 달라며 그가 손을 휘저었다.

“도련님, 평소 수업 태도 별로 좋지 않다고 야단맞으신 적 있다면서요.”

“……어디서 들었지?”

“빨래방이죠.”

“너 걔네들이랑 친하게 지내는 거 작작 좀 해.”

“아니, 인간관계 가지고 그러시나요?”

“이- 비- 같은 웃기지도 않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실실 쪼개고 있고.”

“이비가 어때서요. 귀엽기만 한데.”

“누가 안 귀엽대?”

“도련님 듣기에도 귀여우신가 봐요. 그렇게 신경 쓰이시면 도련님도 저 그렇게 불러 주시면 되잖아요.”

“…….”

그는 모양 좋은 제 입술을 엄지와 검지로 주욱 잡아 늘렸다. 방금 한 말은 잊어. 리안드로가 작게 웅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삐그덕삐그덕 춤을 추며 거절했다.

“싫어용.”

“……나 수업 안 가.”

“아니, 자꾸 수업 빼먹으시면 혼나는 건 도련님이시라고요.”

“너 그 괴상한 움직임은 무슨 짓거리야?”

“요즘 사용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춤이요.”

“……너 빨래방 그만 가, 진짜.”

“도련님은 수업이나 가시라고요.”

“너 따라오면 간다지 않아.”

“아, 거참!”

“뭐!”

“알겠어요! 적어도 훈련복으로 갈아입으시는 성의는 보여 주세요!”

“응.”

이미 최악으로 치닫은 부자 사이를 더 악화시킬 생각인가? 그 냉랭한 공작이 리안드로를 집무실로 따로 불러 꾸짖는 장면을 상상하니, 덜컥 나도 모르게 리안드로의 억지에 동조하고 말았다. 리안드로는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리하여, 일개 하녀가 수업을 참관하게 되는 요상한 사태가 일어났다. 이미 수업 시간의 절반 이상을 까먹은 주제에 소년은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나타났다. 익숙한 일인 듯, 검술 선생은 별말 없이 리안드로를 반겨 주었다.

행패 좀 작작 부리세요. 나는 리안드로에게 속삭였다.

“아무렴 어때.”

그러나 리안드로는 좋기만 한지 입꼬리를 길게 늘여 웃고 있었다. 좀처럼 얼굴 위로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 소년이었다. 그의 진한 미소에 검술 선생은 물론이고 주위에서 훈련을 하고 있던 기사들마저 순간 시간이 멈춘 것처럼 멍하니 리안드로를 바라보았다.

당신 혹시…… 무슨 연무장의 꽃, 그런 존재니?

넋이 나간 듯 리안드로를 보고 있던 이들은 점차 내려가는 리안드로의 입꼬리와 서늘하게 가라앉은 새파란 시선에 정신을 차렸다.

기사들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저들이 하고 있던 훈련으로 돌아갔다. 검술 선생은 옆에 놓아두었던 목검을 리안드로에게 건넸다. 리안드로는 뚱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오늘은 가로 베기 연습을 하겠습니다.”

“그거 저번 주에도 했다지 않아.”

“공자, 검술 연습이란 자고로 반복에 반복을…….”

“되었네.”

하지만 리안드로는 말과는 다르게 선생의 지도를 따랐다. 그는 선생을 따라 이리저리 팔다리를 뻗고 움직였다.

“…….”

검술을 배우고 있는 리안드로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자꾸만 리안드로가 제 휘하의 기사들을 이끌고 황성에 쳐들어갔던 장면이 떠올랐다. 꼭 그렇게 전개되리라는 법도 없는데. 이 정도면 불안증이었다. 나는 초조하게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연무장 구석에서 서성였다.

원작 속의 리안드로는 체력을 단련하기 위해 가벼운 취미로 검술을 배웠다. 그러던 중, 황제의 탄신일을 맞이해 열린 축제에서의 사건으로 인해 진지하게 검을 배우기 시작한다.

대충 모든 왕족 여주인공이 그렇듯이 엘레오노라는 황성 밖을 궁금해했고, 그녀는 시녀들 몰래 평민 옷을 입고 빠져나갔다가 리안드로와 마주친다.

“들키면 안 된다고.”

“비밀로 해 줄 테니 나도 같이 다녀.”

“리안, 당신도 참.”

엘레오노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에게 마음대로 하라고 말해 준다. 리안드로는 ‘네가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까 싶어서 그런다.’라고 변명을 하며 그녀를 따라간다.

그리고 으슥한 골목길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엘레오노라는 시시껄렁한 건달들과 부딪혀 시비가 붙는다. 서브 남주이기는 하지만 역시 포지션답게 리안드로는 손쉽게 건달들을 맨 주먹으로 물리친다.

그 이후부터다. 엘레오노라에게 감사의 인사로 볼 키스를 받은 리안드로가 본격적으로 검술을 배우게 된 것은.

엘레오노라의 곁에 머물기 위해, 그는 그녀의 호위 기사 역할을 자처한다. 가을마다 열리는 사냥 대회에서도 반드시 우승을 차지해 엘레오노라에게 영광을 돌리기도 하고.

“-거기 떨어진 수건 좀 주워 주시겠습니까?”

수돗가 근처의 벤치에 앉아 소설의 내용을 떠올리느라 턱을 괴고 인상을 쓰고 있을 때였다. 멀지 않은 거리에서 중저음의 미성이 들려왔다.

“이보십시오, 거기 갈색 머리 아가씨.”

“……저요?”

그제야 나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내 발치에 모래가 엉겨 붙은 수건이 떨어져 있었다.

치맛자락을 걷은 채 앉아 있는데 기사가 수건을 주우려고 몸을 숙인다면 이상한 장면이 연출될 터. 기사는 이를 예상했던 듯 조심스레 내게 제 수건을 주워 달라 요청한 것이었다.

나는 수건을 들어 탈탈 털어 낸 뒤, 내게 말을 걸었던 기사에게 건넸다.

“깨끗하게 털리지 않네요. 이걸로 얼굴을 닦으시는 건 무리예요.”

“……상관하지 않습니다.”

기사는 짧은 잿빛 머리 아래로 물을 똑똑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는 내게서 받아 든 수건으로 서슴없이 제 얼굴을 닦아 냈다.

땡볕 아래에서 매일 수련을 하는 기사답지 않게 그의 피부는 투명하리만치 희고 고왔는데, 모래가 여기저기 달라붙은 그의 외모는 선이 얇아서 그런지 그다지 남자답게 보이지는…….

“헉.”

잠시만. 잠시만, 나 이 사람 알아!

“뭡니까.”

기사는 저음의 목소리로 내게 질문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은 페데리카였다. 그러니까…… 페데리카, 너- 저 기사분에게 수놓은 손수건을 선물하겠다고?

“아, 아니, 아무것도…….”

나는 도리질을 하며 에이프런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목덜미를 약간 덮는 짧은 길이의 잿빛 머리칼 아래, 그보다도 더 진한 회색빛의 눈이 의문을 담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 그 이상 내게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무뚝뚝한 기사는 수돗가로 돌아가 수건을 물에 적시고, 그것을 제 머리 위에 덮어 올리며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자리를 더 내주려고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러자 기사가 제 손을 들어 나를 제지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데구르륵 눈을 굴리다가 먼저 말을 걸었다.

“……날이 덥네요.”

“…….”

기사는 멀뚱하게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 어색하네. 나는 볼을 긁적였다.

페데리카, 저 기사는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물론 외모는 훌륭하지. 시커멓게 탄 기사들 사이에서 홀로 하얗게 빛나는 데다 늘씬한 체형까지. 거기에 실력도 출중하니까.

그렇지만 이 잿빛 머리의 기사, 릴리아나는 같은 여자를 좋아하는 취향은 없을걸…….

나는 삐질삐질 땀을 흘렸다. 아직은 아니라지만, 그녀는 장차 비중이 커지는 조연 중의 하나다.

엘레오노라에게 버림받고 뵈는 게 없어 막장으로 치닫는 리안드로의 명을 받들어, 그녀는 귀족 여럿을 포함한 황실의 병사들을 도륙한다. 가히 그 장면이 충격적이어서 남주인공인 디에고는 마지막까지 발악하다 창에 목이 찔려 죽는 그녀에게 ‘살인 기계’라는 별명을 붙인다.

릴리도 이미 공작가의 수련 기사 중 하나였구나. 어쩐지 중간부터 등장하는 인물치고 리안드로에 대한 충성심이 상당히 높더라니.

저만치서 붕붕 목검을 휘두르고 있는 리안드로를 쫓는 그녀의 시선을 보니 이제 알 것도 같다. 집중력이 흐트러진 리안드로가 실수를 하자, 릴리는 안타깝다는 듯 탄식을 했다.

“대단하신 분입니다.”

“네?”

“작은 주인님이요. 어렸을 적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발작을 일으키고 실려 가시면서도 저는 괜찮다, 괜찮다, 오히려 어른들을 진정시키려고 하셨던 분입니다.”

아, 그래? 리안드로가 그런 적도 있어? 촛대 던지고 발버둥 치는 모습만 봐서 나는 몰랐는데. 그런데 그건 대체 언제 적의 얘기일까?

묻지도 않았는데 릴리는 이어서, 저가 리안드로에게 검을 바치겠다 결심한 계기를 말해 주고 있었다. 나는 잠자코 릴리의 말을 들어 주었다.

페데리카, 잿빛 머리 기사님은 말이 없는 분이라면서……?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혹시 마음을 읽는 능력이라도 있는지 릴리가 물었다.

“제가 말이 너무 많습니까?”

“아, 아뇨.”

“하녀 아가씨, 당신을 압니다. 작은 주인님이 아프셨을 적부터 돌봐 주셨다고요. 저택 근처를 지나갈 때 당신과 작은 주인님이 대화를 나누던 걸 본 적이 있습니다.”

“부러 밖에서는 아는 척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작은 주인님이 자꾸 말을 걸어오셔서 어쩔 수 없이…….”

“꾸짖는 게 아닌데요?”

그녀의 말에 나는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고작해야 하녀인 나한테 리안드로가 과도한 관심을 보이고 있어 근래 들어 참 난감하던 차였다. 저주를 풀어 준 사이니 우리가 애틋한 것은 맞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다른 사용인들은 신분의 벽이 없는 우리 사이를 의아하게 보았다.

그래서 나는 릴리 역시 나를 아니꼽게 보는 것은 아닌가 했다. 하지만 릴리는 담담한 얼굴로 내게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작은 주인께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시게 된 것에 저는 분명 당신의 덕이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도 그럴 것이 당신이 그분의 근처에 머무르게 된 이후로 작은 주인님은 빠르게 건강을 찾으셨으니.”

아, 비밀인데 그건.

“에이, 제가 무슨 일을 했다고 그러세요. 작은 주인님은 이미 조금씩 나아가고 계셨어요. 다행히도 병이 완치된 거고요.”

“글쎄요.”

나는 릴리의 날카로운 콧대와 고운 턱 선을 바라보았다. 미형의 외모가 짧은 머리카락 덕에 중성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키도 큰 데다 헐렁한 훈련복을 입고 있으니 남자로 착각할 만도 하지.

한편으로는 페데리카의 심정도 이해가 갔다. 저 멀리서 연무장을 돌고 있는 근육질의 기사들도 그들 나름의 매력이 있었지만, 혈관이 다 비칠 정도로 투명한 피부를 가진 그녀는 독보적이었다.

“왜 그렇게 봅니까?”

“아, 너무 예쁘셔서.”

“……예쁘다고요?”

“네.”

그녀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제가 여자인 것 알고 계셨습니까?”

“딱 봐도 여성분이신걸요.”

“딱히 숨기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가끔 하녀분들이 연정을 품으십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만약 릴리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나도 아무것도 몰랐다면 반했을지도 모르겠다.

릴리는 무뚝뚝하게 나를 살피다가 저도 슬쩍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웃는 이유 모르겠습니다.”

“그러는 기사님은 왜 웃으시는데요?”

“당신이 웃으니까.”

나는 주섬주섬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얼굴에 덕지덕지 말라붙은 모래가 영 보기 힘들었다.

“고백하는 건 아니에요.”

“저도 압니다.”

릴리는 깨끗한 내 손수건을 선뜻 받아 들고 제 얼굴을 닦아 냈다. 나는 턱을 괴고 그녀를 보며 계속해서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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