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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것-23화 (23/124)

# 23

날것 23화

어느샌가부터 해가 지려는지 온 세상이 오렌지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길쭉한 그림자가 우리가 앉아 있던 벤치로 다가왔다.

“고, 공자. 공자, 제발 검에 집중해 주시겠습니까……?”

검술 선생은 비죽이 흘러나온 땀을 닦으며 부탁하고 있었다. 리안드로는 나와 릴리를 번갈아보면서 목검을 붕붕 휘둘러 댔다. 손아귀에 힘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주먹이 희게 질려 있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네……?”

학생이 먼저 수업을 마쳐 버리는 진귀한 광경이었다. 리안드로는 세게 잡고 있던 목검을 대충 땅에 던지고는 걸음을 옮겼다.

목검을 줍는 선생이 울적해 보였지만 나는 위로를 건네지 못했다. 리안드로가 몇 걸음을 떼더니 몸을 돌려 릴리를 노려봤기 때문이다. 그런 리안드로를 처음 본 것이 분명한 릴리는 당황해하며 내게 물었다.

“뭡니까.”

“저도 잘…… 일단 저는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아, 그럼 손수건은 잘 빨아서 돌려 드리겠습니다.”

“그냥 주세요. 저 빨래방에서 일해요.”

“아니요, 제가 직접 빨아서 드릴게요.”

“정 그러시다면요.”

“아가씨, 이름이 뭡니까?”

“이벨리나요.”

“그럼 어디서 보는 게 좋을-”

“빨리 안 와?”

릴리의 마지막 말은 리안드로의 외침에 무참히 씹혀 사라졌다. 그는 내게 손짓했고, 나는 치맛자락을 잡아 올리며 릴리에게 인사를 한 뒤 리안드로의 뒤를 따랐다.

* * *

“더워.”

제멋대로 수업을 끝내 버리고 자리를 뜬 주제에, 리안드로는 뻔뻔하게 내게 목욕을 요구했다. 날이 좋아 땀을 비 오듯 흘린 소년은 씻고 싶어 했다. 그가 제 방으로 향한 사이, 나는 욕실로 들어가 욕조에 물을 받았다.

차가운 물을 가득 받아 녹색 약초를 띄어 놓고는 했지. 그때는 비쩍 말라서 내게 만지지도 말라며 억지를 부리기도 했는데. 벌써 이리 많이 자라서는.

나는 욕조 위에 걸터앉아 물을 휘저었다. 딱 좋은 온도의 물이 절반 이상 차올랐다. 수도꼭지를 잠그고 리안드로를 부르려고 하는데, 그가 먼저 욕실 문을 열고 성큼성큼 들어왔다. 하반신을 수건으로 감싼 그는 곧장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리안드로는 욕조 위에 제 팔을 걸친 뒤 느른한 얼굴로 고개를 젖혔다. 나는 구석에 놓인 비누를 꺼내 오며 새삼 그를 훑어보았다.

병약 미소년인 줄로만 알았더니, 나날이 체력을 단련하면서 근육도 조금씩 붙기 시작했는지 몸매가 탄탄해지고 있었다.

“씻겨 주는 것도 오랜만이네요.”

나는 후훗 소리 내어 웃으며 손에 비누 거품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리안드로의 등을 닦아 주기 위해 다가갔다. 제 등에 내 손길이 닿자 그는 놀란 듯 몸을 굳혔다.

“씻겨 주게?”

“당연하죠.”

“됐어.”

“거, 거절하시는 거예요?”

우리 애기, 다 컸네…… 이제 시중도 안 받으려고 하네…….

나는 시무룩해졌지만 리안드로는 내 시선을 피하며 비누를 가져갔다.

“이 정도는 이제 혼자 할 수 있어.”

“네…….”

“아, 언제까지 애새끼 취급할 거야?”

“평생……?”

“그건 안 되지.”

그가 차갑게 대꾸했다.

누나 조금 섭섭해, 리안드로……. 어화둥둥 키워 줬더니 맨살에는 손도 못 대게 하다니.

리안드로는 내 손에 묻은 비누 거품마저 앗아 갔다. 나는 욕조 물에 손을 씻어 낸 뒤 축 처져서, 그가 들어 있는 욕조 옆에 쪼그려 앉았다. 리안드로는 그런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

“뭐 해, 머리는 감겨 줘야지.”

“네!”

“가끔은 네가 더 어리게 구는 거 알고 있나?”

“아니요!”

“저거 봐.”

나는 리안드로의 검은 머리카락에 물을 묻혔다. 눈가를 살짝 가리고 있는 길이의 머리카락이 뒤로 넘어가자 소년의 시원한 눈매가 드러났다. 새카만 속눈썹 때문인지 눈가가 짙어 보였다.

“이벨리나, 네가 올해로 몇 살이지?”

“저 18살이요.”

실제 나이는 이미 스물하고도 몇 개를 더 세어야 하지만, 나는 이제 빙의된 몸에 완벽 적응해서 18세 청춘의 나이를 즐기고 있다.

“성인이네.”

“그렇죠. 그건 왜요?”

“아니, 뭐. 주변에서 별말 없나 보지?”

“무슨 말이요?”

“아니면 말고.”

나는 재차 되물었지만 리안드로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것을 끝으로 그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천장을 응시하기만 했다.

“바로 침실로 돌아가실 거죠? 가운 가져올게요.”

나는 벽에 걸려 있던 남색 가운을 가지고 돌아왔다. 리안드로는 두꺼운 수건으로 몸을 닦은 뒤 내가 내민 가운에 제 팔을 끼워 넣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뒤를 돌자, 그는 하반신을 감싸고 있던 수건을 벗어 가운의 앞섶을 정리했다. 밖으로 나서는 그를 따라 나 역시 리안드로의 침실로 향했다.

“옷은 침대 위에.”

“두고 나갈까요?”

“저녁은 필요 없어.”

“아직도 속이 영 별로예요?”

“응.”

아직 마르지 않은 리안드로의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나는 그가 갈아입을 편안한 옷을 가져와 침대 가장자리에 내려 두고, 소파에 앉아 있던 리안드로에게 인사했다. 그러고는 문고리를 돌려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나 손잡이를 돌리려는 그 순간, 휘적휘적 걸어온 리안드로가 손을 뻗어 다시 문을 닫아 버렸다.

쾅-

청량한 그의 향기가 콧속으로 훅 들어와 깊이 숨을 들이켰다.

“도련님?”

내 부름에도 그는 여전히 방문을 손으로 막고 서 있어, 나는 리안드로와 문 사이에 끼어 빠져나가지 못한 채 갇히고 말았다.

“……도련님?”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문 초저녁이었다. 초를 밝히지 않아 방 안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늘진 바닷빛 눈동자가 서서히 다가왔다. 서로의 코가 맞닿을 만큼 거리가 가깝다. 나는 결국 거의 리안드로의 품에 안긴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언제 이렇게 커 버린 거야. 청아하게 맑아 보이는 소년의 얼굴과, 벌어진 가운 사이로 드러난 탄탄한 가슴 근육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매일 봐도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 소름 끼치는 아름다움이었다.

그는 붉게 물이 든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제 축축한 머리를 내 어깨 위로 묻었다. 새하얀 블라우스 위에 물방울이 점점이 퍼져 나갔다. 피부에 착 달라붙은 옷 위로 리안드로는 제 볼을 비비적거렸다.

“너는 그런 기생오라비 같은 놈이 좋으냐?”

“네?”

“아까 연무장에서, 좋다고 웃고 있었잖아. 그 허여멀건 놈.”

“아, 그분 여성분이세요.”

“뭐?”

리안드로는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고, 그를 마주 보려 얼굴을 아래로 내린 나와 그만 부딪치고 말았다. 나는 얼얼하게 아파오는 턱을 매만졌다. 리안드로 역시 제 이마를 문지르며 눈을 깜빡였다.

“어쩐지…… 기사치고는 덩치가 작더라니.”

“게다가 도련님을 엄청 좋아하시던데요. 도련님 얘기하면서 친해졌어요.”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해 줬어야지, 나는 또…….”

“또?”

“아니다.”

“끝까지 말해 주셔야죠.”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기다란 속눈썹을 내리깔며 말했다.

“평민들은 보통 성년이 되자마자 결혼할 준비를 한다고 들었다. 혹시 네게 혼담이 들어오지는 않았나?”

“안 들어왔어요.”

“……정말? 확실해?”

“설마…… 도련님, 아까 그래서 갑자기 조용해지신 거예요?”

“……응.”

“도련님…….”

“왜 불러.”

말하고도 부끄러웠는지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피부가 워낙에 하얀 탓에 드러난 뒷덜미가 붉었다. 나는 비식비식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꾸욱 참으려고 노력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우리 도련님, 저 벌써 시집갈까 봐 걱정하셨구나?”

“…….”

“하기는, 저 아니면 누가 도련님이랑 매일 놀아 줘요?”

“아니, 그게 아니고…….”

그는 무어라 변명하려고 했지만 떠오르는 말이 없는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결국 깔깔 소리를 내어 웃으며 소년과 시선을 마주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나를 피하고 있었다.

“저 좀 봐요.”

“……싫다.”

“걱정 마요, 도련님. 저 도련님 혼자 두지 않을 테니까요.”

나는 웃음을 멈추었다. 좀처럼 잘 없는 일이었지만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소설 속으로 들어왔는데? 당신 때문이야. 당신 너무 안타까워서 슬퍼하다가 들어온 거라고. 그런데 내가 설마 리안드로를 내버려 두고 홀랑 내 살길 찾아갈까?

“정말이지……?”

“그럼요.”

“믿는다.”

“믿어 주세요.”

나는 굳은살이 박혀 단단해진 소년의 손을 마주 잡으며 말했다. 물기 어린 듯 촉촉해진 푸른 눈이 나를 담았다. 나 또한 웃음기 사라진 얼굴로 리안드로를 바라보았다.

그는 불안했던 것이다. 더 이상 저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는 내가 멀어져 갈까 봐.

아직도 소년의 세상은 협소했다. 저주가 사라진 뒤로 리안드로가 내딛게 된 공간은 점차 넓어졌다. 하지만 그는 제 마음속 깊이 사람을 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주에 한 번은 부모와 식사를 하고, 휴일 없이 공부하며 수많은 이들을 만났지만, 리안드로는 그 누구와도 친밀해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의 세계에는 단지 나 하나뿐. 그뿐.

그런 나 역시 싫다 싫다 발버둥 치는 리안드로의 속을 뒤집어 뚫고 들어갔다.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나를 밀어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들어갔다. 노력은 결실을 보여 주었다.

리안드로는 이제 나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고 내 말이라면 곧잘 따라 주었다. 나는 원작을 파괴하여 소년의 저주를 풀어 주었고, 그 대가로 소년은 제 마음을 내주었다.

그는 아직 사람을 공유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제 사람이라 생각했던 내가 다른 하녀들과 농담을 건네며 웃고 있으면, 마치 상처라도 받은 듯한 얼굴을 하고는 했다. 그 대상이 남성일 경우에는 더했다. 그러니까 지금도 릴리를 남자로 착각해서 이런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서툰 사람.

그러나 어린아이처럼 굴 수 있는 시절은 잠시 잠깐이다. 리안드로는 성장하고 있다. 싫다고 하더라도 그는 인간관계를 넓혀야 한다.

17세라는 어린 나이에 공작 위를 이어 가야 할 사람이었다. 하녀에게 어리광을 피우는 것도, 일터에 종종 찾아오는 것도, 그만두어야 할 때가 곧 올 것이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 나는 물었다.

“도련님은 친구 없어요?”

제 덩치는 생각도 않고 소년은 내 어깨에 기대어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제 고개를 저었다.

“항상 저랑만 있을 수는 없어요.”

“……언제는 혼자 두지 않겠다며.”

“물론 그러지는 않겠지만, 언제까지고 저랑 소꿉장난하실 수는 없잖아요.”

“난 좋은데.”

“안 돼요.”

“난 좋아. 언제까지고…… 너만 있으면.”

“큰일 날 소리를 하시네요.”

“아무래도 좋아.”

막무가내였다. 나는 한숨을 폭 내쉬며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아 등을 토닥여 주었다. 다 커 가지고 하는 짓은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조금씩이라도 좋다. 아직은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지만, 언젠가는 저도 받아들여 줄 날이 오겠지. 언제까지고 우리 둘만의 세상에 남아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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